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삶, 긴 여운…귀족전유 시를 넘본 '흙수저' 존 키츠

마굿간 관리인 아들, 기성 문학계에 도전장

진보 사상가들과 어울리며 자유주의 성향 키워

"아름다움은 계급과 무관하다" 급진적인 주장

2025-09-18     김성수 시민기자

영국 역사상 가장 짧은 인생을 살며 가장 긴 여운을 남긴 남자가 있다.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 겨우 26년을 살았지만, 200년이 넘도록 영국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있는 이 남자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소설보다 극적이다.

 

윌리엄 힐튼의 존 키츠 사후 초상화, 1822년경. (위키피디아)

말단에서 시작된 위대함

키츠의 아버지는 마굿간 관리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주차장 관리원 정도의 신분이랄까. 어머니 역시 그 마굿간 주인의 딸이었으니, 키츠는 태생부터 '서민 중의 서민'이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시인이라는 직업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는데, 말단 집 아들이 감히 펜을 들었으니 기득권층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당연했다.

더욱 가혹한 운명은 키츠가 어릴 때 부모를 연달아 잃었다. 아버지는 낙마 사고로,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키츠와 형제들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지만, 그마저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하지만 키츠는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엔필드 학교 도서관의 책들을 모조리 읽어치우며 문학적 재능을 키워나갔다.

특히 보수 언론지 <블랙우드 매거진>과 <쿼털리 리뷰>는 키츠를 '하층민 출신의 건방진 놈' '약이나 빻던 놈이 시를 쓴다'며 혹독하게 비판했다. 키츠가 처음에 약사 견습생이었다고 조롱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너 같은 흙수저가 감히 문학을 논하냐'는 식의 노골적인 계급 차별이었다. 하지만 키츠는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아름다운 시로 답했다.

 

벤저민 헤이든이 1816년에 그린 키츠의 라이프 마스크. (위키피디아)

혁명가였던 시인

키츠가 살던 시대 영국은 산업혁명과 사회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이 끝나고, 민주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워털루 전투(1815) 이후 영국은 승전국이 됐지만, 정작 국민들의 삶은 팍팍했다. 산업혁명으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계급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키츠는 단순히 아름다운 시만 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친구인 리 헌트(Leigh Hunt, 1784~1859)를 통해 진보적 사상가들과 어울렸고, 자유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헌트는 정치적 급진주의자로 유명했는데, 키츠는 그의 영향을 받아 기존 질서에 의문을 품게 됐다.

키츠의 대표작 <미의 찬가>에서 "아름다움은 곧 진실이며, 진실이 곧 아름다움이다"라고 한 선언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기존 귀족 문화의 허위와 가식을 거부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나 느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기존 문학계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웬트워스 플레이스(왼쪽), 현재 키츠 하우스 박물관, 텐 키츠 그로브(오른쪽), 햄스테드 히스, 런던. (위키피디아)

사랑과 운명의 잔인한 장난

키츠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파니 브론(Fanny Brawne, 1800-1865)과의 사랑이다. 1818년 크리스마스, 키츠는 햄프스테드에서 18세 소녀를 만났다. 첫눈에 반한 키츠의 사랑은 그야말로 불타는 열정 그 자체였다. "당신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당신이 내 전부다." 그는 격렬한 고백이 담긴 편지들을 연일 보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키츠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했고, 파니의 어머니는 딸의 결혼을 반대했다. 설상가상으로 1820년 키츠는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당시 폐결핵은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어머니와 남동생 톰(Tom Keats, 1799~1818)도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키츠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것이다.

의사들은 따뜻한 기후가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탈리아 요양을 권했다. 1820년 9월 키츠는 친구 조지프 세번(Joseph Severn, 1793~1879)과 함께 로마로 떠났다. 파니와의 이별은 키츠에게 더 큰 고통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이름은 물 위에 쓰인 것이리라"며 자신의 무명을 걱정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름은 오히려 불멸이 되었다.

 

1850년경에 촬영된 파니 브론의 유리 사진.(위키피디아)

영국 사회를 바꾼 충격파

키츠의 죽음 이후 영국 문학계는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생전에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그의 시집이 재출간되면서 대중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아, 진짜 좋은 시는 혈통이 아니라 재능에서 나오는구나!'

특히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들어서면서 키츠의 영향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은 키츠를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Elizabeth Browning, 1806~1861)은 키츠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사랑시를 썼고, 단테 로제티(Dante Rossetti, 1828~1882)를 비롯한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키츠의 <이브 성녀의 전야>같은 작품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더 나아가 키츠는 '문학의 민주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더 이상 시는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쓸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는 영국사회 전반의 의식변화를 이끌어냈다. 요즘 말로 하면 '문화 계급장 떼기'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로마에 있는 키츠의 집. (위키피디아)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산

오늘날까지도 키츠의 영향은 계속되고 있다. 영국 교육과정에서 키츠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와 함께 필수 작가로 자리 잡았다. 그의 시구들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용되고 있다. '계절의 안개와 부드러운 풍요로움'으로 시작하는 <가을에게>는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시이고,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다'라는 <엔디미온>의 첫 구절은 거의 격언이 됐다.

키츠가 살았던 런던 햄프스테드의 집은 지금도 키츠 하우스 박물관으로 운영되며 연간 수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문학 성지가 됐다. 파니 브론과 함께 산책했던 햄프스테드 히스 공원도 '키츠의 산책로'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26년 짧은 인생을 살았던 이 남자의 흔적을 찾아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니, 문화관광 효과만 해도 연간 수십억 원에 달한다.

 

로마에 있는 키츠의 무덤. (위키피디아)

짧지만 강렬했던 혁명

키츠의 인생을 돌아보면 삶은 '길이가 아니라 깊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26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영국 문학사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계급사회의 벽을 시로 무너뜨렸고,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으며, 사랑의 진정성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어쩌면 키츠가 더 오래 살았다면 우리는 더 많은 걸작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짧은 생이 오히려 전설을 만들었고, 그 전설은 200년이 넘도록 영국인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결국 키츠는 증명했다. 진정한 예술은 출신이나 수명의 길이가 아니라, 순수한 열정과 재능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예술은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키츠의 시를 읽으며 위안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짧은 인생은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다" - 존 키츠

 

로마에 있는 키츠의 무덤 근처 벽에 있는 키츠의 부조.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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