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리가 안 한 사과, 했다는 한국 언론

기시다 책임 부인 발언을 '사죄'로 둔갑시켜

언론의 대통령과의 대일 굴종 공조, 점입가경

2023-05-08     이명재 에디터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 간 7일 한일정상회담에서 강제동원 등의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사과는 없었다. 그러나 없었던 사과가 한국 언론의 지면에서는 있었던 일로 둔갑되고 있다. 일본 총리는 사과할 의사가 없는데, 한국 언론이 그를 대신해 반성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상회담에 대해 시민사회를 비롯한 국민들 사이에는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일본의 ‘호응’은 고사하고, 한마디의 사과 표명도 없는 ‘빈 손’ 회담이었다는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의 8일 성명이 이 같은 기류를 요약해주고 있다. 이 단체는 “이번 회담의 관건은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 사죄와 반성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여부였으나 기시다 총리는 ‘역사 인식과 관련된 역대 내각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며 기존 일본 정부의 입장을 한 번 더 반복하는 데 그쳤다”고 비판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5.7 연합뉴스

기시다가 의도하지 않은 말, 한 것처럼 해석

이 단체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역대 일본 내각의 입장들에는 “전후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거나 한반도 불법강점과 식민지배 책임, 일본군성노예제를 부정한 2015년 ‘아베 담화’와 강제동원을 부정한 2021년 스가 정부의 각의 결정도 포함돼 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아베의 계승자답게 기시다 총리가 그간 취해 왔던 태도는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김대중-오부치의 전향적인 선언보다는 과거 전쟁범죄와 식민지 침략을 부인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발전에 기여를 했다는 식의 왜곡 망언을 일삼은 아베 내각의 입장에 가깝다. 이번 회담에서도 그 같은 기조에서 달라진 점은 거의 없다.

그러나 중앙과 조선일보는 기시다가 의도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관련해서 얘기한 “많은 분이 힘든 경험을 한 것에 가슴이 아프다”는 말 한마디를 깊은 사죄라도 한 듯 요란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기시다의 발언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수많은 분’이나 ‘매우 힘들고 슬픈 경험’은 과연 누구를 얘기하는 것인가. 혹독한 환경은 누가 만든 것이며, 그 힘들고 슬픈 경험은 누구로 인해, 무엇 때문에 겪게 된 일인가를 이들 언론은 전혀 묻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강제동원 문제가 나올 때마다 “당시 전쟁이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본인들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해 왔는데, 그렇다면 기시다 총리가 말한 것은 당시 일본인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이런 점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기시다의 발언은 사죄나 사과이기는커녕 강제동원에 대한 책임자와 가해자가 없는, 다만 불운이나 불가피한 사유로 겪게 된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점을 한국의 대통령과 정부에 훈계하듯 강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이런 정도의 말도 일본 정부가 아닌 총리의 ‘개인적 심정임을’ 전제로 하고 나온 것이었다. 

과거사 문제 해결에 한발짝 진전?

그러나 이에 대해 중앙일보는 ‘2015년 아베 담화 이후 8년 만에 일본 총리가 직접 과거사 문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것’이라고 후하게 해석하고는 ‘지난 3월 초 윤석열 대통령이 ‘매듭을 푼’ 강제징용 해법에 대한 화답이기도 했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나아가 “한일 관계의 최대 걸림돌인 과거사 문제에 한발짝씩 더 나아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일보는 이 발언에 대해선 “과거사에 대해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라고 간단히 전하고만 있다. 그러나 1면에 기시다의 현충탑 참배 사진을 싣고는 ‘독립운동가 잠든 현충원 참배’라고 제목을 달아 외국을 방문하는 정상들이 으레 찾게 돼 있는 국립묘지 참배를 마치 일본 총리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찾아 고개를 숙이고 속죄의 참배라도 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일본 총리가 하지도 않은 생각을 담아 제목을 붙인 것으로, 일본 정부가 자국의 극우파 지지자들의 반발을 의식해 왜곡 보도라며 항의를 해도 될 법한 보도다. 

 한국의 유력 언론들의 대일본 관련 보도가 사실의 왜곡을 넘어서 없었던 일을 있었던 일로 만드는 정도에 이르고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상황이라고 할 만하다.

중앙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한국이 먼저 여기에 대해 꺼내거나 요구한 바가 없는데 먼저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줘서 감사하다”고 했다고 대통령실 고위관계자의 말을 빌어 전하고 있다. 애초에 사과를 요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얘기인데, 그러나 그럼에도 일본 총리가 결단을 내려 개인적 심정을 한마디 한 것에 '감읍'했다는 반응이다.

일본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대통령, 일본 정부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의도가 있었던 것처럼 나서서 사과라고 해석해 주는 언론. 사과할 의사가 없는 일본 정부의 잘못된 발언을 한국의 대통령과 언론이 지켜주고 있는 것을 넘어서 없는 사과를 있었던 일로 만들고 있다. 대통령과 언론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대일 굴종 공조'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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