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에 다시 '핑크 타이드', 동아시아 정치지형 변화 일으킬까
미국 턱밑 중남미에 좌파 물결
"룰라, 좌파 정부 균형자 될 것"
좌파정권들 사이 동류의식 강해져
브릭스, 미 패권주의에 거부 영향
국제질서 재편 가능성 한국도 촉각
10월 30일 브라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승리해 2003~2010년의 연임에 이어 재집권에 성공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77. 이하 룰라로 통칭) 정권의 등장으로 ‘미국의 뒷마당’이라는 중남미가 거의 완전히 ‘좌파’정권들로 뒤덮였다.
이른바 ‘핑크 타이드’(pink tide. 분홍빛 조류. 공산화=적화까지는 아닌 좌파 물결)다. 10여년 전의 1차에 이은 제2차 핑크 타이드다.
이제 남미 대륙은 총 10개국 중 에콰도르와 파라과이, 우루과이 정도만 빼고 온통 좌파세력이 집권하게 됐다.(수리남과 가이아나는 카리브해 국가로 분류) 그 위쪽으로도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대다수가 핑크색이다.
지난해 7월 페루에서 교원노조 리더였던 급진좌파 페드로 카스티요가 대통령에 취임했고, 올해 3월에는 칠레에서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의 가브리엘 보리치가 집권했으며, 8월에는 콜롬비아에서 게릴라 출신인 구스타보 페트로가 이 나라 최초의 좌파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앞서 2019년 12월에는 아르헨티나에서 중도좌파 페론주의자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그리고 2020년 11월에는 볼리비아에서 사회주의운동당의 루이스 아르세가 집권했다.
이들 남미 좌파 정권들은 대체로 포퓰리즘 색채가 강하고 시장경제도 수용하는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다(<지지통신> 11월 1일)는 관측들이 많다.
지난 5월 12일치 <이코노미스트> 기사(“A new group of left-wing presidents takes over in Latin America”)는, 쿠바와 니카라과, 베네수엘라를 좌파 독재국가로, 그리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선거를 통해 좌파들이 집권한 국가로 분류했다.(에콰도르, 우루과이, 파라과이는 비좌파)
<이코노미스트>는 중남미의 이들 좌파정권이 각기 다양한 개성이 있고 다른 점들이 있지만, 새로 등장한 좌파정권들 사이에는 동류의식도 상당하다는 전문가 얘기를 인용했다. 이들 정권 중에서 가장 주목받고 영향력도 큰 것이 바로 브라질의 룰라 정권이다. 1-2기 집권 때 브라질 역사상 최대의 호황기를 이끌었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 87%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룰라의 경험과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지닌 무게 때문이라고 이 잡지는 지적했다. 그리고 룰라가 이들 다양한 중남미 좌파 정부들간의 일종의 균형자(equilibrium)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룰라의 노동자당 재집권은 <이코노미스트> 지적처럼, 브라질이 남미 최대의 영토 및 인구대국에다 자원 풍부한 경제대국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은 중남미 지역의 국제정치·경제 리드국일 뿐만 아니라, 주요 신흥경제국들 연합인 브릭스(BRICs)의 멤버이기도 해, 중남미를 자국 뒤뜰로 여겨 온 미국에겐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파리 기후협정을 탈퇴하는 등 트럼프 정권 때의 미국과 유사한 파격적 행보로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린 친미적 극우 정치인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퇴진과 맞물린 것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룰라의 1기 집권과 겹치는 시기인 2000년대 초반부터 중남미에서 미국의 존재감은 약화돼 온 반면 급속히 그 영향력을 키워 온 것이 중국이다. 브라질, 칠레, 페루 등 남미 주요국들의 최대 교역(무역) 상대국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중국은 최근 브라질에 대한 투자도 급속히 늘리면서 그 영향력을 배가하고 있다. 2021년 브라질에 대한 중국의 투자액은 전년 대비 2.1배인 59억달러였고, 프로젝트 건수는 2.5배인 28건으로, 가장 많았던 2017년 이후 최대규모였다.(브라질·중국 비즈니스위원회[CEBC] 보고서 ‘중국의 브라질 투자 2021년’)
브라질과 멕시코, 아르헨티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뒤 미국이 주도한 러시아 경제제재에도 동참하지 않고 있다.
장기전에 들어간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손을 잡고 브라질 인도 등 미래의 예비 강대국들인 브릭스 국가들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거부하면서 제3의 주요세력으로 독자적인 행보를 보일 경우, 21세기 들어 줄곧 약화 기미를 보여 온 미국 주도하의 기존 국제정치 및 국제관계 변화 및 세력 재편성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미중 및 러시아 일본 등 주요국들이 포진한 동아시아도 그 파장은 비켜가지 않을 것이다. 특히 분단국으로 미중의 진영싸움에 휘말려 서로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한에 그 파고가 더 높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