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의 외교는 트럼프를 넘어야 한다
성공적인 한미 정상 회담을 위한 제언 ①
트럼프가 원하는 것은 외교 없는 협상
이 대통령, 자신의 진면목 각인시켜야
동의-교환-연계의 외교 기본기 활용을
백악관 밖 외교 공동체에 메시지 필요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이달 말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관세 협상을 마무리 짓고, 트럼프 행정부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한국의 정상을 워싱턴으로 초청했다. 경제(교역) 부문에서 받아 낼 것을 챙겼으니, 다음은 군사 부문이라는 관측이 있다. 주한 미군 방위 분담금 인상과 미국의 중국 견제와 압박에 대한 한국의 역할 강화를 요구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외교 없는 협상을 원한다. 외교는 공통분모, 상생의 가능성을 찾는 노력이다. 협상은 덜 주고 많이 받으면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탈외교를 선언한 초강대국의 지도자와 고도의 외교전을 벌여야 한다. 세심한 판 읽기가 요구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스타일은 축구 경기에 비유할 수 있다. 하부 리그 팀을 홈그라운드에 불러들여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훌리건 수준의 관중 앞에서 경기를 편다. 심판은 편파 판정의 비난과 항의에 구애받지 않는 미국 출신이다. 상대를 기죽이는 세계 최대 시장과 최강의 군사력,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미국 우선주의 응원가에 흥분한 관중들, 미국이 만든 게임 룰, 이런 요소들을 활용해 일단 미국은 관세 협상을 마무리했다. 한국은 걱정하던 관세율을 낮추고, 총 3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 트럼프 스타디움을 나오는 우리 선수들이 지쳐 보인다.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한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생각하지 못한 'MASGA (Make American Shipping Great Again,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란 구호까지 만들어 1500억 달러의 재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한미 관세 협상의 물꼬를 튼 효자 제안이란 평가가 있는데, 미국은 다음 협상 테이블에 두 번째 효자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집 자식들이 모두 남의 집의 효자가 될 수는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트럼프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먼저 피할 것이 있다. 냉전 시대 양극 대립 구도의 산물인 정의나 경계가 모호한 '가치 동맹' 같은 추상 개념에 빠져들면 안 된다. 냉전 시대에는 '자유세계'란 개념으로 내 편을 만들고 적을 규정했다. 자유란 이름으로 자행된 군사 행동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된 폭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기술은 삼각 구조다. 1. 관세가 상징하는 경제 압력 2. 미국의 이익을 보편적 가치라며 밀어붙이는 강매 3. 동맹들은 미국의 은혜로 자유, 평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며 요구하는 계산서. 로마군의 쐐기 모양의 3각 대형(wedge formation) 그대로다. 상대 진영을 뚫고 들어가기 위함이다.
외교를 압박을 통한 탈환 작전으로 생각하는 트럼프 정부를 상대로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나? 외교의 기본을 지키면 된다. 우수한 운동 선수는 경쟁 상대의 특성을 파악해 맞춤형 전략을 짠다. 하지만 기본이 탄탄해야 전략적 유연성이 힘을 발휘한다. 도전 요소가 많은 이번 정상 회담을 앞둔 이재명 대통령에게 외교의 기본기인 A.B.C.를 제언한다. Agree(동의), Barter(교환), Connect(연계)를 말한다.
동의(Agree)
동의 또는 합의로 번역하고 이해하는 Agreement와 Accord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Agreement는 넓은 의미에서 의견일치를 말한다. 둘이 생각과 뜻이 같으면, 힘을 합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이제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합의해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이때 Accord는 둘을 접착하는 아교 역할을 한다. 이렇게 형성된 합의는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Agreement와 Accord는 약혼과 결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 이 둘은 다르지 않다. 결혼 예식을 통해 두 사람이 '여러 증인' 앞에서 사랑을 사회 관계와 법의 토대 위에 세운다. 외교에서 확실한 Agreement 없는 Accord에 서명하면 강매당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기 위해 결혼하면 안 된다.
Accord는 Agreement의 완성이고, 그 다음 단계가 Alliance(동맹)이다. 이 절차와 단계가 무시되면 국가 관계가 혼란스러워진다. 정상 회담, 특히 첫 만남에서 Accord가 강조되면 두 정상, 또는 나라 관계에 짐이 될 수 있다. 물론 국가 관계의 마지막 단계인 Alliance, 동맹을 자축한다며 누구처럼 "American Pie" 노래를 부르면 동맹의 심각성과 국격이 떨어진다. 한국은 그때 미국이 요구한 대로 중국을 조일 수 있는 미제 밧줄의 한쪽 끝을 잡겠다고 나선 상태였다.
교환(Barter)
정상 회담은 교환 관계이다. 라틴어로 'Quid Pro Quo'인데, 무엇을 주었으면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거니 받거니에 대한 몇몇 금언들을 새겨본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는 "모든 정부, 모든 인간적 혜택과 즐거움, 모든 미덕과 모든 신중한 행위는 타협과 교환에 기반을 둔다. 우리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주고받으며, 다른 권리를 누리기 위해 어떤 권리는 포기하고, 미묘한 논쟁보다는 행복한 시민이 되기를 선택한다"고 말했다. 인간관계와 국가관계를 불문하고, 평화로운 타협과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교환관계에서 조절과 포기는 필수이다.
경제 철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인간은 무엇이든 교환하려는 성향을 보이는데, 다른 어떤 동물 종(種)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물물교환이 없으면 인간은 살지 못한다. 모든 삶의 요구를 스스로 해결하려면, 능력도 없지만 지쳐 쓰러진다. 나라도 다르지 않다. 미국도 ‘일방주의(unilateralism)’의 한계를 안다.
물론 교환에도 윤리가 있다. "영국에게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 영국의 총리를 역임한 파머스턴 경(Lord Palmerston, 1784~1865)이 외무장관 시절 했던 말로 유명하다. 주거니 받거니의 윤리가 국익이라는 뜻이다.
연대(Connect)
정상 회담은 두 리더의 관계를 깊게 하는 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관계, 연결의 질이 중요하다. 정상 간의 골프 라운딩을 연결고리의 질과 깊이로 보는 분위기가 있다. 골프광 트럼프 대통령과 골프를 치면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때로 언론매체들은 미 대통령의 별장 캠프 데이비드 (Camp David)에 머물면 주인이 사랑방 대신 안방을 내어준 것처럼 감동한다. 두 정상 간의 밀착관계를 나타냈다는 보도는 지금도 이어진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캠프 데이비드가 사랑방이다.
두 정상이 공유하는 개인적 취미와 품성이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존경심이 관계를 강하게 한다(respect strengthens a relationship)'가 진리이다. 여기서 존경은 고매한 인격자에 대한 경외심과 흠모를 말하지 않는다. 'Respect'의 라틴어 뿌리는 'respectus'이다. 뒤돌아봄이란 뜻이다. 한 인간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마음이 움직일 때 respect란 단어를 쓴다. 정상 회담 준비 과정에서 상대에 대해 철저한 인물 탐구를 하는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을 가장 존경한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이다. 그의 삶을 뒤돌아보면 객관적으로 존경심이 가는 인생의 여정은 아니다. 그래서 세계의 주목이 집중되는 파급 효과가 큰 정책을 펼친다. 그는 자신이 취한 행동과 정책을 '아름답다 (beautiful)'고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과시와 관심이 그의 의식 구조이고 행동 양식이다. 그는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스타디움을 벗어나는 초대형 홈런을 치려 한다. 야구광이 아니어도 안다. 홈런에 집착하는 타자는 타율이 저조하다. 홈런을 때리지 못하면 관중의 실망은 쉽게 조롱으로 변한다.
트럼프를 넘어서는 외교
정상회담에 홈런을 치려면 서사가 있어야 한다. 고(故)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이하 존칭 생략) 정상 회담은 스터디할 가치가 있다. 1994년 10월 만델라가 워싱턴에 왔다. 4일 저녁 공식 만찬에서 클린턴이 연설했다. 현 정부의 외교팀이 꼭 읽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주요 부분을 옮긴다.
"당신은 미국 국민과 전 세계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영감이었으며, 사람들은 당신이 신념을 위해 치른 대가에 여전히 감탄합니다. 우리나라는 그 신념을 간직하지만, 아직도 온전히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므로 신이 부여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자신의 땅에서 평등하게 발언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You have been a genuine inspiration to the American people and to freedom loving people around the world, people who still marvel at the price you paid for your conviction, a conviction that our country embraces but still struggles to live up to, the conviction that all men and women are created equal and therefore ought to have a chance to live up to the fullest of their God-given potential and to have an equal say in the affairs of their land."
이어 클린턴 대통령은 만델라가 감옥에 있을때 그의 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었다. 클린턴의 목이 메어 이 부분을 읽다가 멈추고 다시 읽었다.
"때때로 겪었을지도 모르는 좌절을 가져다준 운명에 대해 분노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그 불행을 승리로 바꾸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강철 같은 의지와 필요한 기량만 있다면 이 세상에는 개인적인 승리로 바꿀 수 없는 불행이 거의 없단다."
"While you have every reason to be angry with the fates for the setbacks you may have suffered from time to time, you must vow to turn those misfortunes into victory. There are few misfortunes in this world you cannot turn into personal triumph if you have the iron will and the necessary skill."
현 외교 환경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 자유, 평화, 공동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트럼프는 외교를 대화가 아닌 통보의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돈'에 매달릴 것이다. 그가 제일 잘 하고 좋아하는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 외교는 대통령 혼자 하지 않는다. 확실한 사각형의 구도가 존재한다. 최고 통치자, 미 의회, 싱크 탱크, 외교 관리들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자신의 외교 철학과 정책을 수립해 백악관 밖에 있는 외교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메시지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 '트럼프를 넘어서 (Beyond Trump)' 보지 못하면 한국 외교는 돈 놓고 팔씨름하는 수준으로 내려간다.
국가 지도자 사이의 존경심이 역사를 바꾼 사례는 또 있다. 남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리처드 닉슨이 "뛰어난 재능과 역동성의 소유자"라고 칭찬한 인물이 있다. 오랜 세월 중국의 총리를 역임한 저우언라이다. 외교, 안보 문제에 있어서 자신을 최고 전문가로 생각했던 헨리 키신저 당시 대통령 안보보좌관은 저우언라이를 "자신이 만나본 인물 중에서 첫째 아니면 둘째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칭찬했다. 저우언라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로서 마오쩌둥의 급진적 혁명 사상을 받들어야 했다. 그는 사회 혼란의 대명사로 기록된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 또 거듭되는 숙청의 파고 속에서 중국의 나라 살림을 꾸려야 했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이념을 지키면서 고립. 낙후된 중국의 앞날에 대해 고민했다.
과묵한 저우언라이는 관찰력이 뛰어났다. 닉슨이 타고온 대통령 전용기에 적힌 'The Spirit of 76'를 기억해 두었다. 닉슨이 1972년 2월 27일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기 하루 전, 저우언라이는 닉슨의 중국 방문이 미국 혁명정신에 부합하는 용기 있는 결단이라 평했다. 타고온 비행기부터 혁명 정신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평생 반공주의자로 산 닉슨이 저우언라이에게 "총리는 세상의 누구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며 극찬했다. 저우언라이의 인간적 매력에 닉슨과 키신저는 깊이 빠졌다.
이런 저우언라이에게서 키신저와 닉슨은 생각을 깊이 하고 역사를 넓게 보는 파트너를 발견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과거사, 이념, 지정학적 이해충돌 같은 장애물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않게 됐다. 미래 중국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 국가 정책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했다. 닉슨, 저우언라이, 키신저를 묶어준 상호 존중의 연대감이 중국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를 가능하게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아이러니지만, 트럼프와의 외교는 트럼프를 넘어설 때 성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