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를 영화로만 즐길 수 없는 이유들
놀란 감독의 연출력·재미 뛰어나다는 평가 일색
오펜하이머 원폭 없었으면 우리도 참전국 지위
원폭 투하가 한반도 분단의 한 원인인 점 ‘씁쓸’
핵의 폐해 묘사 미흡·메카시즘 한국서 현재진행형
영화 ‘오펜하이머’가 화제가 되고 있다. 15일 국내서 개봉한 영화는 24일까지 관객 188만 명을 모으며 흥행 순위 1위를 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적 관점에서 이 작품을 마냥 영화로서 즐길 수 없다.
지난달 21일 북미에서 먼저 개봉한 이 영화는 초기부터 큰 화제가 됐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명성에 핵폭탄 개발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대중의 궁금증이 더해졌다. 현재 글로벌 흥행 수익 6억 달러를 넘어서며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고 있다.
국내서도 개봉 전 예매가 30만 명이 넘으며 주목을 끌었다. 영화가 개봉하자 평론가들과 관객은 “역시 놀란 감독이다” “3시간 넘는 상영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밀도가 높다” 등의 호평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는 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2차 세계대전 후반 원자폭탄 제조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후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제조와 핵무기 확산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1950년대 메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상황을 그린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며 영웅 대접을 받던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 불려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증명하라”는 압박을 받는 등 고초를 겪는다. 그에 대한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제목처럼 오펜하이머는 인류에게 ‘핵의 판도라 상자’를 연 것에 괴로워한다. 원폭 실험 직후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암송하며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한다. 한 인간의 고뇌와 사회적 광기를 다룬 연출 솜씨는 인정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영화 속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떠올리면 영화를 좀 더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영화가 묘사하듯이, 오펜하이머는 나치보다 먼저 핵을 개발해 인류를 전쟁에서 해방시키려 한다. 하지만 독일 패망 이후에도 핵개발을 멈추지 않는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일본에 대한 공습이 계속될 경우 희생자가 크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만약 핵폭탄 개발이 중단되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없었다면 우리는 참전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분단도 막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오펜하이머에게도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다. 영화는 승전국, 영미권의 시각으로 당시를 응시할 뿐이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서울 진공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 특수부대 격인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과 함께 8월 18일 서울을 탈환하려던 작전이다. 1943년 임시 정부는 임팔 전투를 비롯한 버마 전역에 광복군을 파견하며 승전국 지위를 얻을 명분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며 작전은 무산됐다. 일본은 8월 10일 국제연맹 본부에 포츠담 선언 수락의사를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김구 주석과 광복군은 매우 낙담했다. 김 주석은 '백범일지'에 당시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일본의 항복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써서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
황철민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 25일 시민언론 민들레와 통화에서 “영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겠지만, 아직도 분단돼 반쪽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오펜하이머와 따로 계산할 게 남아있다”며 “원폭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프랑스처럼 참전국으로서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원폭은 우리에게 과학의 저주가 아닐 수 없고 오펜하이머도 곱게 볼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핵의 위험성과 폐해에 대한 묘사가 가볍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우리는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출 문제 등 핵의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오펜하이머와 미국 각료들이 원폭을 어느 도시에 투하할지 결정하는 장면이 그렇다.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교토는 오래된 도시이고,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다른 도시로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 장면을 두고 한 관람객은 “핵폭탄으로 수십만이 죽었는데, 손가락으로 어느 도시를 선택하고 있었다. 핵에 대한 이 영화의 태도가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오펜하이머는 62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함께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도 70세에 암으로 죽었다. 당시 핵폭탄 실험을 가까이서 관찰한 다수의 학자들이 암으로 죽은 까닭은 피폭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영화 상영 시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메카시즘을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한국의 상황도 있다. 대통령은 지난달 광복절 기념사의 주제를 공산주의 박멸로 잡았다.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