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 밸류업? "당국의 재벌 눈치보기가 걸림돌”
영국계 헤지펀드가 본 저평가 원인과 대책
"총수일가 경영 좌지우지…소액주주 소외 탓"
당국도 뻔히 알면서 지배주주 심기 살피기만
재벌규제, 국가보안법 적용하듯이 해보라지
정부가 오는 26일 세부 정책을 공개할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여러 제안들이 나오고 있다. 저평가 종목 지정에 그치지 말고 주주환원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느니 다양한 투자지표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느니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 주식시장에서는 ‘저평가 주’ 테마가 형성되며 오랜 기간 오르지 않았던 종목들이 갑자기 급등하는 등 이상 기류도 탐지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논의가 핵심에서 벗어나 있어 문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의 근본 원인은 한국 재벌기업의 시대착오적 지배구조와 의사결정 방식에 있다. 그런데 금융당국을 비롯해 대다수 논의는 이 문제를 간과하고 겉핥기식 해법만 거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헤지펀드의 한 매니저가 최근 자사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 눈길을 끈다. 한국증시의 저평가 원인을 정확하게 짚고 그 해법까지 제시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의 조너선 파인즈 일본 외 아시아 수석 포트폴리오 매니저다. 글의 제목은 ‘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원인과 해법이 뻔한 데도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잘 설득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단 제목이다.
그는 한국 재벌기업의 지배주주인 총수 일가가 기업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구조를 개혁하지 않으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주가를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특정 집단이 없다”며 “일본 주가가 낮았던 이유는 주로 기업지배구조 문제가 아니라 재무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나치게 보수적인 경영 또는 관심 부족으로 자본구조가 최적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 증시의 저평가는 (한국처럼) 지배주주가 과도한 이익을 독점하거나 주가를 낮게 유지하려는 잘못된 의도로 인한 시장 우려 때문이 아니었다”며 “한국에서는 가족이 지배하는 상장기업이 훨씬 더 많고 지배권을 가진 이들은 현재의 규제 환경에서 대단히 많은 경제적 이익을 향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한국 재벌기업의 지배주주인 총수 일가에 소액주주를 선의로 대하라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고 강조했다.
조너선 파인즈는 규제 당국의 직무유기도 한국증시 저평가의 원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정책 대응은 실망스러웠다”며 “최근 몇 년 동안 시행된 규제는 마치 지배주주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그는 “아직도 한국 정부는 지배주주가 소액주주를 무시하는 나쁜 관행을 규제하지 않고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재벌기업 총수 일가를 감시할 엄격한 규제 도입만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지난해 11월 미국의 경제전문 방송 CNBC 보도와 일맥상통한다. CNBC는 한국증시를 만성적인 저평가에 빠뜨린 원인으로 재벌기업의 지배구조를 지목했다. 방송에 나온 퍼스트 플러스 자산운용의 주식 투자 부문 책임자인 지앙 장은 “재벌기업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 핵심 사업과 관련이 없거나 손실을 초래하는 사업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소액 주주들이 피해를 본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조너선 파인즈의 글 '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의 요약본이다.
야마지 히로미 회장이 주도했던 도쿄증권거래소의 주주 수익률 증대 전략은 기업들이 올바른 일을 하도록 설득했다. 이 전략은 주주 참여와 경영 보고를 더 독려하고 기업 문화를 바꾸는 것을 지원하는 동시에 참여 기업들을 널리 알리고 불참 기업을 창피하게 하는 방식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이 접근 방식은 많은 기업이 지배구조와 관련한 자본 구조와 경영을 개선하고 주가를 부양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게 입증됐다.
이런 ‘부드러운(연성)’ 접근이 일본에서 성공한 요인은 가족이 지배하는 일본 회사가 거의 없고, 더 관련성이 더 높은 건 현재 작동하는 규제가 이미 소액주주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현행 규제 틀에서는 지배주주의 부적절한 재정적 이익을 취하려는 집단은 없다.
(일본에서는) 기업을 통제하는 지배주주가 주가를 낮게 유지할 동기가 없다. 일본 상장사의 저평가는 주로 보수적 경영관이나 관심 부족 탓에 자본구조가 최적화되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다. (한국처럼) 지배주주가 과도한 이익을 독점하거나 지배주주가 의도적으로 주가를 낮게 유지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주가가 낮아진 게 아니다.
한국의 현행 규제에서는 많은 재정적 이익을 얻고 있는 가족이 지배하는 재벌기업이 훨씬 많다. 이들 재벌기업 대주주는 주가를 낮게 유지할 동기가 충분하다. 그렇기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처럼) 소액주주들을 위해 친절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시도가 성공할 확률은 높지 않다. 한국의 지배주주는 소액주주를 희생해 이익을 추구한 전력이 있다. (그렇게 하며 상당한 금전적 이익을 얻었다.) 과거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그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배주주가 소액주주를 희생해 이익을 얻지 않도록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지금까지 한국 규제 당국의 대응은 실망스러웠다. 나는 한국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벌기업의 총수 일가인 지배주주는 일반 주주에 대한 이사진의 의무를 수용하는 개혁안을 포함해 실질적 변화에 저항해왔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정부의 규제안은 재벌기업 지배주주를 화나지 않게 하는 게 핵심 목표인 것처럼 제정됐다. 물론 한국의 규제 당국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외국인 투자자 등록요건 완화와 공매도 제한, 거래시간 연장, 연례 온라인 주주총회 도입, 배당기준일 변경, 기업공개(IPO) 후 의무 예수 기간 강화 등이 그것이다. 또 기업 구조조정에 불만인 소액주주에게 주식을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하락한 시장 가격으로) 다시 매각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 중 어느 것도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고 애초부터 효과가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한국 정부는 소액주주를 착취하는 지배주주의 권력을 축소하지 않는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는 듯하다. 지배주주 권한을 축소하려는 규제 개혁의 시도는 처음 제안했을 때보다 규제 강도가 약해졌을 때조차 실패하거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한국의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해) 진정으로 효과적인 규제를 하는 것은 간단하다. 한국의 (엄격한) 국가보안법만큼 시장에 적합한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다. 희석 효과가 있는 주식발행과 교환 때 별도의 소액주주 승인 의무화와 기업 인수 때 의무 공개 매수 제도 도입, 특수관계자 거래 때 소액주주 별도 승인 요구 등 지배주주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다각적인 조치를 도입한다면 한국의 (높은) 상속세율이 그대로 유지되더라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