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한동훈 충돌, 본질은 '당무 개입'…고발 추진한다
암투 배경 시나리오 난무…사태 본질 희석 안 돼
윤석열 당무 개입과 국힘의 만성적 사당화가 초점
'윤핵관' 이철규 "소통 과정에 오해" 어설픈 궤변
법원 "대통령은 정당 민주주의 보장할 책무 지녀"
헌법과 정당법‧공직선거법‧국가공무원법 등 근거
촛불행동, 고발인 모집…민주당도 법률 검토 마쳐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최근 암투를 둘러싸고 전후 내막을 추정하는 온갖 시나리오가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양측간 권력 투쟁의 배경과 유불리를 어떻게 따지든 간에 이번 사태의 본질이 희석돼선 안 된다. 검찰독재정권 내부에서 벌어진 이전투구가 아니라, 윤 대통령의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당무 개입과 이를 무기력하게 수용해 온 여당의 만성적 사당화(私黨化)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 민주화에 정면으로 반하는 윤 대통령 및 대통령실의 상습적 당무 개입은 지난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전후해 '이준석⇒유승민⇒나경원⇒안철수⇒김기현'을 차례로 축출하거나 무력화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지난해 5월에는 당시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과 국민의힘 태영호 최고위원 간 대화 녹취록이 공개되며 '공천 거래' 의혹이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금까지 대통령실은 이런저런 임기응변과 궤변으로 당무 개입을 철저히 부인하며 책임을 모면해왔다. 대다수 언론이 이를 그대로 받아쓰거나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엔 이관섭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여당 대표격인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사퇴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도 아닌 한 위원장 본인의 폭로성 시인으로 확인되고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가 불가능해진 상태다.
한 위원장은 2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 회의 참석 전 기자들이 대통령실의 사퇴 요구와 당무 개입에 대한 입장을 묻자 "제가 사퇴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답했다. 대통령실의 사퇴 요구가 있었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당정 관계의 신뢰가 깨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는 질문에는 "당은 당의 일을 하는 것이고, 정(정부)은 정의 일을 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길"이라고 말해 대통령실의 당무 개입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처럼 사퇴 요구와 당무 개입이 한 위원장의 입으로 분명해졌지만 대통령실이나 '윤핵관'들은 일단 잡아떼기로 대응하고 있다. 국민의힘 인재영입위원장을 맡고 있는 '찐윤' 이철규 의원은 23일 KBS 라디오 '전종철의 전격시사'에서 "소통하는 과정에 조금씩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며 "아마 세 분(이관섭 실장, 한동훈 위원장, 윤재옥 원내대표)이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우려를 전달하고 우려를 전달받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고 주장했다. 또 "제가 아는 한 대통령이 직접 당무 개입한 것 없고, 우려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아마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거듭 '소통' 문제로 치부했다.
그러나 집권당 대표직 사퇴 요구를 한 위원장의 '오해' 탓으로 돌리는 건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억지에 불과하다. 한 위원장이 그 정도로 귀가 어둡거나 모자란 인물이라서 만천하에 "제가 사퇴 요구를 거절했다"고 확언했다면 정당사에 길이 남을 코미디가 될 것이다. 이철규 의원은 그런 황당한 평지풍파를 일으킨 한 위원장을 더더욱 사퇴시켜야 한다고 하는 대신 "아주 긍정적으로 잘 수습이 되고 봉합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둘러댔다.
이처럼 허무맹랑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말장난으로 당무 개입 사실을 극구 부정하려는 건 그만큼 이번 상황이 '빼박'이라는 점을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시민사회진영에서 윤 대통령을 정당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고발하려는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4·13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의 '친박' 의원들이 공천을 받도록 현기환 정무수석에게 지시하는 등 공천 과정에 불법 개입한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을 기소한 주역이 서울중앙지검장이던 윤 대통령,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던 한 위원장이었으니 당무 개입이 얼마나 위중한 범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다. 2018년 11월 21일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김인겸 부장판사)는 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를 방기하고 대의제·정당제 민주주의 실현에 중요한 '정당의 자유·자율'을 무너뜨렸다며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헌법이 국민주권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공무원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한 점을 들어 "대통령에게는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특정 정당, 자신이 속한 계급 종교 지역 사회단체, 자신을 지지하는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 등으로부터 독립하여 국민 전체를 위하여 공정하고 균형 있게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사회공동체를 통합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또 "우리의 헌법과 법률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정당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당에 대한 국가의 보호를 규정하고 있으므로 대통령은 정당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보장할 책무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당무 개입, 선거 개입이 헌법과 법률을 위배한다는 근거는 다음과 같은 조항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7조 ①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제8조 ②정당은 그 목적·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하며,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조직을 가져야 한다.
정당법
제49조(당대표 경선 등의 자유방해죄) ①정당의 대표자·투표로 선출하는 당직자와 관련하여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후보자·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 또는 당선인을 폭행·협박 또는 유인하거나 체포·감금한 자
2. 선거운동 또는 교통을 방해하거나 위계·사술 그 밖에 부정한 방법으로 당대표 경선 등의 자유를 방해한 자
3. 업무·고용 그 밖에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지휘·감독을 받는 자에게 특정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도록 강요한 자
공직선거법
제9조(공무원의 중립의무 등) ①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85조(공무원 등의 선거 관여 등 금지) ①공무원 등 법령에 따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직무와 관련하여 또는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국가공무원법
제65조(정치 운동의 금지) ②공무원은 선거에서 특정 정당 또는 특정인을 지지 또는 반대하기 위한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대통령도 선거에서 중립의무를 지켜야 하는 공무원에 해당하느냐'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판단한 바 있다.
"선거에 있어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행정부와 사법부의 모든 공직자에게 해당하는 공무원의 기본적 의무이다. 더욱이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공정한 선거가 실시될 수 있도록 총괄·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당연히 선거에서의 중립의무를 지는 공직자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로써 공직선거법 제9조의 '공무원'에 포함된다"(2004. 5. 14. 헌재결정 2004헌나1)
이 같은 법적 근거에 따라 촛불행동(상임대표 김민웅)은 22일부터 윤석열 대통령의 국민의힘 당무 개입에 대한 고발인 모집에 돌입했다. 촛불행동은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에 의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여당인 국민의힘의 당대표 선거 내지 국회의원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만일 대통령이 이를 위반할 경우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으로 탄핵 사유가 되고 임기 후 형사처벌도 가능하다"며 "검찰독재도 모자라 대통령이 정당을 사유화하면 헌법의 근본 가치인 대의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정당의 자율성이 무력화되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 당대표였던 이준석을 축출한 후 친윤계 김기현이 새로운 대표가 되도록 당대표 경선 등의 자유를 방해한 점 ▲202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힘 내에서 새로운 친윤계 인물이나 검찰 출신이 공천을 받도록 당무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이 공공연하다는 점을 들어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 관계자 등을 형법 제123조에 의한 직권남용죄, 정당법 제49조에 의한 당대표 경선 등 자유방해죄, 공직선거법 제255조와 제85조 제1항에 의한 부정선거운동죄로 고발해 수사를 촉구하겠다고 설명했다. 촛불행동은 오는 31일까지 고발인 모집을 진행한 뒤 실제 고발장 접수 등에 나설 계획이다.
민주당도 법적 조치 방침을 거듭 천명했다. 강선우 대변인은 23일 서면 브리핑에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후배라던 한동훈 비대위원장마저 찍어내려 한 윤석열 대통령의 노골적인 당무 개입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며 "누구보다 사당화에 앞장서 흑역사를 써 온 장본인이 바로 윤석열 대통령이다. 오죽하면 '찍히면 죽는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라고 전했다.
이어 "안철수 의원, 나경원 전 의원, 김기현 전 대표, 이준석 전 대표까지 모두 윤심에 의해 축출되어 토사구팽이 된 인사들"이라며 "지금도 용핵관, 검핵관을 내려꽂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떡 주무르듯 공천을 장악하려는 당사자 역시 윤석열 대통령 아닌가? 더불어민주당은 정치 중립을 위반하고 정당민주주의를 무참히 훼손한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을 강력히 물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김성주 정책위 수석부의장도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사건을 둘러싸고 불거진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갈등은 이제 대통령의 노골적인 선거 개입, 공천 개입으로 번지고 있다"며 "한동훈 위원장에게 '사천하지 말고 시스템 공천하라'고 요구했다는데 대통령이 사천이든, 시스템 공천이든, 정당의 공천에 개입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윤 대통령은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내세워서 살짝 뒤로 숨는 듯하다가 더 노골적인 선거 개입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미 법률 검토를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권칠승 수석대변인은 전날 서면 브리핑에서 "대통령의 당무 개입은 정치 중립 위반은 물론 형사처벌도 될 수 있는 중대한 불법행위"라며 "더욱이 당무 개입의 이유가 국민적 의혹의 중심에 선 김건희 여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명백한 이해충돌"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배우자의 불법행위를 무마하기 위해 특검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도 부족해 여당의 당무에 개입한 것은 어떤 말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9월 2일 출근길 문답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당은 정당 내부도 민주적 원리에 따라서 가동이 돼야 한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대통령으로서 무슨 당무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저는 보고 있다"고 큰소리쳤다. 윤 대통령이 결정적 식언(食言)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