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범 주목!…감옥서 죽은 조직범죄 화신 크레이 형제

범죄는 아무리 포장해도 법치가 승리 교훈

낮엔 정장 차려입고 유명인들과 교류 즐겨

밤엔 런던 뒷골목 장악하는 무법자로 변신

범죄 조직을 정식 사업체인양 체계적 운영

살인죄로 중형 받아 형제 다 감옥에서 마감

2025-09-29     김성수 시민기자

1933년 10월 24일 런던 동쪽 끝 호클스턴 지역에서 바이올렛 리와 찰스 크레이 부부 사이에서 쌍둥이가 태어났다. 10분 차이로 레지가 먼저, 이어 로니가 세상에 나왔다. 누가 알았으랴, 이 귀여운 쌍둥이들이 훗날 1950~60년대 런던 이스트엔드 조직범죄의 최고 주역이 되어 영국 사회를 뒤흔들 줄을.

로니(로널드) 크레이(1933~1995)와 레지(레지널드) 크레이(1933~2000) 형제는 단순한 깡패가 아니었다. 이들은 영국 범죄사에서 가장 '품격 있는' 악역을 연출한 인물들이다. 마치 셰익스피어 극의 악역처럼 말이다.

 

1969년 3월 5일 데일리 미러에 보도된 크레이 형제의 형사 재판.(데일리 미러)

가난한 이스트엔드에서 피어난 독버섯

크레이 형제가 태어난 이스트엔드는 당시 런던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거친 동네였다. 2차 대전 중에는 독일 폭격기들의 주요 표적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쌍둥이들은 어려서부터 주먹으로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

두 형제는 15세 때부터 권투를 시작했는데, 이때 보여준 폭력성은 이미 범상치 않았다. 특히 로니의 경우 정신적 불안정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더욱 극단적인 행동들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흥미롭게도 이들의 어머니 바이올렛(1909~1982)은 두 아들을 끝까지 감쌌다. 아들들이 어떤 짓을 저질러도 "우리 애들은 착한 아이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맹목적 모성애는 크레이 형제의 자기합리화에 큰 역할을 했다.

 

1968년 재판 몇 달 전 레지널드 크레이(왼쪽에서 두 번째). (위키피디아)

신사다움과 잔혹함의 기묘한 조합

크레이 형제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이중성이었다. 낮에는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신사처럼 행동하던 이들이, 밤이 되면 런던 뒷골목을 장악하는 무법자로 변신했다. 이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특히 이들은 유명인사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권투선수 소니 리스턴(1932~1970), 배우 조지 래프트(1901~1980), 그리고 당시 노동당 의원이었던 톰 드리버그(1905~1976) 등과 어울리며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했다. 이런 행태는 당시 계급사회였던 영국에서 하층민 출신이 상류층에 도전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기도 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크레이 형제는 자신들의 나이트클럽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극진히 대접했는데, 어떤 이는 "세상에서 가장 정중한 갱스터들"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정중함' 뒤에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로니와 레지 크레이의 무덤.(위키피디아)

영국식 조직범죄의 교과서

크레이 형제의 범죄 제국은 보호세 갈취, 무장강도, 방화, 폭행, 그리고 두 건의 유명한 살인사건을 포함했다. 하지만 이들의 진짜 '혁신'은 범죄조직을 마치 정당한 사업체처럼 운영한 일이었다.

이들은 이스트엔드에 '펌'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범죄활동을 벌였다. 펌의 구성원들은 마치 회사원처럼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고, 심지어 '월급'까지 받았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조직운영 방식이었다.

또한 이들은 나이트클럽과 술집을 소유하며 겉보기에는 합법적인 사업가로 활동했다. 대표적인 곳이 '엘 모로코' 클럽이었는데, 이곳은 당시 런던 사교계의 사랑방이 되기도 했다. 이는 훗날 전 세계 조직범죄의 모델이 된 방식이다. 즉, 크레이 형제는 '깔끔한 범죄'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찰리와 크레이 쌍둥이의 부모인 바이올렛과 찰스 크레이의 무덤.(위키피디아)

쌍둥이의 서로 다른 성격과 운명

흥미롭게도 일란성 쌍둥이였던 두 형제의 성격은 상당히 달랐다. 레지는 상대적으로 이성적이고 계산적이었던 반면, 로니는 충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했다. 레지가 '사업가형 범죄자'였다면, 로니는 '광기의 범죄자'에 가까웠다.

로니는 1960년대부터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종종 환청을 들었고,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이런 정신적 불안정이 1967년 조지 코넬(1941~1967) 살인사건으로 이어졌다. 로니는 라이벌 조직의 간부였던 코넬을 술집에서 대낮에 총으로 쏴 죽였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대담한 범행이었다.

한편 레지는 1967년 잭 '모자' 맥비티(1932~1967)를 살해했는데, 이는 좀 더 계획적인 범행이었다. 맥비티가 크레이 형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레지의 아내 프랜시스 크레이의 무덤.(위키피디아)

법치주의의 승리, 그러나…

1969년 3월 크레이 형제는 결국 라이벌 조직원들의 살인죄로 재판정에 섰다. 담당 검사였던 케네스 존스(1918~2000)는 이들을 법정에 세우기 위해 무려 5년간 수사를 진행했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들은 충격적이었다. 증인들은 크레이 형제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증언했고, 이들의 범죄제국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는지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로니는 26년간 복역 후 1995년 심장마비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고, 레지는 31년간의 수감 생활 후 2000년 방광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형제 모두 감옥에서 마지막을 맞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이들의 몰락은 영국 법치주의의 승리를 상징한다. 아무리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어도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원칙이 관철됐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화려한 최후'는 오히려 전설을 더욱 공고히 했다. 두 형제의 장례식 모두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특히 로니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몰려들어 마치 국가 원수의 장례식 같았다고 한다.

 

크레이 형제. (World History Archive / Alamy Stock Photo)

대중문화 속 영원한 악역 스타

크레이 형제가 영국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대중문화 영역이다. 이들은 살아생전부터 이미 전설이 되었고, 사후에는 수많은 영화, 책,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됐다.

1990년 '크레이'라는 영화가 제작됐는데, 게리 켐프(1959~)와 마틴 켐프(1961~) 형제가 크레이 쌍둥이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크레이 형제의 전설을 대중문화에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15년에는 톰 하디(1977~)가 일인이역으로 두 형제를 모두 연기한 '레전드'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크레이 형제를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로맨틱한 악역'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마치 로빈 후드처럼 '의리 있는 도적'의 이미지로 각색되곤 한다. 이는 영국 대중들이 권위에 대한 은밀한 반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화적 현상이기도 하다.

 

로니 크레이가 조지 코넬을 살해한 런던의 화이트채플 로드에 있는 블라인드 베거 펍.(chrisdorney / Shutterstock)

영국 사회의 어두운 거울

크레이 형제 현상을 단순히 범죄사의 한 페이지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들은 1960년대 영국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계급갈등은 여전했고, 겉으로는 신사다움을 추구했지만 속으로는 폭력이 잠재되어 있던 시대. 크레이 형제는 바로 그런 시대정신의 어두운 화신이었다. 특히 이들이 보여준 '가짜 신사다움'은 당시 영국 사회의 위선을 상징한다. 겉으로는 품위와 예의를 중시하면서도, 뒤로는 식민지 수탈과 계급 억압을 일삼던 영국 지배층의 모습과 크레이 형제의 행태 사이에는 묘한 유사성이 있다.

또한 이들이 유명인사들과 어울리며 사회적 지위를 추구한 행태는 당시 영국의 강고한 계급제도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기도 했다. 물론 그 방식이 극도로 왜곡되고 폭력적이었다.

 

크레이 형제의 거리 예술 벽화. (Matt Brown) 

현대적 의미와 교훈

크레이 형제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러 시사점을 던진다. 우선 조직범죄의 '기업화' 측면에서 이들은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현재 전 세계 조직범죄가 보여주는 체계적이고 기업적인 운영방식의 원형을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범죄자의 '브랜딩'과 '이미지 메이킹' 측면에서도 이들은 혁신적이었다. 자신들을 단순한 깡패가 아닌 '신사 갱스터'로 포장하여 대중의 관심과 동정을 얻어낸 것은 현대의 미디어 전략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교훈은 역시 법치주의의 승리다. 아무리 권력과 돈이 있어도, 아무리 대중적 인기가 있어도, 범죄는 결국 처벌받는다는 사실이다.

 

크레이 형제. (findmypast)

전설은 죽지 않는다

크레이 형제는 죽었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여전히 살아 숨쉰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이들은 영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아무리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포장되어도, 범죄는 결국 범죄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동시에, 대중들이 왜 이런 '매력적인 악역'에 끌리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크레이 형제의 진짜 유산은 범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환상과 집단 무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환상은, 아직도 완전히 깨지지 않았다.

결국 크레이 형제는 영국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자, 동시에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범죄와 폭력이 어떻게 '낭만'으로 포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포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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