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부의 뉴라이트] ②마키아벨리 애독자 한오섭
'군주론' 오독한 사람 권력 잡으면 위험천만
조선도 '꾀주머니' 별명 붙여…현 국정상황실장
'아스팔트의 우파 노인들' 평가로 주목 받아
학생운동 하다 뉴라이트 변신…민중당 참여도
2006년 2월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보수 인터넷 신문 프리존이 주최한 창간 1주년 기념 토론회가 열렸다. ‘우파 운동의 현 주소에 대한 평가와 과제’라는 토론회였다. 한 사내가 발제에 나섰다.
“초기 우파 운동은 좌파 정권의 출현에 따른 반작용으로 출발했다. 뚜렷한 운동 이념이나 전략적 방향 설정 없이 국가보안법이나 북핵문제, 한미동맹의 균열 등 주로 안보적 현안을 중심으로 방어적인 성격을 띠며 전개됐다. (…) 그러나 안보현안 일변도의 다소 과장된 주장과 투박한 논리, 노년층 위주의 집회 문화가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이끌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젊은 세대가 좌파의 영향력 아래 포섭된 현실 속에서 초기 우파 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은 대부분 운동 경험이 취약한 장노년 세대였기 때문이다. (…) 새로운 집회 문화나 세련된 전술 구사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장노년층의 보수운동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비전과 이념의 정립, 근 현대사에 대한 재해석과 대중적 전파 등의 면에서 일정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 그런 면에서 조갑제 선생을 비롯한 애국적 우파 인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우파 노인들’ 인정해 주목 받아
발제자는 당시 40세의 한오섭 뉴라이트전국연합 기획실장이었다. 토론회 자체는 대단한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 했지만 한 실장의 발언은 보수판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꼴통보수’ ‘꼴보수’ 심지어 ‘틀딱보수’ 등의 멸칭으로 불려오던 ‘아스팔트의 우파 노인들’을 아랫 세대에서 공식적·공개적으로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가방끈 긴 젊은 뉴라이트 인사들 사이에서는 ‘우파 노인들’을 은근히 멸시하며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기류가 있었다. 가뜩이나 서러웠던 ‘우파 노인들’ 입장에서는 한 실장의 평가가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뉴라이트 성향의 보수매체 뉴데일리는 그때 “한 실장의 주장은 뉴라이트가 기존 보수를 극복하기 위해 나섰다는 그간의 인식과는 달리 기존 장노년층 보수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충분히 연대할 수도 있음을 시사해 주목된다”며 한 실장의 발언을 비중 있게 소개했다. 한 실장의 발제에 거명된 조갑제는 자신이 운영하는 매체 ‘조갑제닷컴’에 기사 전문을 게재했다. 동의의 표시였을 것이다.
한오섭 실장의 올드라이트와 뉴라이트 간의 화해 주선은 두 세력을 ‘범 라이트’로 묶어내자는 관점에서 나온 매우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한 실장은 ‘꾀 많은 전략가’였다.
조선일보 “한오섭은 꾀주머니”
세월이 흘러 조선일보는 그런 그에게 ‘꾀주머니’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이 신문은 지난 6월 7일 ‘대통령실 사람들’이라는 연재 기사 5번째로 한오섭 실장을 소개했다. 이 기사에는 <윤 대선 후보 시절부터 ‘꾀주머니’ 역할>이라는 작은 제목이 붙어 있다.
“한 실장은 윤 대통령에게 중요한 조언자 역할을 한다. 김용진 대통령실 대외협력비서관(옛 청와대 소통관장)은 최근 기자와 만나 윤 대통령의 대통령실 참모 회의를 주도하는 사람이 누군가라는 물음에 ‘한오섭 실장’이라고 즉답했다. 그의 꾀와 말발이 남다르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사례도 들었다. 2021년 10월 홍준표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현 대구시장)가 윤석열 후보를 ‘범죄 공동체’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공격했다. 윤 후보는 “홍 선배님, 우리 ‘깐부’ 아닌가요”라는 말로 받아쳤다. ‘지금은 우리끼리 경쟁하고 있지만, 후보가 결정되면 야당의 이재명 후보와 싸워야 하는 동지 아니냐’는 취지의 반박이었다. 윤 후보의 ‘깐부’ 발언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홍준표도 이 말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 했다. ‘깐부’라는 말로 홍준표의 공격을 막아내자는 아이디어는 한 실장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학생운동 하다 뉴라이트로 변신
한오섭 실장은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젊은 시절 민중민주주의학생투쟁 중앙위원을 지낼 정도로 열성 운동권이었다. 1990년 이재오, 김문수, 장기표 등이 주도해 창당한 민중당에 몸을 담기도 했다. 2005년 창립한 뉴라이트전국연합에서 기획실장을 역임했다.
김문수 경기지사 시절엔 경기도 정무특보를 지냈다. 이명박 정부 때는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실 선임행정관을 역임했다. 지금은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정상황실장 자리에 앉아 있다. 용산 대통령실의 여러 뉴라이트 인사 가운데 하나다.
마키아벨리 오독하면 위험
한신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한양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수료한 한 실장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의 열혈 애독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애독서 한 구절을 보자.
“군주된 자는, 특히 새롭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곧이곧대로 미덕을 지키기는 어려움을 명심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때로는 배신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 인간성을 포기해야 할 때도, 신앙심조차 잠시 잊어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달라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면 착해져라. 하지만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든 칭송 받게 되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권모술수를 옹호했다는, 아주 오래된 오해를 받고 있는 정치사상가다. 특히 ‘나라를 지키기 위해’라는 전제를 생략하거나 나라와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는 말만 인용하는 독자들 때문에 ‘사악한 정치 사상가’라는 누명을 썼다. 그러나 누명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오독하면 여전히 위험한 사상가다.
한 실장은 기자 등 주변 인물들에게 <군주론> 읽기를 자주 권한다고 한다. 한 실장은 윤 대통령에게도 <군주론>을 추천했을까. 책을 한 권만 읽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책을 멀리한다는 대통령이니 책의 내용을 그냥 띄엄띄엄으로라도 전해줬을까. 그렇다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라는 전제에 방점을 찍어주기는 했을까.
<군주론>을 오독한 사람이나 잘못 이해한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위험하다. 그 권력자는 자신을 중용한 문재인과 문재인 정부를 배신했다. 조국 전 법무장관과 그 가족에게 잔인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렇게 주저 없이 사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