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집단지성 "비례대표제 강화" 분명히 확인
공론화 시민참여단 500인, 도농복합안 배척
악조건 속 '미니 국민'의 숙의민주주의 작동
더욱 과감한 시민의회 방식 필요성 확인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학습 · 숙의로 통념과 선입관 이겨낸 시민들
시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다. 지난번 글에서 분석했듯이 공론화 설계와 중립성, 진행방식에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숙의자료집과 전문가발표의 복잡다단한 내용을 예리한 질문들을 제기하며 상당한 수준으로 소화했다. 학습숙의과정 이전과 이후의 설문조사결과가 확연히 달라진 게 그 증거다. 다행스럽게도 숙의 후 설문조사결과는 시민참여단 500인이 학습숙의과정을 거치면서 지배적인 통념과 선입관에서 놀랄 만큼 벗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6시간의 학습숙의시간이 만들어낸 일반시민들의 인식변화는 학습과 숙의로 시민들이 깨어나는 것에 비례해서 선거와 정당, 의회 등 정치세계를 바꿀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선거제도 개편당위성은 숙의 전에도(77%) 숙의 후에도(84%) 절대적인 동의를 받았다. 지역구 크기에서는 소선거구 찬성입장이 소수파(43%)에서 안정적 과반수(56%)로 크게 늘어났다. 중선거구 찬성입장은 42%에서 40%로, 대선거구 찬성입장은 8%에서 4%로 줄었다. 비례대표제를 전국단위로 실시해야한다는 의견이 소수의견(38%)에서 안정적 다수의견(58%)으로 강화됐으며, 권역단위로 실시하자는 의견은 45%에서 40%로 약화됐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비례대표의원 수 증감 의견에서 나타났다.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 소수파(27%)에서 압도적 다수파(70%)가 되고 비례대표의석을 줄이자는 입장은 46%에서 10%로 축소됐다. 끝으로 의원정수 확대의견이 13%에서 33%로 확대돼, 65%에서 37%로 크게 위축된 정수감축의견과 엇비슷해졌다. 현행 300인 유지 입장은 18%에서 29%로 늘었다. 학습숙의과정을 거치면서 정수감축 주장을 버리고 현행유지나 증원 입장으로 바뀐 시민대표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위의 수치들이 말해주듯이 총16시간 동안 진행된 숙의방식의 공론화 작업은 시민대표 500인의 뚜렷한 입장 변화를 이끌어냈다. 공론화 결과 각각은 다음과 같이 한 줄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선거제도는 반드시 바꿔야한다(84%). 둘째, 지역구의원은 소선거구에서 뽑는 게 바람직하다(56%). 셋째, 비례대표제는 권역단위가 아니라 전국단위로 실시해야 한다(58%). 넷째, 비례대표의석을 늘려야 한다(70%). 다섯째, 그럼에도 의원정수는 늘리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현행유지 29%, 감축의견 37%). 이 가운데 셋째와 넷째는 기존의 여론조사결과와는 판이한 내용이다. 의원정수 감축의견이 현저하게 약화된 다섯째 결과도 동일하다. 만약 학습공론시간을 8시간만 더 가졌든가 학습숙의쟁점과 설문조사문항을 두어 개만 더 추가했더라면 위의 방향성이 더 뚜렷해졌을 것이다.
'부실 공론화' 한계 뚫어낸 놀라운 결과
위와 같은 공론화 결과를 보여준 시민대표 500인은 랜덤 샘플링으로 선발돼 국민 대표성을 갖는 ‘미니국민’이었다. 총16시간의 잘 짜여진 학습숙의프로그램을 제공받은 500인의 숙의 후 설문조사결과는 선거제의 5대 쟁점에 관한 한, 깨어있는 국민의사라고 할 수 있다. 국회정개특위의 관점에서는 바로 이 부분이 딜레마였을 것이다. 보다 수준 높은 숙의민주주의를 도입할수록 조사결과가 거대양당의 당리당략과 동떨어질 게 틀림없는 반면 그 조사결과는 수준 높은 학습숙의과정으로 뒷받침된 깨어 있는 국민의사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무시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한마디로 국민대표성과 집단숙의성을 갖춘 미니국민의 공론화결과에 대해서는 공론화 의뢰 당국이 어떤 공론화 방식을 채택하든 상관없이 또한 공식적으로는 구속력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참고자료로 치부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500인 시민참여단이 공론화 숙의과정을 거치면서 대선거구 개방명부 비례대표제 안이나 현행 준준연동형 비례대표제 강화 안에 제일 높은 지지를 보냈다고 상상해보라. 국회정개특위가 이 조사결과를 존중하기는 정말 어려울 것이다. 국회정개특위 입장에서는 숙의민주주의적인 공론화 과정이 법적으로 강제되는 것도 아닌데 구태여 이런 딜레마와 리스크를 떠맡을 이유가 없다. 정치권이 평범한 일반시민들의 집단지성에 의한 문제해결 방식을 한사코 꺼리는 진짜 이유는 혹시 모를 불확실성을 떠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국회정개특위는 이번 공론화과정에서 부담스런 시민의회 방식을 원천 봉쇄하는 것은 물론이고 숙의공론조사 방식도 너무 진지하지 않은 통과의례가 되도록 개입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500인 공론화 회의가 이틀간의 학습숙의과정에서 본론(구체적인 선거제 개편방안들)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서론(선거제개편의 기본쟁점들)만 학습, 숙의하고 간단한 설문조사결과를 내놓는 선에서 어정쩡하게 끝나도록 설계된 속사정일 것이다.
국회정개특위의 안전제일주의와 리스크회피의지는 이번 숙의공론화 작업의 성격을 ‘시민참여형 조사’라는 낯선 용어로 규정한 데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용어는 ‘숙의’와 ‘공론’이라는 핵심용어를 빼서 당면과업의 성격을 모호하게 할 뿐 아니라 당면과업의 성격이 국회의 입법조사사업에 시민이 참여하는 데 있다는 식으로 그 의미를 깎아내린다. 실은 국회정개특위가 이번 공론화 작업 축하동영상에서 숙의공론조사 창안자인 제임스 피시킨(James Fishkin) 교수를 등장시키면서도 그가 사용하는 ‘숙의공론조사’(deliberative poll)라는 확립된 용어를 쓰지 않고 굳이 ‘시민참여형 조사’라는 조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사실에서도 공론화를 하되 최대한 의미수준을 낮추려는 국회정개특위의 안간힘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 500인 공론화 회의는 구체적인 선거제 개편방안을 놓고 설문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례적이고 예외적이었다.
'깨어 있는 국민의사'가 제시하는 선거제개편 방향
시민참여형조사 결과로 드러난 선거제개편 국민의사를 간단하게 맥락화해서 설명하자면, 첫째, 지금처럼 소선거구에서 뽑는 지역구의원이 무려 253명(84.3%)에 달하는 압도적인 다수대표제로는 소수집단의 다양한 민의가 제대로 반영될 수 없기 때문에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둘째, 선거제도 개편방향은 전국단위 정당득표율에 비례해서 정당별 의석수가 정해지는 전국단위 비례대표제로 전환해서 소수대표성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이를 위해 향후 비례대표의원 수를 확실하게 늘려서 총의석수 대비 지역구의석 비중을 줄여야 한다; 넷째, 지역구의원은 중선거구에서 2인 이상, 대선거구에서 5인 이상을 뽑을 게 아니라 소선거구에서 1등을 뽑음으로써 유권자의 선택권과 대표자의 책임성을 확보하는 게 바람직하다; 다섯째, 비례의석을 확실하게 늘려야 한다는 데 절대적으로 동의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수단으로 의원정수 확대까지는 바라지 않는다(66%). 의원정수와 관련해서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다소 충돌하는 것 같지만 만약 바람직한 세비감축 수준과 특권해소 방안을 묻고 그 조건으로 의원정수 확대여부를 물었더라면 의원정수 확대의견도 다수의견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비례대표의원을 늘려야 한다는 데 70%가 지지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3일 저녁 7시, 공론화 회의 말미에 공표된 위와 같은 500인 시민참여단 설문조사결과는 정치권과 국회(정개특위), 보수언론에 큰 당혹감과 충격파를 안겼을 게 틀림없다. 특히, 도농복합안(도시중선거구+농촌소선거구+권역별 병립형 비례의석)을 제안한 국힘당과 도농복합안의 뒷배로 알려진 김진표 국회의장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숙의과정 전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는 도농복합안이나 대선거구 비례대표제 등 구체적인 선거제 개편방안을 놓고 지지 여부를 묻는 문항이 전혀 없었지만 지역구를 소선거구로 할지, 중선거구로 할지, 비례대표제를 전국단위로 할지, 권역단위로 할지를 묻는 문항은 들어 있었다. 여기서 중선거구 찬성입장과 권역단위 지지입장이 우세한 조사결과가 나와야 도농복합안을 국민의사로 포장할 수 있는데 조사결과가 완전히 거꾸로 나왔다. 그것도 숙의 후에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비판하기가 몹시 어렵다.
조사결과가 발표되는 13일 오후 내내, 나는 다섯 가지 이유로 공론화 결과에 마음을 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복잡다단한 선거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여러 개편방안을 평가하기에는 16시간의 학습숙의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둘째, 학습숙의과정이 선거제도의 기본쟁점으로 한정되고 구체적 개편방안까지 나아가지 않은 데다 숙의자료집에 다양한 선거제 개편방안 중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도농복합안만 소개됐기 때문이다. 셋째, 전문가들이 상이한 입장을 개진하며 불꽃 튀는 토론과 논쟁을 벌이지 않고 모두 중립적 해설자를 자임한 탓에 전문가발표 및 질의응답 시간에 쟁점과 대안이 명확하고 생생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넷째, 전문가들이 선거제의 3대 목표 가운데 하나로 책임성을 제시함으로써 중선거구까지는 몰라도 대선거구와 비례대표제는 일차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바람직한 선거제개편 권고안을 만들어내는 시민의회 방식이나 복수의 선거제개편방안을 놓고 학습숙의에 따른 선호변화를 보여주는 숙의공론조사 방식이 아니고 가장 낮은 수준의 공론화 방법으로 ‘시민참여형조사’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최대승자는 2020년 개정선거법
선거제도 공론화 시민참여단의 500인 시민대표들은 고도의 집단지성을 발휘하여 위의 다섯 가지 제약과 한계를 놀라우리만큼 극복했다. 만약 학습숙의시간이 8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또는 의원특권 해소방안도 학습숙의사항이자 설문조사대상이었다면 설문조사결과가 더 극적으로 달라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지난번 글에서 학습숙의과정에 대해 여러 비판을 가했지만 학습숙의과정을 거치고 나서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10%대에서 1,2%로 떨어진 사실과 우세의견이 뒤집히는 현상이 기본쟁점 5개 중 3개에서 발생한 사실은 학습숙의효과가 확실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일반시민의 문제의식과 집단지성이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작동했다.
공론화 회의에서 시민대표 500인은 사실상 도농복합안뿐 아니라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대선거구 비례대표제 등 국회의장자문위가 지난번 국회전원위에 제출한 주요 개편방안 3개를 모두 배척했다. 내가 보기에 이번 공론화의 최대패자는 도농복합안을 제안한 국힘당과 도농복합안을 밀어준 김진표 국회의장이고 최대승자는 2020년 개정선거법 혹은 혼합식 준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할 수 있다. 도농복합안의 주요 내용인 중선거구제와 권역단위 비례대표제는 숙의 후 확실한 2위로 뒤집혔기 때문에 거부하는 국민의사가 분명히 표출됐다고 볼 수 있다. 대선거구 비례대표제 역시 지역구는 소선거구로 하자는 국민의사가 분명하게 표출돼 상당기간 뒤집기가 어렵게 생겼다.
이번 500인 공론화 조사결과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지역구의원은 소선거구제로 뽑고 전국단위 비례대표제를 하되 비례의석을 늘리라는 건데 우리나라는 이미 이런 선거제도를 갖고 있다. 2020년 개정선거법의 혼합식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그것이다. 위성정당으로 무력화되었으나 현행 연동형선거제도는 책임성을 위해 지역구의원 253명을 소선거구제로 뽑되 전국단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해서 비례성과 대표성을 함께 높이면서 다당제 전환의 징검다리를 놓는 일대 개혁입법이었다. 어떤가? 이번 공론조사결과가 가리키는 방향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선거제도 아닌가.
나는 학습숙의과정이 8시간만 더 주어졌어도 현재의 50%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100% 연동형으로 강화하는 방안까지 충분히 논의되고 지지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공론화 500인 회의결과는 상대적으로 악조건 속에서도 시민들의 집단지성이 매우 신뢰할 만하다는 사실과 민주당이 보다 과감하게 시민의회 방식을 취해서 국민의 눈높이와 집단지성으로 선거제개편과 정치개혁을 추진할 때 큰 박수와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시민의 집단지성과 책임감이 의도적인 부실설계와 잘못된 중립성, 그리고 시간 제약을 이겼다.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