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노동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2023-05-20     박태주 칼럼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윤석열 정부도 보수정부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취임하자마자 개혁을 들고 나왔고 거기에 노동이 빠지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견인하기 위해 노동개혁이 필요하다는 예의 그 소리였다. 노동이 삶이 아닌 생산과 성장의 관점에서 규정되는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 정부에 비해 개념이나 철학이 떨어지는데다 덜 민주적이고 더 성장에 집착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경제성장이야말로 정권의 존재이유였다. 경제성장을 위해 노동조합은 무력화되어야 하고 노동시장은 유연화되어야 한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에서 눈에 띄는 것은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다. 건설노조를 ‘건폭’이라 비난하고(2023.2.1. 국무회의), “화물운송 노동자의 파업은 북핵 위협과 마찬가지”(2022.12. 참모들과의 비공개회의)라고 바라보면 노동조합은 분쇄해야 할 ‘내부의 적’(enemy within)일 뿐이다. “내부의 적은 (외부의 적에 비해) 싸우기가 더 어렵고 자유에 더 위험하다”(마가렛 대처 전 영국수상, 1984).

이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은 친자본적이고 계급적이다. 노동조합을 적으로 삼아 투쟁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전투적이기도 하다.

내용도 성과도 없이 갈등만 낳은 노동개혁

취임하자마자 요란스럽게 노동시간의 개편을 내세웠다. 취임한 지 1주년, 막상 돌이켜보면 한 게 없다. 노동시간 개편도 동력마저 잃어버렸다는 평가들이다.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2021.7.19. 대선후보 시절 매일경제 인터뷰)는 것부터가 시대착오적이었다. 호봉제를 ‘세대 상생형’이라는 이름을 붙여 직무·성과중심으로 바꾸겠다고 공언했지만 거기까지다. 아무런 안도 나온 바가 없으니 진전이 있을 리 없다. 대신 노동조합 때리기에 온 힘을 다했다. 남은 것은 한 노동자의 죽음과 노정갈등이었다.

노조를 적대시하는 개혁정책이 갈등을 일으킬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사회적 대화는 포기했고 야당과의 협의도 무시했다. 노동시간을 개편하느라 고용노동부 장관은 MZ 노조를 두 번씩이나 만났지만 양대 노총 청년노동자의 토론 요청은 끝내 거부했다(이들은 ‘이정식 장관 없는 이정식 장관 토론회’를 열었다). 대통령은 취임 1년이 지나도록 야당 대표나 원내대표를 만나지 않았다.

이는 소통의 부재를 넘어 투쟁의 정치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상대방을 경쟁자가 아니라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정치는 전쟁으로 바뀐다. 에너지를 죄다 동원하여 상대방을 분쇄해야 한다.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와 공격은 자본주도의 성장을 위한 수단이겠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집단적인 목소리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후퇴로 이어진다.

18일 오후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이 서울역 인근에서 최저임금 인상과 실질임금 보장을 촉구하는 집회를 연 뒤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2023.5.18. 연합뉴스.

노동조합 탄압과 민주주의의 후퇴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을 보면서 드는 의문은 “과연 개혁할 의지는 있을까?”라는 것이다. 노동문제는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부딪치는 영역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노동개혁을 위해 사회적 대화에 매달리고 법 개정을 위해 야당과 협의했던 이유다. 윤석열 정부는 이 과정을 건너뛰었다.

윤석열 정부가 노동개혁에 진심이었다면 사회적 대화를 우회하고 야당의 협조를 외면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가 노동개혁을 내건 진짜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실패가 예정된 경제사회정책의 책임을 노조와 야당에게 떠넘기려는 수법? 아니면 사회를 통합하기는커녕 정치적으로 양극화시켜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것? 그래서 대통령이 나서서 사회 갈등을 키우고 있을까.

법치만 해도 그렇다. 노동조합이 생긴 이래 법의 이름으로 노동조합을 우리에 가두겠다는 권력자들의 로망은 늘 실패했다. 법치는 기존의 법으로 과거를 바라본다. 그것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적 과정을 생략하고 선악의 잣대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든다. 한마디로 법치는 노사관계에서 정치의 실종을 의미한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정치는 “사회세력 사이의 갈등을 힘이 아닌 말로 푸는 것”이라며 “민주주의는 말의 힘과 설득의 방법이 우선인 체제”라고 말한다“(『정치적 말의 힘』).

법치를 빙자한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은 결국 자본을 대리한 노조탄압이자 자본주도의 성장을 위한 길닦이에 지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 아니라 대한민국 자본의 1호 영업사원으로 자리매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결합이 이루어지면서 민주주의는 후퇴한다.

민주주의의 외형을 멀쩡히 유지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가 결합하는 현상을 영국의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는 '포스트 민주주의'(post-democracy)라고 부른다. 민주주의는 존재하지만 시민이 배제되는, 그리하여 정치가 자본의 이해에 종속되는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포스트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조응한다. 그리하여 포스트 민주주의에서는 자본주도의 성장체제를 앞세워 노동조합이라는 규제장치를 무력화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려는 시도가 이뤄진다.

무엇을 할 것인가

다행이랄까,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은 헛발질에 그칠 것이다. 정부·여당과 노조, 그리고 야당 사이에 대화가, 그리하여 노동정치가 복원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통령의 낮은 지지도로는 개혁의 동력을 모으기도 어렵거니와 정치 시계는 대통령의 레임덕을 향해 달린다.

노동개혁이 좌절되면서 노사갈등은 노정갈등으로 대체될 것이다. 서로가 패자가 되는 싸움이겠지만 노조가 피할 수 있는 싸움은 아니다. 이때 힘의 관계를 결정 짓고 여론의 동향을 좌우하는 것은 연대의 힘이다. 바다 밑의 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노동도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

연대에서 열쇳말은 ‘사회적’(social)이라는 단어다. 노동조합은 소수의 기득권 지키기에서 벗어나 ‘자기 땅의 이방인’(혹실드)이 된 비정규직이나 플랫폼 노동자, 하청 노동자들을 껴안아야 한다. ‘아래를 향한 연대’가 그것이다. 연대는 기업과 노동 바깥의 사회적 의제를 내면화하면서 노조가 사회적 주체(social actors)로 나서는 일도 포함한다.

”연합은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가장 효과적인 형태는 서로 이질적인, 그리고 여러 사안에 반대 입장을 취하는 집단이 하나로 뭉치는 연합이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 등이 한 말이다(『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위기라면 위기의식이야말로 위기의 해결책이 아니겠는가.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