나와 한솥밥 먹었던 'MBC 기자 이진숙' 관찰기

한때 앞장서 노조 파업 유인물 배포했는데

MB정권 이후 완장에 취해 사리분별 못해

안전한 곳에서 CNN 받아쓰던 종군 여기자

세월호 참사 땐 이라크 총리 인터뷰 우선

이젠 좌파 우파 영화 감별 자격증 받았나

공사 구분 못하는 무능…자리 탐하면 안돼

2024-07-22     송요훈 편집위원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1994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시사매거진 2580> 부서에 소속되어 있었다. 재주가 넘치는 몇몇 선배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시사프로그램이고, 시청자들의 반응이 꽤 좋았다. 하루는 <시사매거진 2580> 출범의 주역인 데스크 선배로부터 고엽제 후유증이 2세에게 대물림되어 이중의 고통을 겪는 월남전 파병용사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취재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썩 내키진 않았다. 지난번에 고발성 보도를 했는데 또 해야 하느냐, 이번에는 말랑말랑한 화제성 취재를 하고 싶다고 투덜댔지만 왠지 선배의 표정에선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절실함 같은 것이 느껴져 거부할 수가 없었다.

고엽제 피해자들이 있다는 건 알려져 있었지만 정부조차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을 때이니 취재할 곳이 마땅찮았다. 요즘은 사라진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뒤져 고엽제전우회 번호를 알아내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방문 날짜를 정했다. 약속된 날에 서울 잠실에 있는 향군회관으로 찾아갔는데 몇 평 될까 싶은 작은 사무실은 어둡고 칙칙했다. 고엽제 후유증이 2세에게 대물림되는 사례가 파악해달라고 부탁했고, 고엽제전우회는 지회를 통해 파악한 사례와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고엽제 후유증 대물림 취재는 시작되었다. 논산에서 전주와 김해를 거쳐 포항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파월용사들은 대부분 형편이 어려웠다. 참전 수당을 모으면 고향의 부모님에게 논 한 마지기라도 사드릴 수 있겠다 하여 지원한 가난한 집안의 병사들이었다. 월남에서 복무할 당시에는 고엽제가 뭔지도 몰랐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다고 했다. 고엽제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으니 하늘에서 미군 항공기가 고엽제를 살포하면 비를 맞는 것처럼 시원해서 좋다며 웃통을 벗고 맞기도 했고, 모기나 해충이 덤비지 않는다고 몸에 바르기도 했단다.

귀국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심하게 가렵고 등과 배에 또는 팔이나 다리에 무더기로 발진이 생기는 증상이 나타났지만 고엽제 후유증이라는 건 생각도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비슷한 증상을 앓는 파월용사들이 있고 미국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고서야 그게 고엽제 후유증이란 걸 알게 됐지만, 우리 병사들을 남의 나라 전쟁터로 보낸 정권은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저 내 팔자려니 했습니다. 참전수당 좀 받아 집에 논 한 마지기라도 늘리겠다는 욕심을 부린 업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에게도 같은 증상이 나타나더라구요. 나는 업보라치고 내 새끼들은 무슨 잘못이 있어 저런 천벌을 받아야 합니까.”

스무 살 넘은 딸이 있는데 심한 피부 발진이 있어 결혼은 생각도 못 한다며 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는 호소는 약과였다. 멀쩡하던 고등학생 아들이 갑자기 주저앉더니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며 가슴을 치는 고엽제 피해자 앞에선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나름 공들여 취재했고, 밤을 지새우며 기사를 작성했다. 기사 검수를 하는 차장 선배의 실력도 좋았고, 영상편집을 맡은 동료의 능력도 탁월했다. 덕분에 <시사매거진 2580>에서 방송한 ‘대물린 고엽제 후유증’은 시청자들의 반응도 좋았고, 다행스럽게도 민주진영에서 성장한 대통령들은 ‘국가의 의무’에 관심이 있어 고엽제 후유증 피해자들에게 치료과 보상 등 국가의 보살핌이 비로소 시작되었으니 취재와 보도를 한 기자로서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었다. <시사매거진 2580>에서의 그 보도는 뉴욕 방송 페스티벌에 출품되어 본선까지 올랐다.

그 자랑을 하려고 길게 설명을 늘어놓은 게 아니다. 내가 그리고 MBC가 ‘대물린 고엽제 후유증’을 취재하고 방송한 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의 피해를 치유하고 보상하는 건 ‘국가의 의무’인데 국가가 그러한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였다. MBC는 고엽제 피해자들만이 아니라 사각지대에 방치된 북파공작원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보도를 많이 한 편이었다.

다른 언론사들에 비해 MBC가 그런 보도를 많이 한 건 MBC에 어떤 정치적 색깔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 소외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고 MBC는 공영방송으로서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무언의 공감대가 있었다. 그러한 공감대는 MBC의 방송강령으로 확립되었다.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MBC에선 기자들의 방송독립과 공정방송 실천 선언이 있었고, 언론사 중에서 가장 먼저 노조다운 노조가 설립되었다. MBC가 나름대로 ‘MBC다움’을 지금껏 유지해온 건 노조의 역할이 크다. MBC에서 기자로 30년 넘게 밥 먹고 살았고 그 세월 동안에 숱하게 파업도 했지만 방송독립이나 공정방송이 아닌 임금 인상 등을 이유로 파업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젊은 날의 이진숙도 권력으로부터 방송은 독립되어야 한다고 외치던 기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92년 MBC 노조의 파업 당시 시민들에게 노조 홍보물을 배포하던 이진숙 기자. 언론노조 MBC 본부 제공

<시사매거진 2580>에서 ‘대물린 고엽증 후유증’ 취재와 보도를 하고 한참이 지나서, 이명박 정권 초기의 광우병 사태로 기억하는데,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MBC 앞에 몰려와 가스통을 들이대며 빨갱이 방송 MBC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그 살벌한 현장을 보면서 ‘대물린 고엽제 후유증’을 취재할 때 찾아갔던 칙칙하고 어두운 고엽제전우회 사무실이 떠오르고, MBC 카메라 앞에서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던 파월용사들이 떠올랐다. MBC의 그런 보도가 없었다면 고엽제 피해자들은 지금도 팔자를 원망하며 가슴을 치고 있을 것이고, 고엽제전우회는 여전히 향군회관의 작은 사무실에서 가난한 살림을 이어가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국가의 지원으로 이전에 비해 부유해진 고엽제전우회에 화가 나기도 했다.

30년 지난 일을 다시 꺼내는 건 ‘방송독립 쟁취하고 공정방송 실현하자’고 같이 구호를 외치던 한때의 동료 기자 이진숙씨의 요란한 등장 때문이다. 그래도 한때는 MBC라는 한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그와 나는 꽤 오랫동안 가까운 선후배로 지냈다. 가훈이 정직이고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감명 깊게 읽었으며 간디를 존경하고 아침이슬이 애창곡이라는, ‘돈의 화신’ 이명박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학연을 내세워 열심히 이명박에게 줄을 대던 김재철이 MBC의 사장이 되기 전까지는.

한솥밥을 먹었다는 건 단지 동고동락을 했다는 게 아니다. 그 말에는 인간적인 면모를 알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에 보인 이진숙의 행보가 내겐 놀랍지 않다. 돈에 대한 욕심에서 이명박이 갑이라면 자리에 대한 욕심에서 이진숙은 그에 못지않다. 내가 본 이진숙은 늘 타인의 관심을 갈구했고, 완장을 욕망했다. 돋보이고 싶어 했고, 돋보임으로써 존재감을 확인해야 마음의 평화를 얻는 사람이었다. 바그다드 시내의 안전한 호텔에서 CNN 보도를 중계하며 얻은 이라크전 종군 여기자라는 허명은 완장에 대한 욕망을 더 키웠을 것이다.

나는 뒷담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남의 흉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진숙에 대해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야겠다. 내게 중요한 건 이진숙이 아니라 MBC이고 공영방송의 앞날이고 이 나라의 언론자유이고 민주주의이므로. 내가 아는 이진숙에겐 방송이나 언론에 대한 어떤 고민이나 철학이 없다. 돋보여야 하는 욕망을 채워주면 영혼도 팔 사람으로 보인다. 더 빛나는 완장을 채워주면 제2, 제3의 변절도 할 사람이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런 인물을 방통위원장에 앉힌다는 건 방송에 대한 모욕이고 언론자유를 조롱하는 거다.

이진숙은 영화 <기생충>과 <설국열차>를 좌파 영화로 분류하고, 배우 정우성에겐 좌파 배우라는 낙인을 찍었다. 헐리우드를 휩쓸고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리고 외국에 나가면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해준 그 영화가 왜 좌파 영화인가? 세월호 다큐의 나레이션을 하면 좌파 연예인이 되는 건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어린 학생들을 추모하는 게 좌파 우파를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면 우파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이진숙은 무슨 자격으로 이것은 좌파 영화 저것은 우파 영화라고 분류하고, 이 사람은 좌파 연예인 저 사람은 우파 연예인으로 낙인을 찍는가. 이진숙에겐 사상검증 자격증이라도 있는가? 이진숙은 좌파 우파 감별사인가? 앞서 이동관도 김홍일도 그랬지만, 이진숙 같은 인물이 방통위원장에 앉히는 건 언론 자유에 조종을 울리는 동시에 K-콘텐츠의 몰락을 예고하는 거다.

 

2014. 4. 18. 세월호 참사 이틀 뒤에 보도된 이진숙 당시 MBC 보도본부장의 이라크 총리 인터뷰 보도 화면. 오른쪽 상단에 실종 268명이라는 자막이 걸려 있다. 언론노조 MBC 본부 제공

이진숙은 MBC 보도본부장 시절에 친히 직접 이라크에 가서 이라크 총리 인터뷰를 했다. 그 정도의 인터뷰는 중동지역을 담당하는 특파원이 해도 된다. 이라크와 관련한 특별한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진숙은 자기를 드러내 보이고 관심을 받고 싶어 보도본부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보도본부장 이진숙은 세월호 참사 이틀 뒤인 2014년 4월 18일 뉴스데스크에 방송하도록 지시했다. MBC만이 아니라 모든 방송이 하루 종일 ‘세월호 참사’를 방송하고 있었고, 전 국민의 시선은 팽목항으로 쏠려 있을 때였다.

이 밤이 지나면 세월호에 갇혀 물속으로 사라진 아이들을 영영 구하지 못할 거라는 위기감에 전 국민이 발을 동동 구르던 그 시간에 MBC 보도본부장 이진숙에겐 ‘세월호의 아이들’보다 자기가 나오는 이라크 총리 인터뷰 보도가 더 중요했을까. 후배 기자들이 지금은 이런 보도를 할 때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이진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그 인터뷰는 3분에 걸쳐 방송됐다. 뉴스에서 3분은 굉장히 긴 시간이다. 세월호 참사 이튿날에 뉴스데스크에 방송된 그 인터뷰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사망 28명 실종 268명 구조 179명’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이라크 총리에게 ‘이라크 총리로서 이라크 전역을 통치하고 있느냐’고 묻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인터뷰가 그리도 중요했는가. 그때 이진숙의 질문 중에는 ‘당신은 독재의 검을 휘두르는 또 다른 독재자라면서 당신을 사담 후세인에 비유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도 있는데, 그 질문을 방통위원장 후보 이진숙에게 던지고 싶다. 지금 한국의 대통령은 검찰을 앞세워 독재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 지붕 아래에서 한솥밥 먹은 경험으로 말하자면 이진숙은 완장에 취한 사람이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에 취해 사리분별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내가 본 이진숙은 그런 사람이다.

자기의 욕심 앞에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공적인 일을 맡아선 안 된다. 7월 24일과 25일 이틀에 걸쳐 열리는 이진숙 인사청문회에서 바닷속으로 사라진 세월호에 268명의 국민이 갇혀 있는 비상한 상황에서도 굳이 이라크 총리 인터뷰 보도를 방송해야 했는지, 그런 게 방송의 사유화가 아닌가 묻는 질문도 나오기 바란다.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이진숙은 방통위원장이 돼도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개인의 무능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무능한 자가 자리를 탐하면 죄가 된다. 무능한 자가 높은 자리에 앉을수록 더 많은 남들이 피해자가 되므로. 그걸 지금 우리 국민이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8일 오전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경기도 과천시의 한 오피스텔 건물로 첫 출근하고 있다. 2024.7.8.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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