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미-일 관세협상 문서화 단계서 사달
‘합의내용’ 대통령령 담으려하자 일 “내정간섭”
문제의 ‘미국산 쌀 75% 수입확대’ 해석 논란
미일 의사소통에 문제? 트럼프의 뒤통수치기?
한국에도 불똥 튈 수 있는 미 농산물 수입확대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미국정부가 자국산 쌀과 농산물에 대한 일본의 관세 인하(수입 확대) 관련 내용을 미국 대통령령에 명기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일본정부가 내정간섭이라 반발하며, 미국에 파견하려던 관세협상대표의 방미를 취소했다.
"내정 간섭" 반발, 출국 당일 돌연 방미 취소
29일 <일본경제신문> 보도에 따르면, 미국정부는 자국산 쌀을 비롯한 농산물에 대한 일본의 관세 인하를 대통령령에 명기하겠다는 안을 일본정부에 전달했고, 일본정부는 일본이 취할 조치를 미국 행정기관에 대한 지시내용을 담는 미국 대통령령에 명기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했다. 이에 따라 일본정부는 28일로 예정됐던 일본쪽 협상대표 아카자와 경제재정재생상의 방미를 출국 예정 당일 취소했다고 <닛케이>가 복수의 일본정부 관계자들 말을 인용해 전했다. 신문은 미국정부의 이런 조치가 지난 7월 합의한 미일 관세협상에서 농산물 등은 일본의 관세 인하 품목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한 합의내용과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한 <닛케이>의 문의에 대해 미국 ‘백악관 당국자’는 29일 미일 관세협상 당시 미국산 쌀 교역도 “논의에 포함돼 있었다”면서도 대통령령에 쌀의 관세 인하를 명기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만 대답했다.
아카자와 경제재정재생상(장관)은 자신의 방미 중단 이유와 관련해 29일 기자회견에서 “사무적으로 논의해야 할 점이 있다는 사실이 판명됐다. 출장을 포기하고 사무 차원에서 협의를 계속해 가겠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대통령령이 나오기까지 “앞으로 한 번은 내가 미국에 가게 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미일간에 서로 다른 구체적인 관세율 적용 실태
미국과 일본은 7월 관세협상에서 상호관세를 15%로 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으나, 이의 구체적인 적용을 두고 입장 차이를 드러내 몇 차례 추가협의까지 했으나 이견이 해소되지 않았다. 일본은 15% 합의를 모든 물품에 일괄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했으나, 미국은 기존 관세에 15% 관세율을 추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예컨대 일본산 대미 수출품 기존 관세율이 7.5%였던 직물이나 26.4%였던 쇠고기, 2.5%였던 자동차는 모두 15%로 일괄 조정된다는 것이 일본 쪽 주장이지만, 미국은 기존 관세에 15%를 추가해 각각 22.5%, 41.4%, 17.5%가 된다는 입장이고, 실제로 8월 7일부터 이 추가된 관세율을 적용해 왔다..
게다가 미국은 품목별 관세인 자동차관세에 대해 조만간 대통령령으로 따로 정해 발표하겠다고 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대미수출에서 30%를 차지하는 자동차 관세는 일본정부가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품목이다. 아카자와 경제재정재생상이 예정된 방미일정을 취소할 정도로 미국정부 조치에 반발하고 있는 데에는 이 자동차 관세에 대해서도 미국정부가 일본정부가 요구하는 15%가 아니라 17.5%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일본정부는 미국에 대통령령을 조속히 일본 요구대로 수정해 발표해 주기를 촉구하고 있다. 아카자와 장관은 이번 미국방문에서 그런 내용의 대통령령 수정 발표에 대한 확답을 받을 생각이었으나, 미국정부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방미 출국 당일 확인하고 황급히 출국을 취소했다. 그리고 사무 차원에서 좀 더 협의해서 합의내용을 먼저 분명히 확정지을 필요가 있다는 자세를 취했다.
아카자와 장관은 지금까지 10여 차례 미국을 찾아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 등을 만나 장시간 협의해 합의를 이끌어냈으나 구체적인 내용에서 여전히 쌍방간 이견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일로 다시한번 드러난 것이다.
미일 정부간 의사소통에 문제?
이런 혼란에 대해 <닛케이>는 미일 양국 정부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쪽 협상대표는 아카자와 장관이 맡고 있고, 미국 쪽의 카운터파트(교섭 상대)는 베센트 재무장관과 러트닉 상무장관, 그리고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 3명인데, 아카자와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과 가장 가깝다는 러트닉 장관과 집중적으로 만났다. <닛케이>에 따르면 아카자와 장관은 러트닉 장관과는 대면 협의와 전화 협의를 모두 15차례 했고, 베센트 장관과는 7차례 했다. 그런데 그리어 USTR 대표와의 협의는 3차례에 그쳤는데, 그나마 5월 23일이 마지막 접촉이었다. 미일 양국이 최종합의한 7월의 백악관 회의 때도 러트닉, 베센트 장관은 동석했으나 그리어 대표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일본정부 내에는 그리어 대표와의 접촉이 적었던 것이 양국간 관세 관련 이견과 혼란의 원인이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고 <닛케이>는 썼다.
문서로 합의내용 확정 최종단계에서 이견 재확인
이번에 예정됐던 방미에서는 7월의 미일 관세합의 때 일본이 약속했던 5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 관련 공동문서 서명도 예정돼 있었다. 일본정부 관계자는 해당 문서가 법적 구속력이 없다면서, 양국 정부 사이에 내용에 대한 큰 이견은 없다고 했다. 미국정부는 일본의 대미 투자 약속을 서명 문서로 확실한 실행력을 갖게 하고 싶었고, 일본정부는 미국 대통령령에 일본정부가 바라는 내용을 담는 것을 교환조건으로 그 문서에 서명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문서로 합의내용을 확정하는 단계에서 여전히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문제의 ‘미국산 쌀 75% 수입확대’ 해석 논란
특히 이번에 문제가 부각된 쌀을 비롯한 미국산 농산물에 대한 일본의 수입확대 및 관세 인하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 7월 관세합의 때 일본은 미국산 쌀을 MA(Minimum Access, 최소시장 접근. WTO 협상 결과에 따라 일정량의 쌀을 무관세로 수입해야 하는 의무 할당량) 77만 톤 틀 내에서 미국산 쌀 35만 톤을 추가 수입하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것이 사실인지 또는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는데 대통령령에 그것을 명기하면서 문제가 된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 당시 “일본이 미국에 시장을 개방했다. 쌀도 포함된다”, “일본은 미국산 쌀 수입을 즉시 75% 더 늘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은 “(시장개방은) 오해”라고 반발하면서, 연간 약 77만 톤인 MA 틀 내에서 미국산 쌀 수입 비율을 높일 가능성은 인정했으나 트럼프가 말한 75% 수입확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지난해 일본은 MA 77만 톤의 45%에 해당하는 35만 톤의 쌀을 미국에서 수입했다. 그것을 75% 더 늘린다면 다시 26만 톤(기존 35만 톤의 75%)을 추가해 총 61만 톤이 돼 MA 쌀의 약 80%를 미국산 쌀이 차지하게 된다. 현행 합의는 MA 쌀 중에서 주식용으로 시장에 출하하는 것은 10만 톤이며, 나머지는 가공용이나 사료용이다. 고이즈미 장관은 “주식용 10만 톤은 변함없다”면서 미국산 쌀을 추가 수입해도 일본 농가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도 불똥 튈 수 있는 미 농산물 수입확대 문제
하지만 이것도 확실하지 않다. 아카자와 장관이 방미 출국 직전에 미국정부의 대통령령 내용을 확인하고 황급히 출국을 취소한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미국산 쌀 수입 확대에 관한 것이었다면, 일본정부가 얘기해 온 쌀 등 미국산 농산물의 수입확대가 ‘오해’라거나 미국산 쌀 수입 좀 늘려도 MA 틀 내에서 늘리는 것이니까 대신 태국산 쌀 수입을 그만큼 줄이면 일본농가가 입을 피해는 없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애초에 합의내용을 문서화하지 않은 트럼프식 관세협상의 폐해가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정부도 미국산 쌀 등 농산물 수입 확대는 거론되지 않았다고 얘기하지만, 미국정부는 딴 소리를 하고 있다. 일본정부가 미국과의 관세협상 때문에 지금 직면해 있는 혼란과 곤란이 미국의 약속 위반 때문인지 아카자와 장관의 미흡한 협상전략 내지 자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유사 사태를 막으려면 철저하고 꼼꼼한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