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주의의 부활…2030 남성·6070 세대 우경화 분석
세대별 삶의 양식 달라도 공통점은 상실감
선진국 반열에 태어나 무한 경쟁에 내몰려
양극화 과정에서 소외된 서러운 노인 세대
시민성 전가 말고 국가가 치유책 마련해야
우경화는 분노의 문제 아닌 방향 잃어버린 생존의 언어
극우주의가 돌아왔다. 한국만이 아니라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 내로라하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지점을 유념한 채 한국의 우경화 경향을 살펴보면 몹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도 드러났듯 한국의 우경화를 대표하는 세력은 20-30 남성과 60-70 세대다. 자유대학 시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부 10대들이 포함돼 있지만 그들은 대선 통계에는 잡히지 않으니 정확한 실태를 알 순 없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평균적 이야기를 들어 보았을 때 상당히 우경화됐다는 짐작만 해볼 뿐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그곳에 있다. 저 집단들은 각기 아주 다른 삶의 양식을 살아온 세대지만, 같은 경로로 우경화된다. 그 공통분모가 '상실감'이라고 보이지만, 그것이 전체를 설명하는 하나의 맥락으로 수렴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의 세대는 각자의 방식대로 이 시대를 느꼈지만, 비슷한 상실감에 도달했다고 보인다. 60-70대는 베이비 부머 세대로 후진국이던 한국에서 태어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경제 부흥기를 이끈 세대. 20-30대는 이미 선진국 반열에 들어간 나라에서 태어나 본격적으로 가속화되기 시작한 입시 경쟁과 취직 압박을 느낀 세대. 10대는 막연하게 남아 있던 개별성에 대한 차별이 꽤나 제거된, 00년대의 우리들이 서구 유럽을 바라볼 때 느꼈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라난 세대로 평균을 정의하면 너무 과한 일반화일까?
그런 양상은 그들이 모여서 시위 집회를 하는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되도록 서로 섞이지 않는다. 그들끼리도 경멸하거나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도 관측된다. 60-70 극우들은 그나마 젊은 세대들을 환영하지만, 20-30은 자리조차 따로 마련해 달라고 할 만큼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범민주세력의 빛의 집회에서는 어디에 속해도, 어디에 서있어도 연대하는 마음과 서로 조심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들이 대통령이 바뀌고 나서도 윤 어게인을 외치며 결집해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윤석열이 좋아서가 아닌 것 같다. 서로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사람은 상호 간에 기본적인 애정이 샘 솟기 쉽다. 오죽하면 밈이 있겠는가. "아! XX님도 장원영 좋아하시는구나!!" 이 말투는 소수 취향의 덕후들이 자신의 관심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급발진 할 때의 전형적 멘트다.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은 바로 현실의 부정이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만 표출이다. 자기들 스스로도 정확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서로 싫어하고, 이해가 안 됨에도 불구하고 모여서 같은 적(?)을 향해 외친다. 남을 조롱하고, 과격한 언어를 쏟으며 기쁨을 느낀다. 일종의 효능감이 있으니까.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다들 나만큼 힘들었다는 걸 자각하면 낯 간지럽긴 해도 기분이 좀 나아진다. 무엇을 주장하는가보다 모여서 외친다는 행위 자체가 주는 위안도 있다. 그 시류에 편승해서 인기를 얻거나, 지지를 끌어내려는 종교집단이나 인플루언서들이 함께하니 인지 효과는 더욱 상승한다. 심지어는 한 나라의 제1 야당이라는 집단이 나서서 극우적 발언과 민주주의의 상식에 어긋나는 선동을 통해 지지율을 얻으려 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더 이상 버틸 자리가 없다는 절규
일부 극우적 집단 지지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들에겐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통계를 분석해 보면 더 잘 드러난다. 민주진영 측 시위에 있는 사람들의 종합적인 의견들은 어떤 방향성과 결을 가진다. 즉 조금 느슨하긴 해도 한 가지 방향성, 민주주의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공유된 마음이 있다. 반면에 극우 집단의 사람들을 인터뷰해 보면 처음엔 선전의 언어가 튀어나오다가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튀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왜곡된 개인사나, 정말 개인적이어서 공감해 주기 어렵거나 부끄러울 정도의 의견들이다. 그 방향이 일치하기라도 한다면 이건 사회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들 사이엔 그런 것이 거의 없다. 오죽하면 늦은 시위가 자정을 넘겨 이어지면 윤어게인 태극기들끼리 멱살을 잡고 싸우는 일까지 관찰된다.
윤 어게인에서 일관된 무언가를 주장하는 이들은 갈라치기를 이용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자들뿐이다. 그나마도 앞에 나서서 이슈를 끈 이들을 오래 살펴보면, 사건마다 손바닥 뒤집듯이 주장을 바꾸는 일이 많다. 이전 주장이 인기를 얻기 위해 입에 발린 말이었음을 스스로 행동으로 증명한다. 나머지의 의견은 너무 개인적이고, 너무 사소해 사회와 상관없거나, 우연이 겹친 일들이 많아서 하나로 통합된 사회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들의 의견에서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지금 그들이 불만이 있고, 많이 화가 나 있다는 정도다. 그들에게 극우는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더는 버틸 자리가 없다는 절규다.
그들이 절망한 원인은 무엇일까. 도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을까?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도, 거리로 뛰쳐나올 만큼의 에너지는 어떻게 축적되었을까? 커다란 에너지의 형성에는 반드시 단순하고 공명하기 쉬운 원동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모호함을 오래 바라보며 습관처럼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을 찾으려 노력해 봤다.
신자유주의로 공동체 해체와 인간 소외의 그림자
10-30 여성들과 소통하다 보면 흔히 받는 오해가 있다. 평균보다 큰 덩치에 힘 좋은 남성이라면 밤거리를 걷는 것이 두려울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아니다. 남성도 두렵다. 어둠은 본연적인 공포를 자극하고, 일부 감각의 차단은 인지 대상이 바뀌었음을 예민하게 전달한다. 그 평소 같지 않음은 불안을 부르고, 오래 마음의 손잡이를 놓치고 나면 불안은 두려움으로 진화한다.
평균보다 힘이 세다는 것은 단지 발생 가능한 사고의 개수를 약간 줄여줄 뿐이다. 길거리에 술 취한 취객이 난동을 부린다거나, 갑자기 남성 한두 명이 뛰쳐나오는 상황 정도는 어떻게든 대처가 가능한 정도로. 그런 방지 가능성이 마음을 안정시켜 줄 작은 여유를 만들어 주고, 스스로 대처 능력에 대한 자각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또 다른 근거 혹은 감각을 만들어 줄 뿐이다. 그마저도 4-5명의 쇠파이프 든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순식간에 깨지겠지만… 쉬어갈 수 있는 구간이 있는 등산은 늘 계속된 긴장 속의 등산보다 수월한 법. 두려움에의 저항도 그런 면이 있을 뿐이다.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인지되지 못했을 때 더욱 두렵고, 두려움이란 단어조차 알지 못할 때 더욱 두려운 법이다. 두려움과 그로 인한 불안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귀신이 나올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은 살아온 기간이 길어질수록 없어진다. 자신이 믿고 있는 인지에 기반한 논리와의 핍진성 비교를 통해 현실적인 감각으로 안착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이고 현실 위에 올려놓으면 대다수의 불안과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특정 감정에 휩쓸린 것이었음을 쉬 알게 된다.
그럼 이런 문제는 어떤가? 신자유주의는 삶을 해체한다. 각개의 삶과 공동체성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진 않더라도 돈의 방향으로 이끌어 결국 스스로 내려놓게 만든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돈 버느라 만날 수 없다는 핑계를 댔는가. 친구, 가족, 연인, 반려동물, 반려식물과 금붕어 거북이들에게 "돈 벌러 가야 해, 미안해."라고 하게 되는지, 돈 버는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쉽게 양해를 해주게 되는지. (설령 그게 장례식이라 하더라도.) 동네 길고양이가 내 무릎 밑을 툭 치고 지나가는 희귀한 순간에도 마음을 쉬게 하지 못하고 지하철로 달려간다. 그런 현상이 사실 우리의 깊은 불안을 유발하는 것으로 작용한다면, 우리 중 얼마나 일상적인 바쁨, 갈망이 일으키는 불안의 씨앗을 제대로 감지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 그 누구도 온전히 혼자 서지 못하는 도시에 놓여 있다. 어떻게든 우리는 남의 노력 위에 서 있다. 돈으로 해체되어 버린 보육, 보호, 안전, 시민성 등을 구매하는 동안, 각각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기란 어렵다. 돈만 벌면 다 해결된다는 태도로 마음을 외면하는 삶을 산다. 오죽하면 자신의 꿈과 조그만 취미 생활마저도 할 시간이 없다!
그런 곳에서 당대 기업들의 정교한 마케팅 기술은 이미 소외된 인간을 욕망의 방향으로 더욱 부추긴다. 질투를 유발하고, 소유욕을 자극하고, 비교 우위를 점하라고 쓸데없이 세밀한 감각을 전시한다. 돈이 썩어 나는 부자들이야 실밥이 살에 닿지 않는 재봉법을 30년간 연마한 장인의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만든 옷에 2000만 원을 쓰는 것이 별일 아니겠지만, 누군가에겐 문제가 된다. 사회에서의 위치, 상황, 삶 등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런 욕망은 다른 긴급한 생활의 필요보다 얼마나 무용한가.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명품을 사고 구매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어차피 속도 제한이 있는 나라에서 다운그레이드된 스포츠카를 산다. 그들이 거기에서 얻은 것은 실용이 아닌 효용. 남들과의 비교우위를 통해 얻는 유사 자기가치 증명이다.
거기에서 세계적인 경향을 본다. 세계의 유망 산업들은 자기 발전을 위해 더더욱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더더욱 자본의 구조 안에서만 살게 만들고, 더더욱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을 자극한다. 바깥의 날씨보다도 인스타의 유행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도시의 인간들을 보라. 그들은 이미 반 이상 SNS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길을 걸을 때도 앞을 보지 않고 좀비처럼 걷는다. 도파민과 자극과 우월감을 찾아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21세기의 좀비. 우리가 간과한 게 있다면 좀비 영화에서 무조건 '그들'로 표시되는 좀비들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느껴 인간같은 존재가 된 영화 속 좀비처럼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좀비들은 서로 모여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광기의 집회를 벌인다.
2030, 스스로 성취한 효능감 없이 점수에만 연연하기 시작한 세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극우현상에 대한 단초를 조금 살펴봤다. 내친김에 조금 더 가까이 날아들어 한국의 세대론에 대한 해석도 해보자. 왜 20-30은 남-녀로 나뉜 정치성향을 보이는가. 왜 40-50은 그런 일이 적은가. 거기에는 효능감의 차이가 존재한다. 40-50은 사회적으로 전성기. 자기의 힘과 능력을 실감하는 성숙기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어쨌든 누구든 이 시기쯤 되면 자신의 결을 이해하고 하나쯤 사회에서 통하는 자기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두려움은 자신이 믿는 다른 신념에 의해 쉽게 사그라든다.
거기에 다른 특성 하나가 더 있다면 40-50이 민주화의 과정, 중진국으로 분류되던 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을 목격한 세대라는 점이다. 이들은 아주 풍족한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아이엠에프 외환 위기를 보았고, 다시 극복해 내는 과정에서의 금 모으기와 국가적 명운을 걸고 다시 비상하는 나라의 모습을 보았다. 또 한편으론 이명박이 서울특별시에 버스전용 중앙차선을 설치하는 혼란과 위기 그 유용성이 드러나는 과정을 겪었다. 당연히 광우병 집회와 박근혜 탄핵을 통해 자신감을 축적한 것도 시대정신을 이루고.
20-30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이미 거의 선진국인 나라에서 태어났다. 위기의 극복 과정은 간접 경험하였고 직접 경험한 이들의 자랑은 고깝게도 들린다. 구체적인 국가적 발전과 효능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를테면 2010년대의 신도시 건물 양식이 2020년대에도 거의 동일하게 지어지는 것처럼, 그들의 삶에는 국가의 점진적 발전 사례가 많지 않다. 그들에게 사회는 이전 세대들이 느낀 것보다 더 완고하고 딱딱한 곳일 수 있다. 거기에 안정된 사회가 가지는 또 다른 특성인 기득권을 얻기 위한 과도한 경쟁이 과열된 시기를 살았다. 더 크게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효능감은 느끼지 못한 채 사회에서 부여하는 점수에만 연연하기 시작한 본격적인 세대다. 학교 안에 점수에 초연한 학생의 비율은 급감했다. 아니 이젠 점수 1점, 2점에 우는 아이들 마저 있다. (친구들이 옆에 있는데도!) 점수는 그저 사회라는 변화무쌍한 곳이 나에게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부여한 숫자일 뿐, 나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는 아이들은 이제 거의 없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대 여섯 명은 남아 있었는데… 나의 기준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한 명도 남지 않은 교실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다.
같은 선상에서 20-30 여성의 효능감이 더 나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은 문재인 정책의 혜택을 정면으로 얻어낸 세대다. 2010년대는 여전히 남아있는 여성차별적인 분위기를 타파하고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던 시기다. 박근혜는 여성이 대통령이 됐다는 사건으로, 문재인은 보다 개선된 차별 금지와 보다 포괄적인 여성정책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불안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생긴다는 같은 원리를 그대로 적용해 보자. 그 과정에서 양쪽 진영의 과격주의자들이 남성우월주의, 여성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서로 이빨을 드러내고 싸운 사건들이 잦았다. 결과적인 변화를 얻은 쪽과 좌절한 쪽의 마음은 어떤 방향으로 향했을까?
당시의 갈등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한 것이 지금의 정치적 성향 갈림에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짐작된다. 잘못을 바로 잡는 과정에도 절차와 도덕이 있어야 했다. 상대적인 이득을 보던 이들이 느낄 박탈감 또한 고려했어야 하고, 이전에 받았던 차별을 지금의 이득으로 돌려주는 정책들은 최대한 지양돼야 했다. 당시에 여자 직원에게만 '서윗(sweet)'한 40대가 유행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 개인들이 특별히 나빴다고 하긴 그렇지만, 그렇게 행동해야 '센스 있는 남자'로 인정받던 조직문화는 누군가에게 역차별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40대가 지금의 40-50인 것을 생각해 보면 20-30 세대의 종합적인 불편함, 박탈감, 불안의 원인이 실제 사회의 어디에서 축적되었을지에 대한 동역학적 근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60-70은 원래 서러운 나이다. 인생에서 이룬 것들이 건강과 함께 서서히 내려간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지금의 자기 효용이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많이 한 것 같은데 양극화의 과정에서 소외돼 버린 사람들이 존재한다. 시위에 나선 대다수의 사람이 주최 측이 주는 5만 원이 아쉬운 사람인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기본적으로 발전을 함께 공유받지 못한 집단이 더한 소외와 무력감 반발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어디에서도 자신을 써주질 않는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다.
유비와의 첫 만남에서 어필하던 황충처럼 "제 두 팔에는 아직 쌀 두 섬을 들 힘이 남아 있고…"라는 마음인데 쓰일 곳도 없고 나의 삶은 불안하다. 그런 불안함을 잘 달래주고 이용하는 집단들이 있으니 사이비적 안정감을 주는 무리들이다. 남의 불안을 자신의 영향력 키우기에 쓰는 무리들.
신자유주의적으로 이런 일들에 대한 책임을 묻자면 속은 이들이 모두 감당해야 할 일이라 치더라도, 사회적으로 보면 국가의 책임도 막중하다. 이들의 힘을 바른 방향으로 국가에 기여할 방법을 마련해주지 못하고 소외시킨 것은 당연히 사회나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일자리를 개인의 힘으로 만드는 것은 미국 같은 사회에서도 유니콘 같은 일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충분히 일할 능력과 힘이 있는 데 사용되지도 못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몇 년씩 재수 삼수를 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도 국가의 책임이 일부 있다. 양질의 일자리 제공과, 대, 중, 소기업 일자리간 격차 해소는 국가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파편들이 모여 지금의 극우화의 바탕이 되고 있다.
남을 위해 내민 손이 결국 자신을 돕기 위한 손
우리가 멈칫하느라 혹은 괜히 나서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멈춘 호의가 주변 사람들에게 절망이 됐다. 이제 절망과 불안을 혼자 이겨내기 힘든 사람들은 도저히 개인으론 감당 못할 것 같은 격차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죽어가길 원치 않는다. 맘껏 화라도 내보자고 나섰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은 사람, 실상은 인간 자체가 가지는 동력 혹은 정치 자산인 표만을 원하는 사람들의 손이라도 기꺼이 잡는 것이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껴지지만, 당장에 그 손마저 놓으면 그런 효용성이라도 없으면 자기 자신은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로 느껴지니까.
극우화는 시민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책 실패의 결과다. 그 보잘것없음이 인간 자체로 가지고 있는 부조리라는 것을 혼자서 받아들이는 것은 초인적인 일이다. 니체라고 온전히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소외된 이들에게 사회나 연대, 사회적으로 지지받을 수 있는 토대마저 해체해 버리고 나면 마음속엔 무엇이 남을까? 끝도 없는 불안감과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가.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을 되돌려 달라며 개천절, 하늘이 열린 날을 까마득한 어둠으로 채운다.
우린 여태껏 세련되게 사람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정화조차 하지 않고 좀 더 약한 고리를 오염시켜 왔다. 이제 인과응보의 단계다. 처음엔 자살률이 오르는 것으로 드러나던 현상이 이제는 극렬한 반사회적 시위로 나타나고 있다. 그나마라도 스스로마저 스스로를 버리는 대신, 어떻게든 살려고 생명의 길로 돌아선 것이니 다행이라 말해야 할까. 그저 손놓고 상대편 탓, 일부 시민 탓을 하기 보다 이유도 모른채 싸이는 불평등과 분노를 사회적으로 잠재울 공동체 재건과 삶의 여유 회복에 더 힘써야 하지 않을까? 뜬금 없지만 그래서 젊은 이들이 먼저 기본 소득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기본소득당의 기본 모토에 격한 찬사를 보낸다. 서툴더라도 미래를 살리는 논의는 그런 곳에서 피어난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