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회 ②〕유권자 선택권과 효능감 최우선시한 캐나다 시민의회
[곽노현의 정치 새판] BC 주의 선거제개혁 논의에서 배운다
가장 모범적으로 설계 운영된 시민의회
지금 국회에서는 김진표 국회의장과 개혁파 의원들의 주도로 선거법 개정 논의가 진행 중이다. 거대양당 지도부는 아직까지 시큰둥하게 신중 모드를 유지하지만 국회의장이 워낙 적극적이라 국회사상 두 번째로 전원위원회를 소집할 분위기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에게 선거제 개편 논의를 맡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선거제개편의 직접 이해당사자라서 끊임없이 본인과 소속 정당의 유불리를 저울질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선거제 개편을 국회의원에게 맡기는 것은 생선가게 설계를 고양이에게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거제 개편은 속성상 국회의원 전원에게 적용되는 제척사유라고 봐야 한다.
인구통계학적 미니국민으로 구성돼 민주적 대표성을 인정받는 추첨시민의회에 선거제개편을 맡기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놀랍게도 그런 주장을 일찍이 실천으로 옮겨서 선거제 개편 추첨시민의회를 운영해본 나라가 있다.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BC) 주와 온타리오 주가 그들이다. BC 주가 2004년에 앞장서고 온타리오 주가 2006년에 뒤따랐다. 세계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시민의회 사례였다. 둘 다 캐나다자유당이 BC 주와 온타리오 주에서 야당 시절에 내걸었던 시민의회에 의한 선거제개편 공약을 집권에 성공하고 이행한 결과물이었다. 선거로 뽑히지 않고 추첨으로 뽑힌 시민의회에 중대한 정책현안의 해법을 맡긴 최초의 공식사례라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일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연방단위나 전국단위가 아니라 주차원 시민의회라고 해서 얕잡아볼 건 아니다. 캐나다는 10개의 주와 3개의 준주로 구성된 연방국가다. 캐나다의 주(Province)는 미국의 주(State)와 마찬가지로 연방정부와 별개의 행정부, 의회, 사법부를 운영하는 하나의 국가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광역지자체와는 위상과 권한이 완전히 다르다. BC 주와 온타리오 주의 선거개편 시민의회는 오히려 첫째,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은 공식 시민의회라는 점에서, 둘째, 다양한 입장을 가진 전문가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해서 시민의원들에게 집단학습과 숙의시간을 충분하게 보장했다는 점에서, 셋째, 학습단계가 끝난 후에 지역순회 공청회를 개최하며 선거제 개편과 시민의회에 대한 일반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넷째, 시민의회의 권고안을 국민투표에 붙였다는 점에서, 전 세계의 시민의회 사례를 통틀어보더라도 가장 모범적으로 설계되고 운영된 시민의회였다.
양원제로 운영되는 연방의회와 달리 캐나다의 모든 주의회는 우리나라처럼 단원제로 운영된다. 연방하원의원과 주의원은 100% 소선거구제로 뽑는다. 우리나라와 달리, 정당득표율에 따라 배분되는 병립형 비례대표 의석도 전무하다. 다시 말해서 캐나다의 연방하원과 모든 주의회는 영미권 전통에 충실하게 소선거구에서 단순다수제로 1인씩 뽑히는 지역구의원들로 100% 채워진다. 우리나라보다 더 심하게 순수 소선거구제를 실시하며 그 폐단을 반복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캐나다에서도 선거제도 개편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뉴질랜드처럼 독일식 혼합비례대표제로 바꾸자는 제안을 위시해서 다양한 선거제도 개편 구상이 제출됐으나 막상 변화로 이어지진 못했었다.
공약 지키기 위해 시민의회 구상 밀고 나가
2001년 BC주 총선에서 야당이던 자유당이 79석 중 77석을 얻는 심대한 불균형이 나타났다. 바로 직전 총선(1996)에서는 자유당이 총 득표율에서 2%포인트 앞섰는데도 신민주당이 6석을 더 많이 차지하면서 단독과반수 재집권에 성공하는 이변이 연출됐었다. 당시 자유당은 다수표를 얻고도 다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쓰라린 경험 때문에 시민의회 방식에 의한 선거제도 개편을 공약한다. 신민주당의 실정으로 2001년 총선에서는 유효투표의 57%를 득표한 자유당이 의석수의 97.5%를 싹쓸이하는 더 큰 이변이 발생했다. BC 주 자유당정부의 수상이 된 고든 캠벨(Gordon Campbell)은 주변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거구제 개편 공약을 지키기 위해 시민의회 구상을 밀고 나간다.
수상으로부터 추첨시민의회 구성을 의뢰받은 BC 주 선거당국은 2003년 12월 79개 선거구마다 남녀 1인씩 총 158명을 추첨으로 뽑고 원주민 출신을 2인 더 보태서 160명으로 시민의회의 구성을 완료한다. 인원 선발은 선거구별로 진행됐다. 먼저 선거구별 선거인명부에서 성별, 연령대 분포만 맞춰서 무작위 추출된 유권자 200명씩을 한 장소로 모이게 해서 시민의회 진행방식을 설명한 후 참석 의사를 물었다. 수락 의사를 밝힌 사람들 가운데 추첨으로 남녀 1인씩을 뽑았다. 79개 선거구가 동일한 방식을 따라 시민의원 남녀 1인씩을 선발했다. 이때 혹시 모를 변심이나 질환, 사고로 인한 결원에 대비해서 시민의원 1인당 똑같은 인구학적 특성을 가진 교체멤버를 1인씩 더 뽑아 놨다.
BC시민의회는 2004년 1월부터 1년 동안 밴쿠버에서 주말 이틀씩 꼬박 12회를 모였다. 첫 3달 동안 격주로 열린 6회 시민의회 모임은 온전히 정치 과정과 선거제도 학습에 할애됐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지역순회 공청회를 열었다. 시민의원들은 지역순회공청회에 5,6회씩 참석하고 시민의회에 제출된 다양한 서면의견들을 검토해야 했다. 2004년 마지막 3달간의 격주 6회 주말은 새로운 선거제도가 필요한지, 그렇다면 어떤 선거제도가 적합한지를 심의하는 데 사용됐다.
토론으로 선거구제 개편 3대 원칙 정해
시민의회는 일찍이 토론 끝에 선거구제 개편의 3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권을 극대화한다; 둘째, 표와 의석의 비례성을 제고한다; 셋째, 유권자의 지역의원 접근성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일반시민들이 선거를 통해서 무엇을 원하는지가 잘 드러난 개편 원칙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서나 유권자들은 기왕이면 개인선택의 폭과 효능감이 높은 선거제도를 선호하고, 표심으로 드러난 정당 지지도가 그대로 의석으로 전환되기를 바라며, 자기를 대표하는 지역의원을 지금보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인위적인 다당제나 할당제를 통한 대표성 강화가 원칙의 하나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정치 안정을 위해 단일정당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과반수 의석을 장악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설계할지도 논의했지만 시민의원들은 단일정당의 과반수의석 확보를 선거제도 개혁의 목표로 보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단일정당이 과반수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정당연합을 통해서 과반수의석을 만들어내면 정치 안정에 문제가 없다는 게 시민의원들의 생각이었다. 정당에 대한 시민의원들의 부정적 인식이 한몫을 했다. 대다수 시민의원들은 정당을 곱게 보지 않았다. 정당이 의회와 유권자들을 지나치게 대립정치로 몰아가며 대의과정을 왜곡시킨다는 부정적 관점을 학습숙의 과정을 거치고서도 유지했다. 후보공천 과정에서 정당지도부의 결정력이 크지 않은 선거제도를 선호하게 만든 유권자 선택권 강화 원칙도 그 연정선상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정치권과 학계, 언론의 일반적인 예측은 BC시민의회가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독일식 혼합비례대표제로 바꿀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었다. 같은 영미권인 뉴질랜드가 바로 몇 해 전에 소선거구제를 혼합비례대표제로 바꾼 사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더욱이 소선거구 인물선거와 정당득표율 비례대표제를 결합한 독일식 혼합비례대표제는 정당득표율에 비례해서 총의석수가 정해지기 때문에 비례성이 확보되는 건 물론이고 유권자가 1인 소선거구에서 지역후보를 직접 뽑기 때문에 유권자의 선택효능감과 접근용이성까지 동시에 충족된다는 점에서 시민의회의 원칙에도 부합한다는 평가가 대세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달랐다. 시민의회는 여러 선거제도 중에서 독일식 혼합비례대표제와 단기이양투표제(single transferable vote)를 최종 후보로 압축한 상태에서 압도적으로 후자를 선택했다.
단기이양투표는 여러 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에서 사용하는 투표방식이다. 단기이양투표에서 유권자는 정당명부에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후보 개개인에게 투표한다. 표는 1장밖에 없지만 n명을 뽑는다면 최대 n명의 후보까지 우선순위를 매겨 투표할 수 있다. n명을 뽑는 경우 100/(n+1)%+1표 이상을 받은 후보는 무조건 먼저 당선된다. 1순위 표만으로 당선쿼터 이상의 표를 받은 당선자들의 잉여분 표는 각 표의 2순위 후보들에게 나뉘어 이양된다. 최대득표후보가 당선쿼터를 넘기지 못해서 당선자가 없는 경우에는 최소득표후보 1인을 탈락시키되 탈락후보가 받은 1순위 표는 2순위후보들에게 이양된다. 이런 방식으로 n명의 당선자가 나올 때까지 탈락과 이양을 거듭한다. 단기이양투표제는 유권자의 한 표가 우선순위에 따라 여러 번 집계되기 때문에 어떤 표도 완전한 의미의 사표로 만들지 않는 장점이 있다.
중대선거구 단기이양투표제는 정당별 후보군의 우선순위를 정당이 정해서 내놓는 폐쇄형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와 달리 유권자 개개인이 정당별 후보들의 우선순위를 정해준다는 점에서 개방형 정당명부 중대선거구(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유사하다. 다만 단기이양투표제 아래서는 유권자들이 별개의 정당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점과 유권자가 정당을 가로질러 원하는 후보들을 고르고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런 특징 때문에 소속정당이 인기가 없어도 후보가 매력적인 경우 중대선거구제 단기이양투표제아래서는 2순위 개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에 그런 후보라도 정당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제 아래서는 낮은 정당득표율 때문에 당선 가능성이 매우 낮아진다.
자신이 정한 원칙에 충실하게 최종선택
BC 주 시민의회가 독일식 혼합비례대표제를 마다하고 단기이양투표제를 선택한 결과는 돌이켜보면 놀랄 일이 아니었다. 시민의회는 자신이 정한 3대 원칙에 매우 충실하게 최종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우열이지만 독일식 혼합비례대표제는 정당명부에 의한 비례대표의원이 전체의원의 절반이나 되기 때문에 유권자의 선택권을 강화하고 정당(지도부)의 영향력을 줄이자는 시민의회의 원칙 중 하나에 맞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단기이양투표제 아래서는 정당이 일방적으로 뽑는 비례대표의원이 전혀 없는데다 중대선거구에 공천된 정당별 후보군에 대해서도 정당을 가로질러 유권자가 원하는 만큼 선호순위를 매겨서 투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권자의 선택권과 효능감이 더 높아진다. 단기이양투표제도 아래서는 정당지도부에 잘 보여서 후보군에 들어가더라도 일반유권자에게 매력이 없으면 후순위로 밀려 낙선할 가능성이 높다. 당락의 최종결정권을 정당지도부가 아니라 일반유권자들이 갖는 셈이라 의원들의 충성심과 책임감도 일반유권자들에게 향할 수밖에 없다.
중대선거구 단기이양투표제와 20대 국회가 만든 현행법상의 연동형비례대표제 간에 가장 다른 점은 표와 의석의 비례성이 전국단위에서 관철되는 후자와 달리 전자는 권역단위(중대선거구)에서 관철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제3당 유입효과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전국단위 비례대표제 아래서는 소수정당이 전국단위 정당투표에서 5%~10%의 득표율만 올려도 상당수의 의석을 배분받을 수 있지만 2인에서 10인을 뽑는 중대선거구 비례대표제에서는 소수정당이 정당득표율 5~10%에 달해도 한 석도 못 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대선거구 단기이양투표제에서도 어느 소수정당 후보가 1순위 개표에서 5%~10%를 얻어도 당선되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독일식 혼합비례대표제를 마다함으로써 BC 주 시민의회는 인위적인 다당제 전환이 선거제 개편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인위적인 다당제 전환이 목표였다면 표와 의석의 비례성을 전국단위에서 관철시키는 독일식 전국단위 비례대표제를 채택했을 것이라서 그렇다.
캐나다의 경우 집권경험을 가진 주요 정당이 2개밖에 없어서 시민의회의 문제의식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뿌리를 가진 거대양당제 자체에 있었다기보다는 바람의 향방에 따라 작은 득표율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당에게 의석을 현저하게 몰아주는 소선거구제의 불비례성을 어떻게 교정할지에 집중됐다. BC 주 시민의회는 중대선거구 비례대표제를 채택함으로써 비례성을 강화하되 전국단위 비례대표제에 고유한 정당 난립을 막고자 하였으며 우선순위투표를 도입함으로써 정당지도부의 선택권과 영향력을 줄이고 유권자들의 선택권과 통제권은 늘리고자 했다. 그 결과가 중대선거구 단기이양 순위투표제다.
시민의회 권고안에 대한 정당의 반대캠페인 없어
2003년 시민의회 운영방침을 발표할 때 고든 캠벨 수상은 시민의회가 새로운 선거제도안을 권고하며 국민투표를 요청할 경우 그 요청을 수용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었다. 2004년 12월 단기이양투표제 개혁안을 내놓으면서 시민의회가 국민투표 부의를 요청하자 BC 주정부는 2005년 5월 총선거일에 국민투표를 동시 실시한다. 4개월 넘게 캠페인 기간이 있었지만 정당과 시민사회의 조직적인 찬반 캠페인은 없었다. 시민의회는 2004년 12월에 최종권고안을 내고 해산됐고 거대 양당은 못마땅해했지만 반대 캠페인까지 전개하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단기이양투표제가 국민투표에서 유효투표의 58%에 달하는 찬성표를 받은 건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고든 캠벨 수상이 시민의회를 출범시킬 때 자유당지도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국민투표 통과요건을 투표자의 60% 이상 찬성과 60% 이상 주에서 과반수 찬성으로 공표했기 때문에 부결 처리됐다. 안타깝기 짝이 없다.
시민의회가 정책권고안을 결정할 때에는 사회적 합의를 지향하는 시민의회의 속성상 가급적 가중다수결요건(60%, 2/3, 70%, 3/4, 80% 등)을 걸어서 시민의회가 최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시민의회의 최종권고안을 찬반국민투표나 국회 표결에 붙일 때에 가중과반수 찬성을 요구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시민의회가 만든 입법권고안도 일반적인 법안과 마찬가지로 선거의회나 국민투표를 단순과반수로 통과하면 된다고 봐야 한다. 헌법은 개헌안에 대해서도 국민투표에서 단순과반수 찬성을 요구할 뿐이므로 시민의회의 정책권고안을 달리 취급할 이유가 전혀 없다.
독자들 중에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2001년 총선결과(77석 대 2석)에 놀란 분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실은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시의회의 일당지배현상이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았다. 그나마 우리나라의 지방의회는 총의석수의 10%(서울의 경우 11석)를 병립형 비례대표의석으로 배정하게 돼 있어서 거대양당이 지역구에서 서너 석밖에 못 건져도 추가로 5,6석 정도를 배분받기 때문에 77대 2만큼 차이가 나진 않을 뿐이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서울시의회에서도 2022년 지방선거를 제외하고는 거대양당이 번갈아가며 90% 넘게 의석을 싹쓸이해왔다. 다시 말해서 소선구제에 고유한 1당 싹쓸이와 1당 독재는 영남과 호남은 물론이고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의 시도의회에서도 2001년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처럼 다반사로 벌어졌다.
추첨시민의회 구성해 선거제개편 논의 맡기자
실은 우리나라 국회가 수도권과 영호남 광역의회의 너무나 현저하고 너무나 고질적인 일당독재현상을 잘 알면서도 광역의회 선거제도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30년을 보냈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무서운 일이다. 입법기관으로서 국회의원의 직무유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나라 국회는 각급 의회마다 다른 선거제도를 법제화해서 정신분열이 일어날 정도다. 국회의원 선거는 2020년 선거법 개정을 통해 혼합연동형비례대표제로 바꿨으나 광역의회 선거는 여전히 소선거구제 90%에 병립형 비례대표 10%를 가미하고 있으며 기초의회는 중선구제(2~4인) 90%와 병립형 비례대표 10% 혼합선거제도를 유지한다. 똑같이 선거로 뽑으면서 각급의회마다 선거제도를 뿔뿔이 달리 정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국회는 각급 의회마다 다른 선거제도를 만들어놓은 장본인이지만 이에 대해 특별한 문제의식을 갖고 제도개선에 나설 의지를 보인 바 없다. 선거제도 관련해서 또 다른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우리나라 국회는 각급 의회의 상이한 선거제도를 가장 민주주의적인 선거제도로 통일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했다. 특히 수도권과 영호남 광역의회에서 계속된 일당의 의석 싹쓸이 및 의회독재 현상을 바로잡았어야 했다. 실은 선거제도 개혁방안을 국회와 국회의원이 객관적으로 논의하기에는 당사자성이 너무 강하다. 거대 양당은 20대 국회에서 간신히 만들어낸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위성정당을 만들어서 무력화시킨 전비도 있다. 이번에도 국회는 선거법개정 법정시한을 도과했으며 거대 양당은 아직까지도 선거법개정 당론을 마련하지 않았다. 어떻게 봐도 우리 국회와 거대 양당은 선거제개혁 무자격자다.
그래서 말이다. 21대 국회가 하루바삐 위성정당금지조항을 입법하고 내년 총선은 현행 연동형비례대표제로 치르겠다고 선언해야 마땅하다. 동시에 추첨시민의회를 구성해서 선거제도 개편작업을 맡기고 그 권고안을 최대한 존중하고 수용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부디 21대 국회가 캐나다의 선거제개편 BC 주 시민의회 사례에서 신선한 자극과 유익한 시사점을 받기를 기대한다. 시민의회의 강점은 일반시민들이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심도 있게 정책현안을 학습하고 심의한 후 최종발언권을 행사하는 데 있다. 한마디로 시민의회는 보통사람과 일반시민에 대한 전문가와 엘리트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고 전문가와 엘리트에 대한 보통사람과 일반시민의 지배를 가능하게 만든다. 시민의회는 중대정책현안에 관해서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권고적 결정을 현실화하는 민주주의의 혁신도구다. 시민의회에 의한 선거제도와 정치제도 개혁은 앞으로 누구도 거역 못할 민주주의의 새 표준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여기서 앞장서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