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일등병이 찍은 역사적 특종사진-만삭의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 ②]

구출된 위안부들을 세계에 처음 알린 UP 특종 보도

숭산의 위안부 24명, 보수도 고향 편지도 받지 못해

잊혀진 2차 세계대전 참극 윈난성 ‘라모 공방전’

여성들은 모두 권총으로 자결?

텅위에 전투 때 숨진 위안부들, 학살일까 자결일까

2024-07-16     배연홍 시사 저널리스트
배연홍 국제분쟁 전문 시사 저널리스트

미군 병사들이 촬영한 위안부들

미치나 수비대가 결사적인 탈출을 시도할 무렵, 중국 국민당군과 대치하던 윈난성의 라모(拉孟)에서도, 일본군은 전멸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본군은 앞서 말한 ‘원장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1942년 5월 버마에서 윈난성의 누장(살윈강)까지 공격해 들어가 이 루트상의 라모에 최전선 진지를 구축했다. 누장 서안에 있는 해발 1500~2000m의 산들에 여러 방어진지를 구축해 진지와 토치카를 잇는 교통호(참호)를 둘러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진지는 중국 측에서 숭산(松山)으로 불렸으며, 깊은 계곡을 흐르는 누장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계속 마주보는 형세였다.

잊혀진 2차 세계대전 참극 윈난성 ‘라모 공방전’

일본군이 라모를 점령한 지 2년째인 1944년 6월 초, 중국군 제8군은 7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누장을 건너 총 공격을 개시했다. 보병 제113연대를 주력으로 하는 일본군 약 1200명의 고립 무원의 싸움이 그로부터 백일이나 계속된다. 소년병들이 많이 포함된 오합지졸의 중국군은 초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내지만, 8월이 되면 진지의 지하까지 갱도를 파고 들어가 총 6000파운드의 TNT 폭약을 설치했다. 폭파(8월 20일)는 진지의 언덕을 칼데라 분화구처럼 함몰시킨 엄청난 위력이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일본군의 저항은 계속되지만, 9월 7일, 결국 전멸했다.

 

연합군과의 공방전 끝에 일본군이 전멸한 라모 전투가 벌어진 중국 남단 윈난성(빨간색)과 버마(미얀마) 의 접경지역. 바로 왼쪽이 버마.  위키백과

한편 인해전술을 취한 중국 측의 희생도 커서, 전사자가 7000명이 넘었다. 그리고 1주일 뒤인 9월 14일에는 80㎞ 떨어진 텅위에의 일본군도 전멸해, 북버마에 있던 일본군은 완전히 소탕됐다.

라모 공방전은 제2차 대전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곳에서 벌어져 중일 양쪽이 엄청난 희생자를 낸 처참하기 짝이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전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민당의 대일전 승리를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중국·버마·인도(CBI)' 전역(戰域)은 '제2차 대전의 잊혀진 전역'으로 불리며 양군이 명운을 건 라모의 사투 등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전멸한 일본군 쪽은 살아남은 병사들의 회상록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 라모가 다시 각광받게 된 것도 1990년대 초의 조사로 위안부의 존재가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사진 2

라모 수비대 전멸 뒤인 1944년 9월 7일 중국군의 포로가 된 4명의 조선인 위안부. 오른쪽 끝 만삭의 여성이 박영심.(제164통신 사진중대 찰스 해트필드 일등병 촬영)

미군 일등병이 찍은, ‘위안부’ 문제 상징 역사적 사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된 라모의 사진(사진 2)에 찍힌 것은 더러워진 옷을 입은 맨발의 위안부 4명과 이들을 구출했던 한 명의 중국인 병사다. 여성 중 한 명은 임신부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촬영한 것은 미 육군의 ‘제164 통신(시그널) 사진중대’ 소속의 해트필드 일등병. 구출 직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 설명은 숭산에서 중국 제8군의 포로가 된 4명의 조선인 여성, 촬영일은 '9월 3일'로 돼 있다. 이것이 나중에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진이 되리라고는, 촬영자인 일등병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3

1944년 9월 8일, 중국인 장교의 심문을 받는 라모의 조선인 위안부.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미군 연락팀의 아서 빅슬러 하사관(제164통신 사진중대 G.L. 코크렉 5등 기능병 촬영).

 

사진 4

라모 수비대 전멸 후인 1944년 9월 7일 중국군에 의해 구출된 직후로 보이는 박영심이 만세를 부르는 장면. 제164통신 사진중대의 에드워즈 페이 하사관 촬영(KBS 화면에서 캡처).

 

사진 5

라모 수비대 전멸 뒤인 1944년 9월 7일, 중국군에 구출된 직후로 보이는 조선인 위안부들. 사진 2에서는 왼쪽에서 두 번째 여성,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여성은 오른쪽에서 두 번째. 제164통신 사진중대의 에드워즈 페이 하사관 촬영(KBS 화면서 캡처).

또 한 장의 사진(사진 3)에는 4명의 여성이 중국군 제8군 장교(신카이 대위)의 심문을 받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촬영일은 5일 뒤인 9월 8일. 신 대위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미군 연락팀의 아서 빅슬러 하사관이라고 설명에 적혀 있다. 라모에는 위안부가 24명 있었다고 하며,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의 일본인 위안부를 포함해 10명이었다. 그러나 라모 수비대의 전멸은 9월 7일이므로 사진 2의 촬영일이 9월 3일이라면 중국군의 포탄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구출된 셈이 된다.  또 9월 3일이라면 구출되고 나서 5일이 지나서야 심문이 이뤄졌다는 얘기여서, 이 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구출된 위안부들을 세계에 처음 알린 UP 특종 보도

이 사진들을 찍은 미군의 '사진 중대'는 보통 스틸 카메라맨 1명과 무비 카메라맨 2명으로 팀을 짜 전장을 기록했다. 2020년 KBS가 이 사진 중대가 촬영한 필름 영상을 발굴해 구출 당시 생생한 상황을 메인 뉴스 프로그램(2020년 5월 28일)으로 보도했다. 사진 2에 찍힌 만삭의 위안부가 같은 사진에 찍힌 중국군 병사의 손을 잡고 카메라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장면(사진 4. KBS 화면에서 캡처)이 비춰졌다. 웃고 있지만 그 표정은 어딘가 어색하다. 다른 여성들의 표정도 굳어 있고 불안해 보인다(사진 5). 중국군에 붙잡히면 강간당한 뒤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상(사진 5)에서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여성은, 사진 2에서는 만삭의 위안부 옆에 있는 여성인데, 거기에서는 피가 닦여져 있다. 구출 직후 만세를 부른 뒤 어딘가에서 쉬고 있을 때 찍힌 것이 사진 2였던 것 같다. KBS도 영상 촬영일을 9월 7일로 추정하고 있으며, 포격 종료 뒤 잔존병 소탕작전에서 발견됐다면 다음날 심문(사진3)이 있었던 것도 납득이 간다. 사진 2의 촬영일 '9월 3일'은 기재 실수로, 일본군이 전멸한 9월 7일 찍은 것이었다.

숭산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들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귀중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다. CBI(중국 버마 인도) 전역의 미군 병사들 사이에서 읽혀진 '라운드업'(1944년 11월 30일자)이라는 주간신문에 게재된 '잽(일본) 컴포트 걸즈'라는 특종 기사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위안부 보도다. 기자는 UP 통신사(나중에 UPI 통신사)의 월터 랜들. 당시 충칭에 있던 UP의 중국 지국장이었다. 살윈강(누장) 전선발로 여겨지는 기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숭산의 위안부 24명, 보수도 고향 편지도 받지 못해

일본은 살윈 전선에 있는 숭산, 그밖의 큰 요새에 여성들을 데려갔다. 중국군 부대와 함께 행동한 미군의 연락 장교는 텅위에에서 이 일본 만행의 증거와 처음으로 마주쳤는데, 한 명의 조선인 여성이 근처의 폭격으로 일본군의 무기 더미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만주를 탈출한 뒤 지금은 미군을 위해 일하는, 일본어를 구사하는 중국인 학생의 도움으로 숭산의 5명의 불쌍한 여성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중 4명은 농민의 딸로 24세부터 27세 나이였다. 그녀들이 입은 서양식 면 옷은 싱가포르에서 샀다고 한다.

낮은 걸상에 앉은 그녀들은 미국제 담배를 게걸스레 피우면서 몇 달에 걸친 포격의 충격에서 점차 벗어나 안정돼 갔다.

1942년 이른 봄에 일본의 관헌들이 그녀들이 사는 평양의 마을에 왔다고 한다. 선전 포스터를 붙이거나 강연을 열어, 일본인들은 WAC(미 육군 부인부대)와 같은 조직을 통한 모집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것은 싱가포르에 가서 후방에 있는 비전투지역 기지에서 일본군 병사를 돌보거나 병원에서 오락 등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4명 모두 돈이 어떻게든 필요했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은 농민인 아버지가 무릎을 다쳤기 때문에, 그녀가 모집에 응하는 대가로 1500엔(약 12달러)이 주어져 아버지의 치료비로 지불됐다. 18명으로 구성된 그녀들 일행은 1942년 6월 조선을 출항했다.

[중략] 일행이 살윈 전선의 숭산에 도착하자, 그녀들 4명은 같은 소탕 작전으로 포로가 된 35세의 일반적인 일본인 매춘부인 5번째 여성의 감독 아래로 들어갔다. 숭산에는 모두 24명이 있었다. 그녀들은 병사의 세탁, 요리, 살았던 참호의 청소도 했다. 보수, 고향에서 보내 온 편지는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군 상층부가 중시했던 구출 위안부들 조사

이 기사에는 그녀들이 구출된 직후의 내용이 씌어져 있지만, 인터뷰의 일자나 장소가 특정되어 있지 않다. 읽어 보면 만주를 탈출한 중국인 학생으로부터 들은 전문인 것 같기도 하다. 또 검열이 있었기 때문인지, 기사는 구출 3개월 후에 게재됐다.

랜들 기자에 대해서 조사해 보니, 같은 시기의 UP 중국 지국에 앨버트 레이븐홀트라는 다른 기자가 있었는데, 관련 서적(<바다를 서쪽으로 건너가 동양에>)의 기술을 통해 그도 라모 공방전을 취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븐홀트는 1945년 4월 랜들로부터 중국 지국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라모 수비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한 8월 20일의 대폭파 현장은 뉴스위크 특파원인 해럴드 이서크와 함께 취재했다. 라모 수비대가 전멸한 뒤 레이븐홀트 기자는 통역의 도움으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의 인터뷰에 성공했지만, 돈 장군의 강한 압력으로 기사로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돈 장군이 누구인지 조사를 해 보니, 미 육군 CBI(중국 버마 인도) 전역 사령관 조지프 스틸웰 장군의 최측근 프랭크 돈 준장이었다. 레도 공로의 구상자이기도 한 스틸웰 장군은 버마 탈환을 위해 인도로 불러들인 중국군 병사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해 미치나 공략에서 활약하는 'X군'을 창설한다. 동시에 윈난성에서도 'Y군'을 만들고 북버마에서 일본군을 사이에 끼워 넣어 협공했다. Y군은 중국군의 총공격이 시작될 무렵부터 '중국 원정군(CEF)'이라 불리며 숭산과 텅위에의 탈환에 성공한다. 중국 유학 경험이 있는 돈 준장은 쿤밍을 거점으로 한 Y군을 지휘한 인물이었다. 교착 상태의 라모 공방전에서 일본군을 몰아붙였고, 그 대폭파도 그의 지휘 아래 미군이 대량의 폭약을 운반해서 실시한 것이다.

아마도 돈 준장은, 사진 3에 찍힌 미군 병사(미군 연락팀의 아서 빅서 하사관)로부터 위안부의 심문 내용과 UP 기자의 취재 사실을 알고, 기사의 보도 금지를 요구했을 것이다. 바로 그 무렵, 인도의 레도에서는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의 심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선에서 잇따라 포로가 된 위안부들을 미군 상층부에서 중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심문 보고 49호'가 제출된 10월 이후에 엠바고(보도 유예)가 해제되자 랜들 지국장이 다시 작성해서 전달했던 것일까.

 

1944년 6월의 텅위에 전투에서 연합군의 피해를 시찰하는 미 육군 CBI 전역의 프랭크 돈 준장(돈 준장 평전에서)..

누장(살윈강)을 건너 라모로 진군하는 Y군(돈 준장 평전에서)

발목이 사슬로 연결된 채 전멸한 일본군 병사들

돈 준장의 평전 <비범한 병사>(미 육군 전투사 연구소 [CSI] 출판, 2019년)라는 책에 알려지지 않은 CBI 전역에서의 Y군의 형성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하지만, 돈 준장 자신이 관여한 숭산의 위안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기술이 하나 있었다. 라모에 이어 텅위에가 중국군에 점령된 9월 15일, 일본군의 대부분은 자결했거나 부상자도 그들의 전우 손에 살해당한 것으로 전한 뒤, 현장을 목격한 중국군 보병 리시후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컴포트 우먼[위안부](일본군이 이송한 매춘부)들이 있던 장소가 있었는데, 여성들은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 때때로 성내의 다른 장소에서 일본군 병사들이 아직 총격을 가해 오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압도적인 병력으로 즉시 그들을 포위해 죽였다. 적이 있던 장소를 점령해 보니 일본군 병사들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발목이 족쇄로 연결되어 한쪽 끝에 있는 큰 바위와 건물의 석재 기초에 고정되어 있었다. 병사들 근처에 소량의 캔과 식량이 있었고, 모든 병사들에겐 남아 있던 약간의 탄약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사슬로 연결된 군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놀라고 또 놀랐다! 전장에 사슬로 묶이다니! 도대체 어떤 적과 우리는 싸워 온 것인가?

텅위에 전투 때 숨진 위안부들, 학살일까 자결일까

라모와 텅위에의 위안부 실태는, 1990년대 후반 아사노 도요미 와세다대 교수의 조사로 처음으로 밝혀졌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이하 '아시아 여성기금') 자료위원회의 위원으로 정리한 '윈난·버마 최전선에서의 위안부들-죽은 자는 말한다‘(이 재단 홈페이지에서 공개)에는 아사노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한, 텅위에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복수의 위안부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텅위에의 성내와 성외의 2컷 있는데, (일본군) 전멸 다음날인 1944년 9월 15일에 ’사진 중대‘의 프랭크 맨워런(기능 5등병)이 찍었다. 그 중 성 밖의 사진(사진 6)에는 포격으로 불에 타 들판이 된 곳에 참호와 같은 구덩이가 있고, 몇 구의 시신이 방치돼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을 3명의 중국군 병사가 내려다보고 있는데, 시신의 부패가 진행돼 악취가 났던지 수건 같은 것으로 코를 싸맨 병사도 보인다. 사진설명에는 "미심쩍어 하며 주춤거리고 있는 중국 병사", "대부분의 여성은 일본군 기지에 있던 여성들"이라고 적혀 있다. 이 여성들이 자결한 위안부들이었을까.

 

사진 6

일본군의 텅위에 전멸 다음날인 1944년 9월 15일에 찍힌 여성들의 시신. 중앙 안쪽에 있는 사람이 중국군의 장자오카이 중대장으로 생각된다. 제164통신 사진중대 프랭크 맨워런 기능 5등병 촬영.

 

사진 7

같은 장면을 찍은 흑백 영상. 제164통신 사진중대 볼드윈 1등병 촬영(KBS 화면에서 캡처).

 

참고자료

【일본 자료】

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編 「政府調査「従軍慰安婦」関係資料集成①警察庁関係公表資料」、1997年

和田春樹 「政府発表文書にみる「慰安所」と「慰安婦」」『「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財団法人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1999年

浅野豊美 「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同

西野瑠美子 『戦場の「慰安婦」』明石書店、2003年

尹明淑 『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明石書店、2003年

遠藤美幸 「戦場の社会史:ビルマ戦線と拉孟守備隊1944年6月―9月」慶應義塾経済学会、2009年

永井和 「日本軍の慰安所政策について」、2012年

山本晴太 「日韓請求権協定解釈の変遷」、 2014年

永井和 「破綻した「日本軍無実論」」『世界』2015年9月号

 

【한국 자료】

정진성 <일본군 성노예제>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6년

안병직 번역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년

정진성 편저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 자료 ⅠⅡⅢ> 선인 2018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19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미래사 2020년

 

【미국 자료】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 United States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October 1, 1944

Interrogation Bulletin No2, South-East Asia Translation and Interrogation Center, November 30, 1944

CBI Roundup, November 30, 1944, cbi-theater.com

(https://www.cbi-theater.com/roundup/roundup113044.html)

Korean and Japanese Prisoners of War in Kunming,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China Theater, April 28, 1945

Research Report No.120, Allied Translation and Interpreter Section, November 15, 1945

Chan, Won-Loy, Burma, The Untold Story, Preside Press, 1986

Ravenholt, Betty, West Over the Seas to the Orient, 2009

Cornebise, Alfred Emile, Soldier Extraordinaire, 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19

(https://www.armyupress.army.mil/Portals/7/combat-studies-institute/csi-books/soldier-extraordinaire-the-life-and-career-of-brig-gen-frank-pinkie-dorn.pdf)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