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 R&D 예산 확 줄이고 해외 공동연구엔 펑펑

"과학계 카르텔" 윤 정부 '이중행보'

국가 R&D 예산 대폭 삭감해 놓고

해외 공동 R&D에는 1조8천억 배정

변칙적 예산안에 연구 현장 대혼란

“기술 패권 시대와 동떨어진 정책”

2023-09-18     장박원 에디터

정부가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은 대폭 삭감하고 해외 공동 R&D에는 2조 원에 육박하는 예산을 배정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R&D 예산’을 언급한 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과 기초과학 예산을 줄여놓고 윤 대통령이 지난 4월 미국 방문 때 발표한 보스턴-코리아 프로젝트 등 해외 R&D 사업에는 예산을 펑펑 쓰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8월 2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4년 예산안 및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발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2023.8.29 연합뉴스

기획재정부는 18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주재로 비상경제장관회의 겸 수출투자대책회의를 열고 ‘첨단산업 글로벌 클러스터 육성방안’ 후속 조치를 발표했다. 해외 공동 R&D에 내년에만 1조80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게 핵심이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차세대 전지 분야 등 국가 3대 주력 기술의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과 미국 MIT를 비롯한 세계적인 양자 연구기관과의 공동연구와 전문인력 교류 등이다.  

보스턴-코리아 프로젝트에도 내년 투자 예산으로 864억 원을 배정했다. 이 프로젝트는 국내 의료·연구 기관과 보스턴 바이오 공학 분야 기관이 연계에 혁신적 진단 기술 개발과 의사 과학자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추진되고 있다. 이외에도 향후 5년간 2조2000억 원을 투자해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와 첨단의료복합단지, 연구개발특구 구축을 지원하고 벤처산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규제 완화 방안도 포함됐다.

정부는 지난달 발표한 2024년 예산안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R&D 예산을 16.6%나 삭감했다. 국가가 직접 지원하는 주요 R&D 예산 3조4000억 원에 대학과 기업에 주는 연구 지원금 등 일반 R&D 예산 1조 8000억 원을 합쳐 5조 원이 넘는 R&D 예산을 깎았다. 정부안이 그대로 확정되면 국가 R&D 예산은 올해 31조1000억 원에서 내년에는 25조9000억 원으로 줄어든다. 총지출 대비 전체 R&D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도 4%대에서 3%대로 축소된다.

 

연구개발 (R&D) 예산 추이

우리보다 앞선 선진 연구기관과 공동 R&D는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독자적인 R&D 역량을 높이는 일이다. 역대 정부가 기초과학 R&D와 인재 양성을 위해 투자를 꾸준히 늘려온 것은 이런 필요성 때문이다.

국가 R&D 예산은 1991년 이후 감소한 적이 한 번도 없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도 다른 분야에서는 허리띠를 졸라맸으나 R&D 예산은 예외였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면 손을 댈 수 없는 예산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은 이런 상식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꼭 필요한 것도 아닌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은 증액하고 R&D와 교육 예산을 삭감했기 때문이다. 수출 부진과 내수 침체로 법인세와 소득세 등 세입이 급감하는 상황에서도 내년 총선을 의식해 SOC와 복지 예산은 깎지 못하고 과기부의 R&D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변칙적 예산안의 판은 윤 대통령이 먼저 깔았다. 윤 대통령은 6월 말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질타했다. 여기에 여당인 국민의힘이 가세하며 R&D 예산 삭감을 압박했다. 일부 여당 의원은 과학계의 카르텔을 언급하며 과학자들을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내년 R&D 예산이 삭감되면 출연연과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는 큰 타격을 받는다. 출연연은 민간이 수행하기 어려운 과제를 책임지고 있다. 장기간 연구가 필수적인 기초과학 R&D 과제를 맡은 곳도 많다. 예산이 줄면 석사와 박사 연구원의 인건비를 충당할 수 없고 핵심 연구시설을 가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사실상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과학계가 출연연 예산 삭감에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는 이런 부작용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연구·개발(R&D) 제도 혁신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23.8.22. 연합뉴스

기초과학 R&D도 갑자기 예산을 줄이면 혼란을 피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기초과학 연구 분야는 주요국에 비해 열악한 편이다. 한국은 2019년 일본의 소재, 부품, 장비 수출규제 사태를 겪으면서 기초과학 연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기초과학 예산을 대폭 늘렸다.

이와 반대로 윤석열 정부는 국내 기초과학 R&D 예산을 삭감하면서 해외 공동연구에 집착하고 있는데 이는 앞뒤가 바뀐 예산 편성이다. 선진 연구기관과의 공동연구는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국내 R&D를 희생하면서까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 이유는 없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8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정부의 R&D 예산 삭감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R&D 삭감은) 기술 패권 시대와 동떨어진 21세기판 쇄국정책”이라며 “중소기업과 대기업 구분 없이 원천기술 R&D에 파격적으로 지원하는 특별예산을 편성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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