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염수 문제가 정쟁? '정치'를 막는 언론
의혹제기를 당리당략이라고 폄하하는 언론
한국언론 고질, 후쿠시마 사태에서 더욱 뚜렷
문제의 합리적 해결절차로서의 정치 무력화
<정쟁에 빠진 정치권… '日 후쿠시마 오염수 팩트'엔 무관심>이라는 3일자 세계일보의 기사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후쿠시마’ 보고서 발표를 하루 앞두고 민주당이 일본 정부와 IAEA를 향해 최종 보고서를 둘러싼 공모 의혹부터 해명하라고 촉구한 것을 정치권이 ‘당리당략’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이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에 대해 한국언론이 보도하는 방식의 전형이다. 대다수 국민들의 불안을 대변하고 여러 의혹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정치 활동을 ‘정쟁’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정치'를 정쟁으로 폄하하는 것은 한국언론의 만성적 고질이지만, 특히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에 대해선 그같은 양태가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를 무력화시키며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키우는 '정쟁' 보도가 한국언론에 넘쳐난다. 정치의 부정적이고 거친 측면의 하나로서 정쟁이 분명 있을 수 있지만 언론발 정쟁 용어의 남발은 오히려 정치 자체를 정쟁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결과를 빚고 있다.
위의 기사는 야당을 향해선 "사실상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은 IAEA 최종 보고서에 대한 거부 명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했고, 변호사 단체와 환경단체, 종교단체 등에 대해선 "오염수 방류 문제와 관련한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며 야권을 거들고 나섰다"고 쓰고 있다. 상당한 구체적 근거를 갖춰 제기되고 있는 '검은돈 거래' 의혹에 휘말려 있는 IAEA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을 '거부 명분을 확보하려는 것', '야권을 거드는 행위'라며 사실상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가 말하듯 “정치권은 합리적 해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는 커녕 진정성 없는 공방만 이어 갔다”고 했는데 정치권의 합리적 해법을 막는 것은 누구인가. “그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당리당략에만 골몰한 채 정쟁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하는데 '그저' 정치를 정쟁으로 몰며 '정치'를 막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언론 역할의 2중 방기
'정쟁'이라는 말의 남발로써 언론은 자신의 역할을 2중으로 방기하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에서는 IAEA 최종보고서가 최종결론이라도 되는 양 이 기구를 둘러싼 갖은 의혹에 대해 파헤쳐보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의혹 제기에 나서는 정당과 시민사회에 대해서는 정쟁을 거드는 것처럼 지적한다. 언론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과 함께 언론 부재의 현실에서 언론 역할을 하는 시민사회, 정당 활동을 오히려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쟁(政爭)이 정치에서의 지나친 대립과 분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물론 있다. 그러나 대립과 갈등의 조정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정쟁을 명확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정쟁은 정치의 일부이며 출발이다. 오히려 정치는 갈등을 누르는 것보다도 갈등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정치는 정쟁의 배제와 거부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쟁을 정쟁답게 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혹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한국언론은 많은 경우 '정치'를 곧 '정쟁'으로 단순 등치시킴으로써 정치의 작동을 막고 있다.
그같은 정쟁 용어의 남용은 정쟁이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쉽게 비하하게끔 하고 있다. 김기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가 지난달 29일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의 일부)을 '과학'의 이름으로 비난할 때 내세웠던 것도 '정쟁'이라는 말이었다. "과학이 '정쟁'의 도구로 오용되는 현실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과학자인지 '원전 마피아'인지 의문이 제기되는 주장을 펴고 있는 그의 설명은 "처리수가 배출된다고 해도 이들이 광활한 바다로 배출되어 해류에 희석되어 섞이고 퍼져버림으로써 대한민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해류 입장에서 봤을 때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후쿠시마 앞바다로부터 가장 먼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설명이 과연 '과학적'인 것이고, 이에 대해 따져보자고 하는 것은 반(反)과학이며 정쟁인 것인가.
'정쟁'이라는 명명은 정당이 그 자신의 존재이유인 정치를 스스로 거부하는 방패로 흔히 악용된다.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에 대한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동의의 건 처리 과정에서 정부와 국민의힘은 '10.29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 '야당의 숨겨진 정치적 의도가 있는 정쟁법안'이라고 규정했다. 동의의 건 처리 후 유가족들은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내 자식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봐달라는 게 특별법인데, 이것이 왜 정쟁이냐”고 성토했지만 일부 정치세력의 '정쟁화' 시도는 완강하다.
그같은 '정쟁' 프레임의 애용, 남용은 정치권과 언론의 합작에 의해 '주문(呪文)'이 돼가고 있다. 특히 이 주술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것은 역시 조선일보다. 6월 27일자 사설 ‘국내 정쟁은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가 그 한 단면이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중국 정부 초청으로 시짱(西藏·티베트) 자치구를 다녀온 민주당의 도종환 의원 등을 비판하면서 ”중국의 선전, 선동과 억압적 통치 합리화에 이용당하는 것이 유감스럽다”고 비난한 것을 받아 "이런 모습은 모두가 국내 정쟁과 관련이 있다”면서 기어코 '정쟁'으로 단죄한 뒤 “지나친 친중 모습을 보이는 것은 미국 일본 등 자유 민주 진영과 관계 강화를 추진하는 윤석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기 위한 것이란 지적이 많다”고 했다. 이 사설은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의 한반도 유입 문제는 '황당 괴담'에 불과한 것이며, '국민 불안감을 자극해 내년 총선에 이용하려는 것'이라는 논리까지 폈다. '야당의 정쟁'과 '윤 정권의 우방 외교'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외형으론 양비론, 실질적으로는 편향
'정쟁'이라는 말의 오염은 문제의 합리적 해결 절차로서의 정치를 무력화시키는 한 원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국 정치권을 넘어 사회 현안의 당사자들에게도 문제해결의 한 조력자, 조정자로서의 '정치'를 사실상 부정시하고 거부하게 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 디지털타임스의 28일자 "오염수 인질극 멈춰라" 어민들 호소에도… 정쟁에 허송세월" 기사는 "정치인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정쟁의 도구로 삼고 우리 수산인과 수산물 판매 상인을 볼모로 잡는 인질극을 더 이상 벌이지 말라"는 한국연안어업인중앙연합회 김대성 회장의 말을 싣고 있다.
이 기사는 "일본 정부가 예고한 후쿠시마 제1원전의 오염처리수 방류 준비가 막바지를 향해 치달으면서 어민들의 피해가 극심해지는데, 정치권은 대책없이 정쟁으로만 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이 정부의 국무1차장이 정부 브리핑에서 "방류 결정을 되돌려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에 다른 방식을 제안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상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에 대해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 입장에서 설명하는 게 온당한가, 피해를 최소화할 다른 대안이 많은데 왜 방류가 가장 현실적 대안이라고 두둔하나"라고 질타한 것도 정쟁인 향 지적하고 있다. 이런 기사야말로 대책없는 '언론의 정쟁 명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쟁을 벌이는 양쪽을 함께 비판하는 것은 양비론의 한 형식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양비론조차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위의 기사는 야당에 대해서는 "민주당은 '방류 보류'를 내세우지만, UN 정기총회 안건 지정과 일본 방문투쟁까지 추진하며 정쟁만 키웠다”고 했고, 여당에 대해선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주장을 '좌파의 선동이 만들어내내 괴담'으로 치부하거나 '가짜뉴스'라고 공격할 뿐, 오염수 방류 자체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는 소홀했다”고 양쪽을 비판하고 있다. 한쪽에 대해서는 정쟁으로 규정하면서 다른 쪽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정도로 지적한다. 한국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비론, 그러나 실제로는 한쪽 편에 기울어진 의사(疑似)양비론의 숱한 사례들 중 하나다.
언론에서 재생산되고 증폭되는 '정쟁'이라는 말은 정치권으로 역수입되며 정치를 스스로 위축시키고 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3일 당 상무집행위원회에서 "다당제 개혁이 돼야 이 지긋지긋한 내전적 정쟁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당제가 정치 발전의 한 방향인 것은 맞지만 그가 알아야 할 것은 다당제 개혁은 때로 내전적 정쟁을 거쳐야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의 정당이 정쟁다운 정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언론에 의한 '정치의 정쟁화'가 정치를 막고, 오히려 정치를 정쟁에 가두고 있다. 언론에 의한 말의 오염이 정치를 망치고 다시 언론 자신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