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쓰러진 택배 노동자…쿠팡은 과로사 아니라지만
배송 수행률 맞추지 못하면 일감 회수
야간·주말·휴일에 일해야 버틸 수 있어
무늬만 사업자인 특수고용직 택배 기사
과로 내몰려도 근로자 인정 안돼 방치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 문제가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 하청기업 소속 60대 택배 노동자 A씨가 지난 13일 오전 4시 40분쯤 경기 군포시 산본동 한 빌라 4층 복도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이를 두고 노동계와 쿠팡이 상반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민주노총 산하 택배노조는 쿠팡의 비인간적인 배송 시스템 탓에 A씨가 과로로 쓰러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쿠팡은 A씨의 배송 물량이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는데도 노조가 허위 주장을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쿠팡은 또 “숨진 노동자가 쿠팡 직원이 아니라 자회사인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와 배송 업무 위탁 계약을 맺은 하청기업 소속이라 직접적인 책임도 없다”고 발뺌하고 있다.
이 사건은 택배 노동자를 포함한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이 처한 상황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쿠팡의 여러 배송 방식 중 하나인 퀵플렉스는 A씨처럼 개인사업자로 분류된 특수고용직 종사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다. 쿠팡은 퀵플렉스 기사가 회사에 속한 기사에 비해 유리한 점을 강조한다. 같은 물량을 배송해도 수입이 많고 노동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타율적으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개인사업자인 만큼 배송 물량을 마음대로 정해 일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쿠팡CLS가 도입한 클렌징 제도 때문이다. 쿠팡은 택배 노동자에게 ‘라우터’라는 배송 구역을 정해준다. 배송 완료 실적과 근무일 수 등을 토대로 수행률을 평가한다. 이를 ‘라우터 수행률’이라고 하는데 일정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라우터를 회수한다. 이를 클렌징이라고 한다. 퀵플렉스 기사는 개인사업자라 라우터를 회수당해도 어쩔 수 없다. 쿠팡CLS와 체결한 사적 계약이 끝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클렌징 제도는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이 노동자처럼 원청기업의 지시와 감독을 받으면서도 근로기준법 등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라우터를 회수하는 조치는 퀵플렉스 기사를 해고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퀵플렉스 기사는 원청기업인 쿠팡CLS가 요구하는 수행률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평일 초과 근무는 물론이고 주말과 휴일에도 배송해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 무늬만 개인사업자일 뿐 실제로는 과로에 내몰리는 노동자에 가깝다.
택배노조는 클렌징 제도가 불공정거래에 해당한다며 쿠팡CLS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노조는 쿠팡CLS가 설정한 서비스 수준을 택배 노동자가 충족시키지 못하면 계약을 즉시 해지하거나 물량을 축소하도록 한 부속합의서 조항과 사고가 발생하면 영업점을 손해배상 주체로 명시한 조항 등을 불공정거래의 증거로 제시했다. 노조는 “노동자의 근무일 수, 명절 근무율, 프레시백 회수율에 따라 쿠팡CLS가 택배 배송지역을 회수한다”며 “쿠팡CLS는 거래상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영업점에 불리한 조건의 계약을 맺는 형태의 불공정거래 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특수고용직에 속한 택배 노동자 문제는 공정위 차원의 제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특수고용직 종사자도 ‘근로자’라는 사실을 법률로 인정하는 것이 근본 해법이다. 현행법에서 특수고용직 종사자는 근로 계약이 아니라 위임 또는 도급 계약을 맺고 실적에 따라 수수료 등을 받는 사람으로 규정돼 있다. 기업의 지휘와 감독, 요구로 노동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일하는 주체로 가정하고 있다. 일반 근로자처럼 고정 근무 시간과 월급이 없고 본인이 일한 만큼 수익을 내는 사업자라는 뜻이다. 클렌징 제도는 이런 현행법이 현실과 얼마나 괴리돼 있는지 보여준다.
지난 2020년 택배 기사의 과로사가 사회 문제로 대두했을 때 정부와 택배회사, 노조는 해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오랜 논의 끝에 택배 노동자의 업무 범위에서 분류 작업을 제외하는 등의 합의점을 찾았다. 그러나 특수고용직 택배 노동자가 처한 애로점은 심도 있게 논의되지 않았다. 그 결과 원청기업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택배 노동자를 과로로 내모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근로기준법의 근로자 개념을 특수고용직으로 확대하고 노조법 2조에서 규정한 ‘사용자’ 범위도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법 2조 개정안은 원청기업의 관리와 감독을 받는 하청기업 근로자의 교섭권을 보장하고 기업의 과도한 손배소를 막는 취지의 ‘노란봉투법’에도 명시돼 있다.
쿠팡을 비롯한 거대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특수고용직도 증가하는 추세다. 국세청 자료를 보면 2020년 기준으로 세법상 사업자로 분류된 비임금 노동자는 700만 명을 넘어섰다. 여기에는 택배 노동자같이 무늬만 사업자인 특수고용직 종사자도 포함된다. 앞으로도 특수고용직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해 과로로 쓰러지는 사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