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이 번 통일교가 본받아야 할 사례 '백하우스'

그 돈으로 권력 탐하기보다 다양한 학문 후원

퀘이커교 발판 19세기 영국 은행업 휩쓸어

합병한 바클레이은행 지금도 영국 4대은행

신앙-자본주의 절묘한 결합…비결은 신뢰

2025-09-25     김성수 시민기자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종교집단?

17세기 중엽 영국 랭커셔에서 시작된 종교집단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종교친우회'라고 불렀지만, 세상은 그들을 '퀘이커'라고 했다. 왜냐하면 신의 말씀에 떨린다며 몸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만 떤 게 아니다. 이들은 영국 경제도 흔들어놓았다.

그 중에서도 백하우스 가족은 퀘이커 성공 신화의 대표 주자였다. 이들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는 예가 있다. 1896년 백하우스 은행이 바클레이 은행과 합병될 당시, 이들은 역사적인 대합병으로 세 번째로 큰 은행이 됐다. 신앙심도 깊고 돈도 많이 번 완벽한 가족이었달까.

 

영국 더럼 달링턴의 백하우스 은행(현 바클레이즈) 이미지.(quakersintheworld)

시작은 삼베에서, 제임스 백하우스 (1721~1798)

모든 위대한 이야기는 소박한 시작을 갖는다. 제임스 백하우스(1721~1798)는 영국 더럼주 달링턴에서 삼베 제조, 가공업으로 부를 쌓았다. 당시 영국에서 삼베는 금과 같았다. 면화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삼베는 고급 직물의 대명사였으니까.

1759년 제임스는 왕실거래소 보험회사의 대리점을 확보해, 보험업에 발을 담궜다. 하지만 진짜 승부수는 따로 있었다. 1774년 그는 장남 조나단(1747~1826)과 함께 J&J 백하우스라는 은행을 설립했다. 4년 후에는 조카 제임스(1757~1804)까지 합류시켰다.

삼베 장사에서 은행업으로 업종 전환일까? 요즘으로 치면 치킨집 사장이 투자은행 차린 격이다. 하지만 당시 퀘이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은 퀘이커 모임에서 만난 동료들과 사업 인맥을 구축했고, 철저한 신용을 바탕으로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스티븐 루싱턴, 존 이어들리-윌모트 경, 조나단 백하우스(1779~1842)와 루이 셀레스트 레세스네, 그리고 1840년 영국 및 외국 노예제 폐지 협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 참고로, 이 그림은 훨씬 더 큰 그림에서 발췌한 것. (위키피디아)

가문의 영광, 은행왕이 된 아들들

제임스의 아들 조나단 백하우스(1747~1826)는 아버지 사후 은행의 실질적인 경영자가 됐다. 그는 단순히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은 게 아니라 대폭 확장했다. 더럼주 전역에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편, 에드워드 백하우스(1781~1860)는 영국 선더랜드에 백하우스 은행 지점을 설립했다. 그는 또한 선더랜드에 애시번 하우스라는 저택을 지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퀘이커답게 검소하게 살자면서 저택은 왜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검소함도 품격 있게'라는 철학이었을 것이다.

 

에드워드 백하우스. (alamy)

식물 사냥꾼들, 돈만 센 게 아니었다

백하우스 가문의 진짜 매력은 돈만 벌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진정한 르네상스형 인간들이었다.

제임스 백하우스 2세(1794~1869)는 식물학자이자 선교사로 호주에서 활동했다. 그는 돈 벌 생각은 접어두고 남반구 식물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할아버지는 퀘이커 신앙 때문에 랭커스터 감옥에서 순교자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가문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아들 제임스 백하우스 3세(1825~1890)는 식물학자, 고고학자, 지질학자를 겸했다. 영국 요크의 로렌스 스트리트 학교(훗날 부담 학교)에서 교육받은 그는 묘목재배, 식물수집, 암석작업, 고산식물, 헤더, 양치류, 난초, 네리네 등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제임스 백하우스 4세(1861~1945)는 박물학자로, 특히 조류학 분야에서 유명했다. 이쯤 되면 가문전체가 '백과사전적 인간'들이었다고 봐야 한다. 돈 버는 것도 모자라 학문까지 섭렵하다니, 완벽주의자들이 따로 없다.

 

제임스 백하우스 2세.(quakersintheworld)

다시 정리해보면:

제임스 백하우스(1721~1798) - 가문 창시자
제임스 백하우스(1757~1804) - 조카
2세 제임스 백하우스(1794~1869) - 식물학자/선교사
3세 제임스 백하우스(1825~1890) - 식물학자/고고학자/지질학자
4세 제임스 백하우스(1861~1945) - 박물학자/조류학자

퀘이커 네트워크의 힘

백하우스 가문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퀘이커 공동체의 강력한 연대에 있었다. 퀘이커 가문으로서 그들은 결혼을 통해 네트워크를 확장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피스, 바클레이, 거니 가문과 결혼하며 사업을 키워나갔다.

이는 단순한 정략결혼이 아니었다. 당시 퀘이커들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끼리만 결혼하는 철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퀘이커 집안들이 하나같이 사업을 잘했다. 다비 가문은 제철업에서, 피스 가문은 스톡턴-달링턴 철도에서, 로이드와 바클레이는 은행업에서, 캐드베리와 프라이는 초콜릿에서, 라운트리는 제과업에서, 클라크스는 신발 제조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쯤 되면 의심스럽다. 정말 신앙심 때문일까, 아니면 사업수완이 뛰어났을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퀘이커의 정직함과 검소함이라는 가치가 사업에서 신용으로 이어졌고, 공동체 의식이 강력한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영국 버밍엄에 있는 최초의 로이드 은행 표지.(quakersintheworld)

최후의 승리, 바클레이와의 합병

1896년, 백하우스 은행은 바클레이 은행과의 역사적인 합병에 참여했다. 이때 백하우스는 세 번째로 큰 은행이었다. 100여 년간 쌓아온 신용과 네트워크의 결실이었다.

합병 이후 백하우스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쌓아올린 금융 시스템과 사업철학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바클레이 은행이 지금도 영국 4대 은행 중 하나인 걸 보면, 백하우스의 유산이 얼마나 견고했는지 알 수 있다.

 

영국 우리동네에 있는 바클레이 은행.(김성수 시민기자)

신앙과 자본의 기묘한 조화

백하우스 가문의 이야기는 신앙과 자본주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이들은 검소함을 추구하면서도 부를 축적했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공동체를 중시했다. 종교적 신념이 사업의 발목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성공의 발판이 되었다.

물론 21세기 시각에서 보면 아이러니한 면도 있다. 평등을 추구한다던 퀘이커들이 계급사회 영국에서 귀족 작위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축적한 부를 사회 환원에 쓰고, 학문과 예술을 후원한 점을 보면, 단순한 수전노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백하우스 가문은 결국 영국 근대화의 주역이었다.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자본을 공급했고, 철도와 보험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식물학과 자연과학 발전에도 공헌했다. 돈만 밝히는 속물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구현한 진정한 엘리트였다고 할까.

이들의 성공비결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신뢰'였다. 퀘이커라는 브랜드 자체가 신용을 보증했고, 이것이 곧 경쟁력이었다. 오늘날 기업들이 '환경과 사회를 생각하는 착한 경영'이라는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경영'을 외치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신뢰가 최고의 자산이라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백하우스 가족에 관한 책.(김성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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