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이 진정 국민의 힘이 되려면

뻔히 보이지만 거리 먼 정직, 성찰, 혁신

왜? 민초가 아닌 언론과 한통속이기 때문

그래도 가야 한다. 떼로 비상하는 매미처럼

2024-06-27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전 마을이장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2024년 6월 21일은 한국 정치사에서 기억될 만한 날이 될 것이다. 작년 7월에 사망한 채수근 상병 사망 관련 수사 외압에 관한 특검법을 위한 청문회가 열린 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입법 청문회 이상으로, 그간 (군)검찰이나 경찰이 밝히지 못한 사태의 진실을 드러내는 공개적 과정이란 점에서 특별했다. 동시에 그 청문회는 그간 대통령이나 여당인 ‘국민의힘’이 펴온 정치와 행정 방식에 대한 작은 심판의 의미까지 있었다.

국회가 제 일 시작하자 코미디 연출한 국힘당 의원들

나아가 6월 25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민주당 정청래 위원장이 ‘채 상병 특검법’과 ‘방송 4법’을 본회의로 넘기는 등 입법 강행군을 하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강력 반발하면서 코미디 같은 설전도 일었다. 민주당 정 위원장이 거듭 발목을 잡는 국힘당 유상범 의원에게 “국회법 공부 좀 하고 오라”고 쏘아붙이자 유 의원이 “공부는 내가 좀 더 잘했지 않겠어요?”라 맞섰다! 점수와 등수만 강조하는 한국 교육의 치부가 국회에서 폭로된 꼴이다! 그러나 국민(시민, 민초)들은 이런 태도를 그냥 넘기지 않는다.

일례로, 청문회 전후의 여론 변화(‘여론조사꽃’ 참조)가 이를 입증한다. 우선,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25.2%임에 비해 부정적 평가는 73.2%로 나왔다. 2017년 3월, 박근혜 탄핵 직전의 여론조사에서 탄핵 찬성이 77%, 반대가 18%였던 것에 비견할 만한 수준이다. 이 정도면 ‘국민의힘’이라는 거대 정당을 배경으로 탄생한 윤석열 정권이 거의 ‘바닥을 치는’ 상태다.

같은 조사에서 나온 정당들에 대한 지지도 역시 이를 재확인한다. 전화면접 조사에서 민주당 지지가 38.9%이고 조국혁신당이 12.4%를 얻은 반면, 여당인 국민의힘은 28.5%에 그쳤다. 이른바 ‘콘크리트층’을 제외하면 지지자들이 거의 없다는 얘기! ARS(자동응답) 조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당 40.7%, 조국혁신당 14.5%에 비해 국민의힘은 32.2%의 지지율을 나타냈기 때문!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12일(현지시간) 암스테르담 동물보호재단의 반려견 거주공간에서 임신 중 감염된 어미견에게서 태어난 강아지들을 쓰다듬고 있다. 2023.12.14 [공동취재] 연합뉴스

국민 다수가 공감하는 “언론은 검찰 애완견”

그 며칠 전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한국의 대다수 언론이 ‘검찰의 애완견’ 역할을 하고 있다며 맹렬한 비판을 한 바 있다. 이에 찬반이 엇갈렸다. ‘여론조사꽃’의 결과에선, 이재명 대표의 비판에 동의하는 입장이 58.1%,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 38.5%로, 공감자가 훨씬 더 많았다. 1970~80년대 군사독재 정권 아래 상당수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검찰/경찰은 권력의 시녀”라 비판했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 민주당 권력 시기엔 대체로 예외였다. 따라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검찰/경찰은 비(非)민주 권력의 시녀”란 별칭이 옳겠다.

그런데, 이제는 검찰/경찰을 넘어 언론 역시 “비(非)민주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한다. 크게 보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갈수록 더 그렇다. 그것은 유시민 작가의 말대로, 오늘날 대다수 언론은 ‘아예 처음부터’ 자본과 권력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운영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진실 추구 언론’이 거의 없다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여하간 이런 언론 현실의 배경 아래 나온, 이재명 대표의 “검찰의 애완견” 발언이 60% 가까운 국민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대놓고 자본과 권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 아래서도 진실 추구와 사회 정의에 관심이 있는 기자들이 있을 수 있다. 반대로, 민주와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며 만들어진 언론 안에도 돈과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 나약한 기자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전반적 분위기 차원에서 보면, 현재의 대다수 주류 언론이 ‘검찰의 애완견’ 또는 ‘비민주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경향성을 부정하긴 어렵다. 이것이 국민의 시선이다.

‘국민의힘’이 국민에게 힘이 되기 위한 세 차원의 조건

바로 이 부분에서 나는 ‘국민의힘’이란 정당 명칭이 과연 정당한지 의심한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서 나의 의심은 법적 타당성이나 제도적 정합성을 묻는 게 아니다. 그저 평범한 국민의 일인으로서 나는, 과연 ‘국민의힘’이란 정당이 과연 국민에게 힘이 되는지, 또는 국민의 힘에 근거해 움직이는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즉, 나의 의심은 사회적 정당성을 향한다!

만일 ‘국민의힘’이 진실로 국민들의 힘에 근거해서 탄생했고 국민들에게 힘이 되는 존재로 유지되고자 한다면 다음 세 차원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정직과 신뢰

첫째, 정직과 신뢰다.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 및 수사 외압 사건을 예로 들자면, 한마디로, 최고 책임자들이 솔직하게 책임을 통감하고 사퇴 또는 처벌을 감수했다면 사태가 이렇게나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거짓은 거짓을 낳는다. 그 거짓을 은폐하고 조작하려는 몸짓은 금세 들통 난다. 스마트폰이 일상화한 시대에 ‘절대 비밀’이란 것은 없다. 오히려, “절대 비밀로 하자”는 말조차 녹음되고 녹취되며 공유된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위를 ‘국민의힘’과 대통령, 사령관과 사단장, 그 주변 참모들이 애써 하려 하니, 화가 치밀다가도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앞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이나 ‘국민의힘’에 대한 불신이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높아지는 까닭이다. 따라서 현재로선 “특검과 탄핵이 답”이란 말이 가장 설득력이 높다.

비판과 성찰

둘째, 비판과 성찰이다. ‘국민의힘’(정당)과 그 대통령은 오로지 선거에서 이기기 내지 민주당 발목잡기에 올인하는 인상을 준다. 대통령은 ‘본부장’ 문제로 입장이 난처해지자 이명박 꼴이 될까 ‘뒷일’이 무서워 나중에 죽지 않을 길만 모색하는 경향성도 있다. ‘국민의힘’이라는 정당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국힘당은 특히, 경제성장이 정체하고 사회경제 불평등이나 기후위기 등이 가속화하는 복합위기 상황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없다. 경제성장만 하면 불평등이 완화되거나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론적 근거도, 실제 사례도 없는데 성장 중독에 빠져 있다. 그저 과거의 호시절만 회상하면서 그런 황금기가 다시 올 것처럼 착각하거나 허위의식을 언론에 유포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예전에 옳다고 믿었던 이론과 입장을 철저히 비판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 같지만, 마치 노예제나 봉건제가 사라진 것처럼 자본주의도 종말이 온다. 왜 그런지 성찰하고 파국과 재앙이 닥치기 전에 현명한 대비를 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국민을 위하는 길이고 국민에게 힘을 주는 자세다.

변화와 혁신

셋째, 변화와 혁신이다. 정당의 존재 이유가 있다면 연약한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다. ‘국민의힘’이란 이름을 단 정당이라면 대다수 국민들의 소망을 앞장서서 구현하려 노력해야 마땅하다. 물론 이 정당의 근본 정체성이 권력과 돈임은 삼척동자도 잘 안다. 이런 면에서 더 솔직한 이름은 ‘자본의힘’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 정당이 자본이나 권력을 위해서 꾸준한 지지를 얻으려면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변화와 혁신을 지속해야 한다. 나의 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국민의힘’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당이 그런 일을 더 열심히 하려 한다. 일례로, 오늘날 ‘돈 놓고 돈 먹는’ 경제가 (혈액 순환이 잘 되지 않는 동맥경화처럼) ‘돈맥경화’에 걸려 상품과 화폐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재명의 민주당이 국민 1인당 25만 원씩 지원금을 지급하려 한 구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게 국민에게 힘을 주는 ‘자본의힘’(실은 ‘국민의힘’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발목만 잡다가 허송세월한다. 하지만 여야 정당을 떠나, 내가 보기에 진정 국민(시민, 민중, 민초)에게 필요한 변화와 혁신은, 돈이 많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라도 꾸준한 공부와 연구, 토론과 대화가 필요하다. <녹색평론> 186호(2024년 여름)에 김정현 발행인이 쓴 머릿말 ‘가장 진보적인 운동’은 그런 토론에 도움이 된다.

‘국민의힘’이 국민의 힘이 되지 못하는 건 언론과 공범이기 때문

요컨대, ‘국민의힘’ 정당이 사회적 정당성을 회복하려면 정직과 신뢰, 비판과 성찰, 변화와 혁신을 온몸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다른 말로, 지금과 같은 꼼수와 거짓, 은폐와 조작, 무지와 무능의 모습을 철저히 극복해야 국민의 힘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국민에게 힘이 되는 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다. 물론, 나는 이것이 현재의 국힘당에게 쉬이 가능하다고 믿진 않는다. 다만, 기본 입장이나 시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같은 잣대는 민주당이나 조국당에도 적용될 수 있다. 즉, 민주당이나 조국당 역시 정직과 신뢰, 비판과 성찰, 변화와 혁신을 온몸으로 이뤄낼 뿐 아니라 국민, 시민, 민중, 민초의 열망에 부응한 일들을 해낼 때 비로소 더 전폭적 지지를 받을 것이다. 4‧10 총선 직전에 있었던 민주당 내 ‘수박 제거’ 운동이나 총선 이후 새 국회의장 선출 과정에서의 다수 ‘당원 실망’ 사태 등이 그 좋은 예다. 운동이나 조직이 그 기층(국민, 시민, 민중, 민초)과 유리되지 않아야 거듭된 실수, 실망, 실패를 예방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엇이 진정한 국민, 시민, 민중, 민초의 열망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진실하고 균형 잡힌 언론(유튜브 포함)의 역할이 필수라는 것이다. ‘국민의힘’ 정당이 진정 국민의 힘에 기초한 활동을 하지 못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힘을 주고 있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애완견 내지 시녀가 되어버린) 언론과 함께 공범이 되어 진정한 국민, 시민, 민중, 민초의 열망을 간과, 무시, 부정, 왜곡, 호도해 왔기 때문이다.

국민의 힘을 깨우친 캐나다 선주민 학살 사례

그러면 여기서 진정으로 국민(시민, 민중, 민초)의 힘을 존중한 외국의 한 사례를 들어보자. 2021년 5월경 온 캐나다 사회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의 캠룹스(Camloops)라는, 인구 10만 명 규모의 소도시에서의 일 때문이다. 캠룹스의 인디언 기숙학교 부지에서 215명에 해당하는 유골(신체적, 성적, 언어적, 문화적 학대의 결과)이 발견됐다. 인디언 기숙학교란 1867년 캐나다 건국 이후 1996년까지 130년 동안 모두 약 15만 명의 인디언 선주민(First Nations, Inuit, Métis)의 아이들을 서양식으로 ‘개화’하기 위해 가톨릭교회가 정부 지원 아래 강제 운영한 교육 제도다.

현존하는 한 퍼스트 네이션의 추장 로잔느 카시미르는 “우리가 아는 한, 이들 215명은 정식 기록되지 않은 사망자들로, 그 중엔 세 살짜리 아이도 있었다”며 개탄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로마의 프란치스코 교황도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며 즉각 입장문을 냈고, 1년여 뒤(2022년 7월)엔 직접 캐나다 현장(앨버타 주의 선주민 거주지인 마스콰시)도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교회가 운영한 학교에서 그런 비극이 일어났음을 인정은 했지만, 인디언 선주민 공동체 앞에 깊고 진지한 사과는 하지 않아 비판과 냉소를 사기도 했다. 온타리오 주의 보수 정당인 신민주당 의원이자 선주민 후손인 쏠 마마크와도 “진중한 사과가 빠진 교황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15명의 선주민 유골이 발견된 직후인 2021년 6월 초, 온타리오 주 토론토 시내의 라이어슨 대학교(1948년, 라이어슨 공대 RIT로 출발)에서 학생 시위대가 일어났다. 이들은 이 대학의 정신적 지주인 이거튼 라이어슨(Egerton Ryerson) 동상을 교정에서 끌어내려 내동댕이쳤다. 많은 교수들도 입장을 같이했다. 그것은 이거튼 라이어슨(1803~1882)이 19세기 감리교 목사이자 교육자로서 일찍이 캐나다 공립학교 시스템, 특히 인디언 기숙학교를 설계한 자였기 때문!

언론의 힘과 만난 국민의 힘이 이룬 ‘새로운 시민권 선서’

그래서 캠룹스 215명 유골 발견 직후부터 라이어슨 대학생들과 인디언 학교 생존자들, 그리고 상당수 교수들이 연대 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라이어슨 동상을 해체했을 뿐 아니라 동상의 머리를 인디언 희생자들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온타리오 호수에 담궈 씻은 다음 다시 꺼내 랜드백(Land Back) 운동-2010년경 아메리카와 호주 등지에서 시작된 선주민 주도의 탈식민화 운동- 측에 넘겼다. 이들은 이런 행위가 단순히 시위대의 ‘분노나 공격성’의 표현이 아니라 수많은 희생자들을 “진정으로 애도하고 추모하는 진지한 의례”라 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더 이상 ‘라이어슨’이 들어간 대학 명칭이나 이메일을 쓰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캐나다 연방 정부(수상 트뤼도)와 라이어슨 대학 당국의 태도다. 이들은 캠룹스 인디언 기숙학교에서의 비극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하며, 로마 교황청 역시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대학 당국(총장 모하멧 라체미)도 설립자의 동상을 끌어내려 ‘부관참시’한 학생들을 처벌하거나 격노하기는커녕 “대규모 시위와 동상 해체 과정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우리는 그 동상을 복구하거나 대체하지 않을 것이며, 특별위원회에서 대화와 토론, 의견 교환을 통해 (215명 선주민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 애도를 넘어) 미래지향적인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 했다. 그리고 약 1년 간 토론과 자문을 거쳐 2022년 4월 말부터 더 이상 설립자 이름을 공식적으로 쓰지 않기로 하고, 기존 라이어슨 대학교를 ‘토론토 메트로폴리탄 대학교(TMU)’라 개명했다. 그리고 대다수 캐나다 언론들은 보수-진보, 여-야, 좌-우를 막론, 이 모든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 참된 국민의 힘은 참된 언론의 힘과 서로 맞물리는 법!

그 이후 캐나다 연방은 물론 각 주에서는 ‘새로운 시민권 선서’를 채택하고, 기존의 조약과 합의를 넘어 선주민들에 대한 진심어린 인정과 존중의 태도를 강화한다. 일례로, 토론토 시는 (한국의 ‘국기에 대한 맹세’ 대신에)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영토 인정 선서’를 한다. “토론토 시는 우리가 OO, OO, OO족과 같은 수많은 선주민들이 살아온 전통적인 영토 위에 존재함을 엄숙히 인정합니다.” 선주민을 포함, 캐나다 영토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큰 공동체의 일원으로 평등하게 공존함을 선언하는 셈이다.

일제히 함께 날아오르자! 쏘지도 물지도 못 하는 매미처럼

바로 이런 모습들이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국민, 시민, 민중, 민초의 힘을 제대로 존중하는 모습이다. 이런 사례를 보더라도, 국민의 힘을 믿지 않고 오히려 국민의 힘을 자기들만의 권력과 돈놀이에 오‧남용하는 이들은 더 이상 ‘국민의힘’이란 정당 명칭을 써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한 사람의 격노 때문에” 그리고 그로 인한 ‘외압’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채수근 상병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할 뿐 아니라 스스로 공범 내지 죄인이 되는 비극을 반복해선 안 된다. 캐나다 선주민 후손 쏠 마마크와 의원의 말대로, “진지한 사죄가 있어야 진실과 화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 일이 아무리 복잡하고 골치 아파도, ‘정직이 최선의 방책’임을 기억할 일이다. 특검과 탄핵을 거쳐야 비로소 사회적 진실이 드러난다면, 그런 사회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야 한다. 승리가 보장되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미국 극작가 이브 엔슬러의 ‘매미’라는 시에서 “쏘지도 물지도 못하는 매미들에게 유일한 방어책은 수백만 마리가 일제히 함께 날아오르는 것”이라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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