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 국가의 체면 버리고 원조 구걸한 박-존슨 회담
[베트남 참전 60돌]⑰ 원조에 양보 없는 미국
존슨, 전투사단 파병으로 의회 설득 카드 요구
미사여구로 박 환대했지만 원조는 확답 안해
주한 미군 감축 가능성 완전히 배제하지 않아
박, 파병으로 인해 안보 우려 높아진다고 응수
공산주의 대적에 국군과 미군 하나라고 호소
1965년 5월 18일 박정희-존슨 매치가 이어졌다. 전날 17일 매치는 동점이었다. 존슨은 인파이터답게 박정희에게 가까이 접근해 콤보(combo) 펀치를 날렸다. 먼저 두 번 연속 곧게 뻗는 짧은 펀치를 던졌다. 다음에 날릴 펀치를 위한 셋업이라고도 한다. 이어 주먹에 어깨 힘을 실어 스트레이트를 날려 잽이 갔던 반대쪽을 가격했다. 권투에서 최고의 연속 펀치로 치는 '잽-잽-크로스(jab-jab-cross)'다.
의회가 미국의 해외 원조 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다. 나라의 재정 여건이 전과 같지 않다. 여러 수혜국을 밑 빠진 독으로 본다. 돈은 받으면서 감사하는 태도도 보이지 않고, 원조에 의지해 발전, 성장한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 첫 번째 잽이다. 그런데 한국은 다르다. 미국에 감사하고 베트남에 건설지원단(비둘기 부대)을 보내 미국을 돕고 있다. 미국의 원조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미 의회가 기뻐한다. 두 번째 잽이다. 이어 크로스를 날렸다. 베트남에 1개 전투 사단을 파병해 달라. 미국에도 한국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존슨은 이 콤보 펀치를 되풀이했다.
박정희는 존슨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펀치를 아꼈다. 달려드는 상대를 저지하기 위해 잽을 많이 날렸다. 존슨의 베트남 정책을 개인적으로 지지한다. 파병하고 싶다. 그러나 국내 상황이 안 좋다. 더 연구해야 한다. 잽과 같은 발언이었다. 그러던 중 아래서 위로 치는 어퍼컷이 들어갔다. 존슨이 놀랄 만했다. 한국군의 파병을 원하면서 주한미군 감축설이 나돈다. 한국 국민은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에 큰 규모의 파병을 하면 한국의 안보가 위험해질 것을 우려한다.
존슨이 다시 펀치를 날렸다. 한국의 방위에 필요한 군사력은 유지할 것이다. 변화가 필요하면 먼저 한국과 상의하겠다. 경제원조도 중단하지 않는다. 존슨은 확신을 주려 했지만, 박정희는 17일 파병을 약속하지 않고 버텼다.
다음 날, 18일 존슨-박정희의 매치는 전날과 달랐다. 오후 5시 3분 공동 성명에 최종 합의하는 자리였다. 정확히 38분 이어졌다. 17, 18일 두 번에 걸친 정상 회담도 비교적 짧았다. 세 가지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한미 관계의 모든 것은 한일 국교 정상화에 달렸다. 둘째, 박정희의 머뭇거림은 전략이다. 이미 추가 파병은 기정사실이다. 셋째, 군사·경제 원조의 극대화를 한국이 원하니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와 국무부 장관 러스크가 적당히,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의 뜻을 전하면 된다.
박정희-존슨 매치의 후반전(?)이 시작됐다. 관중의 관점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부터 저돌적으로 달려들 것으로 기대했던 인파이터 존슨이 자신의 파이팅 스타일에 변화를 주었다. 그는 긴 정치 여정 동안 빠른 정치, 정책적 녹아웃 빼앗고, 환호하는 관중(유권자)에 휩싸여 자신의 역사적 중요성을 확인하려 한 에고이즘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이날 그는 달랐다. 상대를 긴장케 하는 군사, 경제 원조부터 꺼내 들었던 전날의 존슨이 아니었다. 가볍게 팔을 뻗어 어깨를 풀고, 상대의 컨디션을 점검해 보는 것과 같았다. 상대가 자신에게 너무 가깝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정도의 펀치를 날렸다.
먼저 그는 그날 점심에 있었던 박정희의 기자협회(National Press Club) 연설을 칭찬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워싱턴 상주 언론인들의 모임인 만큼 간단한 청중이 아니라며 성공적인 연설을 축하했다. 다음으로 미국의 최근 중서부를 강타한 토네이도 피해자들을 위해 한국에서 보내온 성금에 감사하면서 피해를 본 한국전 참전 군인들을 돕는 데 쓰겠다고 했다.
17일 밤 만찬도 언급했다. 참석자들이 미 전역에서 왔다며, 이들이 자신과 부인 레디 버드 여사에게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날 수 있어 영광이었다는 뜻을 전해 달라고 했다며 덕담했다. 한국이 매달리는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겠다면서 흔한 말로 숨을 몰아쉬며 시작한 전날의 회담과는 극적으로 달랐다.
복싱 전문가들은 존슨이 보였던 '소프트 터칭'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첫째 상대와의 거리감(range)을 느끼기 위해서다. 거리감은 모든 전투의 첫 번째 필수 정보이다. 적이 어디쯤 있나. 그 거리감으로 상대의 전의를 파악할 수 있다. 그 다음이 리듬이다. 자신의 공격 준비 상태를 점검한다고 해도 된다. 두 다리의 유연성도 점검한다.
존슨은 무리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물론 물러서지는 않았다. 미국은 주한 미군 감축을 계획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야 한다면 한국 정부의 양해를 먼저 얻지 않고 군대를 철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했다. ("the United States would not withdraw armed forces from Korea, at least without first obtaining the understanding of the Korean Government.)” 내용은 같은 말인데, 앞에 친밀한 분위기를 만든 뒤에 했다는 점이 전날과 달랐다.
박정희가 가장 불편해했던 대목이다. 주한미군은 한국의 안보와 동시에 경제 문제였다. 주한 미군은 한 손에 총을 들었지만, 다른 손으로는 미국 정부의 지갑을 열게 하는 존재였다. "앞서 한국과 상의해서 이해를 구하고" 같은 수사를 박정희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족을 달지 않고 안 한다고 확실히 하면 될 일이었다.
이때 존슨이 17일 말을 많이 해서 수줍은 박정희가 발언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지적을 떠올렸던 것 같다. 박정희에게 무엇이든지 할 말이 있으면 하라며 발언 기회를 넘겼다. 가볍게 표현해서 복싱으로 치면 자신있으니 "이제 어서 마음껏 쳐봐"라고 한 셈이다.
이어지는 대화는 18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셴스톤 (William Shenstrone, 1717~1763)의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인색한 사람은 가난해 보임으로 부자가 되고, 사치스러운 사람은 부자처럼 보임으로 가난해진다. (A miser grows rich by seeming poor; an extravagant man grows poor by seeming rich.)"
존슨은 박정희 앞에서 일부러 가난을 호소한 인색한 부자와 같았다. 박정희는 절실한 마음을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it might seem a small matter)'이란 표현을 써서 존슨에게 전했다. '군원이관(軍援移管)'을 언급했다.
미국은 예산 절감을 위해 그간 한국군에 제공해 온 군사 물품 중에 한국에서 조달이 가능한 품목은 한국 정부가 구매하도록 했다. 한국 정부에 큰 재정 부담이었다. 더불어 한국 방위에 대해 미국의 관심이 멀어진다고 느끼게 한 요소였다. 박정희의 '군원이관'의 재고 요청에 대해 맥나마라는 그날 아침 확답을 주지 않고 연구하겠다고 했는데, 이제 박정희가 존슨에게 직접 관심을 가져달라 요청한 것이다.
돌아온 답은 마음은 한국 편인데, 미 의회가 동의하지 않을 터이니 이해를 바란다였다. 존슨은 또 미 의회 뒤로 숨었다. 의회에 제출한 자신의 30억 달러 해외 원조 법안이 계류 중인 상태에서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한마디로 '돈이 없다'였다.
이 순간 박정희가 내놓은 카드가 그 유명한 60만 한국군은 공산주의와 싸우는 데 있어 미군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는 발언이다. 따라서 미국이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원만 해주면, 공산 세력과 싸우기 위해 미국이 가는 곳에 우리도 간다는 뜻으로 읽힌다. 미국의 적이 한국의 적이라는 말로 들렸을 가능성이 높다.
박정희에게 "감동했다"라고 한 존슨은 박정희의 이런 제안이 미 의회를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제 박정희는 갈 곳이 없다. 베트남 참전이 해외 원조 규모를 정하는 의회를 움직이는 결정적 요소라면 한국군 참전이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구도에 갇힌 것이 아닌가?
다시 듣기 좋은 양국 대사들에 대한 칭찬 등 덕담이 오가는 중에 동석한 김성은 국방부 장관이 한국군의 낮은 봉급을 언급했다. 봉급을 올릴 수 있도록 미국의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그가 실언했다. 미국이 한국 군대를 자국 군대로 간주하고 이 봉급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The United States should be concerned with this matter in considering these forces as its own troops.")
아무리 미국의 원조에 의지해도 한국 군대는 미국 군대의 일부가 아니다. 존슨의 답이 싸늘했다.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데,("not familiar with this problem") 맥나마라를 통해 알아보겠다고 했다. 이어 존슨은 의회가 미국 병사들의 급여를 올리려 하는데 재정이 없어 가능할 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미국 군대도 낮은 봉급 문제가 있는데 한국 군대까지야... 그런 뜻이다.
그 후의 대화는 측은한 마음을 갖게 한다. 동석한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미국 정부가 대한(大韓) 원조 현황을 '매년(annual)' 검토한다고 했는데 '매년'을 빼달라 했다. 12개월마다 평가해 원조를 재조정할 가능성을 없애려 했다. 존슨은 그러자고 동의했지만, 미 의회가 매년 행정부의 예산안을 통과시켜야 하는 만큼 단어 하나를 지우고 바꿔도 변하는 것이 없음을 알았다. 원조는 미국이 알아서 제공하는 것이다.
이때 긴장감을 느꼈던지, 이후락 비서실장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짧게 기록된 그의 발언을 풀어본다. 한국은 미 의회의 연방 재정 승인 절차를 잘 이해한다. 그런 까다로운 규정과 절차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지원해 주니 고맙다. 한국도 존슨 정부에 반대급부를 제공하겠다.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더 노력하는 것이다. ("Korea would try to work even harder to make good use of (American) assistance.") 더 열심히 하겠다고 소리친 격이다. 존슨이 감동했다. 박정희와 존슨이 다음 날 발표할 공동 성명에 대해서 "(내가 정상회담을 위해) 가는 곳마다 이런 문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나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18일 복싱에서 박정희의 펀치는 망치도 송곳도 아니었다. 존슨의 방어 자세가 완강해 공격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 이런 추측이 가능할 정도로 저돌적이지 못했다. 결국 우리 군대가 당신 군대란 말로 오해할 소지가 큰 위험한 발언을 남기고 링에서 내려왔다. 우리 군을 당신 군대로 생각하고 봉급을 올려달라고 한 국방부 장관도 이날의 무력감과 좌절감을 더했다.
워싱턴에서 17, 18일 박정희는 미국에 한국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 개의 답이 돌아왔다. ①미국이 지켜야 하는 책임 대상이다. 이 책임을 내려놓지 않지만, 이행 방식은 미국이 정한다. ②한국은 미국의 의존국인데 이 정체성을 극복해야 한다. 미국의 원조는 더 이상 달라는 만큼 내주는 일종의 백지 수표가 아니다. 원조의 실적을 보여야 한다. ③베트남에서 미국의 지원국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의회를 설득해 원조를 제공받을 수 있다. 존슨은 이 답들을 한국에 대한 미사여구와 박정희에 대한 칭찬으로 포장했다.
네 번째 답도 있었다. 'Poster Boy'란 표현이 있다. '전형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사전적 의미인데 밖에 내보이기 위해 홍보, 선전용으로 내미는 인물이다. 대외용 상징 같은 거다.
미국의 베트남 정책이 아시아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 귀결될 것을 경고한 오리건주 출신 웨인 모오스(Wayne Morse) 상원의원이 1965년 여름 존슨에게 간곡한 호소문을 보냈다. 그는 1964년 8월의 통킹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두 명의 상원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존슨은 그와 동의하지 않았지만, 모오스의 진정성과 용기는 인정했다.
미국은 지금 베트남과 관련해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것에 앞서 정상적 생각을 할 수 없는 교만한 고집쟁이, 독불장군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했다. 미국의 정책은 전 세계와 미국 전역에서 폭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그렇지 않다. 존슨에게 한국의 베트남 참전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 국제적 인정과 지지를 받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증표였다. 존슨이 비행기를 서울로 보내 박정희를 워싱턴으로 모셔 올 이유다.
박정희-존슨 회담 뒤 약 3개월, 한국 국회는 1965년 8월 13일 한국의 1개 전투 부대 베트남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한일 협정을 반대하는 야당은 국회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파병안은 어부지리로 공화당과 무소속 의원들만 출석한 가운데 표결에 붙여졌다. 재석 104명 중 찬성 101표, 반대 한 표, 기권 두 표로 통과됐다. 여당에서 반대표가 한 표 나왔다.
다음 날인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여당 단독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날치기 통과라며 무효화를 주장하는 반대 시위를 일어났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국이 주장해 온 한국의 살 길이 이제 열렸으니 이 혼란 속에서도 백악관은 한마디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정부 내 여러 부서가 협력해서 짧은 논평을 마련했다.
"미국 정부는 오랫동안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정상적인 관계 수립이 두 나라와 자유세계 모두에 중요하고 지속 가능한 이익을 가져올 역사적 단계가 될 것을 믿어왔다."
다음날이 8월 15일, 광복절 20주년 하루 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