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 위기 일본 ‘트러스 쇼크’ 우려…감세 주장 야당 약진
감세와 국채 증발로 퇴진당한 리즈 트러스 재판?
영국 정부부채 GDP 대비 103.9%, 일본 234.9%
정당들 표몰이 위해 감세와 국채 증발 주장
집권여당 불리한 판세 속에 장기 국채 가격 급락
총재 역임 원로들 “이시바로는 선거 이길 수 없다”
물러날 기색 없는 이시바 “누구 탓이냐”며 항변
일본정부의 연간 예산규모는 110조 엔(약 990조 원)이 넘는다. 그 중 30조 엔(약 270조 원)을 국채를 발행해 조달한다. 국채는 정부가 우선 빚(부채)을 얻어 쓰고 나중에 갚겠다는 차입증서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국채는 정부 빚이다. 일본정부가 매년 예산의 4분의 1 정도를 빚을 내서 메운다는 얘기다. 2025년 한국정부 예산이 677조 원 남짓이니, 한국정부 총 예산의 3분의 1이 훨씬 넘는 규모다.
2025년 3월 말 기준 일본정부의 일반 총부채 규모가 1324조 엔(약 1경 2400조 원)으로,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234.9%나 된다는 자료도 있다. 일본정부 부채 규모 및 GDP 대비 비중이 세계 주요국들 중에서 가장 심각하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만일 일본이 이런 과도한 정부부채 때문에, 그것을 상환할 능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면 국채를 발행해도 그것을 사 줄 데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일본정부 연간 예산의 4분의 1에 펑크가 난다. 예산을 메울 길이 없어진다. 그럴 경우 연금 지급과 의료 및 개호(돌봄), 공공사업 중 다수가 작동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지방교부금이 줄면 지방 자치체들의 학교 지원과 쓰레기 수거도 멈출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경제대국 일본에서 일어날 리가 없다고 대다수 일본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일본정부 발행 국채의 절반 이상을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사들여 보유하는 등 그 대부분의 채권자가 일본 국내에 있으니 부도날 리가 없다는 신화가 일본 바깥에서도 널리 퍼져 있다.
일본판 영국 ‘트러스 쇼크’를 막으려면
하지만 장차 국채가 팔리지 않아 일본정부 예산의 4분의 1을 빚을 내서라도 충당해서 집행해 온 이제까지의 관행이 작동불능 상태에 빠지는 사태가 일어나도 이제는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 전문가들과 정부 및 금융시장에서 최근 퍼지고 있다고 <아사히신문>의 베테랑 경제기자 출신 하라 마코토 편집위원이 7월 25일 칼럼에서 썼다. “커가는 국채 증발 우려, ‘일본판 트러스 쇼크’를 막으려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트러스 쇼크’란 3년 전 대규모 감세정책을 발표하면서 그것을 국채 발행(부채)으로 메우겠다고 했다가 국채가격이 급락하고 파운드와 주가도 동시에 폭락하는 ‘트리플 약세’가 이어지면서 비판여론이 비등해지자 취임 40여일만에 물러난 리즈 트러스 전 영국총리 사임 사태를 가리킨다. 재무장관을 하던 인도계 리시 수낵이 총리가 돼 서둘러 감세안을 취소해 급한 불을 껐지만, 보수당 정권이 지금의 노동당 키어 스타머 정권으로 교체된 것이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
영국 정부부채 GDP 대비 103.9%, 일본은 234.9%
하라 위원에 따르면 일본정부의 부채 의존, 즉 국채발행 의존은 영국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하다. 영국정부 부채는 2023년에 100%를 넘어섰다는 보도가 있었다. 연간 GDP보다 정부부채 규모가 더 커졌다는 얘기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영국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103.9%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정부의 GDP 대비 부채(빚) 비중 234.9%(2025년 3월)는 그 2배가 훨씬 넘는다.
한국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53.5%(2022년)로 낮은 편이다. 대신 가계 부채가 GDP의 90%가 넘지만, 한국정부의 적극재정을 정부부채가 극단적으로 높은 일본 등과 같은 정부부채 위험국가들과 단순 비교하면서 동일 차원에서 논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한국에선 윤석열 정부 때의 부자감세 정책을 재고하는 대신 서민 가계와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적극재정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다.
“일본 국채가 그토록 위기상태일 줄 몰랐다”
하라 위원에 따르면, 얼마전 방영된 <텔레비 아사히>의 인기 프로 ‘하토리 신이치 모닝 쇼’에서 이례적으로 이번 참의원선거에서 감세와 생활지원금을 약속하면서 돈 뿌리기 경쟁을 벌인 각 정당들의 공약과 국채(발행) 문제를 다뤘다. 그만큼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해설자로 출연했던 하라가 일본의 심각한 국채문제를 얘기했을 때 함께 나온 유명 출연자가 “일본국채가 그토록 위기상태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놀랐다”고 했다. 하라는 출연자의 그런 얘기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저명인사조차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그가 놀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라는 일본정부도 국회도 정직하게 부채 실상을 제대로 얘기하지 않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런 문제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당들 표몰이 위해 감세와 국채증발 주장
실제로 참의원선거 때 입헌민주당이나 일본유신회,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약진한 우파 성향의 국민민주당과 극우 참정당 등 주요 정당들은 치솟는 물가 대책으로 현행 10%인 소비세 5%p 인하와 폐지를 주장했다. 높아진 물가(인플레)로 손해보는 만큼 세금을 깎아 주겠다는 선심공약이었다. 자민·공명 연립여당도 이에 질세라 생활지원금(1인당 2만 엔=약 18만 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심각한 정부부채를 안고 있는 여당이 야당처럼 국채 증발로 이어질 감세를 주장했다가는 역풍이 불 가능성이 커 다른 예산을 절감해 현금을 나눠주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돈을 뿌리면 결국 국채를 발행해 빠져나간 돈을 채울 수밖에 없고 정부 빚(부채)은 더 늘어나기 마련이다. 감세로 인한 결손부분을 메울 재원은 “국채를 증발하면 된다”고 드러내 놓고 주장한 정당도 있다.
참의원선거 결과 그런 주장을 한 야당들이 의석수를 크게 늘렸다. 따라서 과반수 의석에 3석 미달하는 소수여당으로 전락해 이시바 총리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자민·공명 연립여당은 정권 유지 또는 국회 입법안건 처리를 위해 그런 야당들의 감세 주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집권여당 불리한 판세 속에 장기 국채 가격 급락
그 때문에 참의원선거 전부터 여당이 불리하다는 경보음들이 울려퍼진 가운데 선거 공고가 난 지 하루 뒤인 지난 4일에 이미 30년물, 40년물의 장기국채 가격이 급락했다. 국채가격이 급락한 것은 이미 과도한 부채를 진 정부의 상환능력과 국채 매매 수익에 대한 의구심을 반영한 것으로, 그것을 사서 이익을 볼 가능성이 낮다고 보는 것이 시장평가의 대세라는 얘기다. 그 때문에 값이 떨어진 국채에 높은 금리를 붙여야 그나마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사두겠다는 매수자가 나타날 것이다.
자민·공명 연립여당이 여소야대의 대패를 당한 이번 선거 결과 일본에서 ‘트러스 쇼크’에 대한 걱정은 더 커졌다. 지금 일본 재무성과 일본은행, 시장 참가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심각한 부채 위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당들의 감세 공약 때문에 국채를 증발함으로써 일본의 재정 규율이 완전히 무너졌다거나 무너질 것이라는 의심을 사게 될 경우 무디스나 피치, S&P 같은 신용평가회사들이 일본 국채 등급을 하향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일본판 트러스 쇼크’가 올 수도 있다고 하라 위원은 경고했다.
지난해 10월 중의원선거에 이어 지난 20일의 참의원선거에서도 연속으로 참패한 이시바 시게루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야당을 끌어들이려고 소비세를 깎고, 그로 인한 결손 부분을 국채 증발이라는 ‘요술 방망이’로 해결하려는 ‘폭망’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역대 자민당 정권들은 그걸 뿌리치지 못했다. 세계최대의 정부부채를 안게 된 지금의 일본 '국채 위기'가 그 귀착점이다.
총리 역임 자민당 원로들 “이시바로는 선거에 이길 수 없다”
참의원선거에서 과반의석 확보를 “필수 목표”로 내건 이시바 총리는 목표 달성에 실패함으로써 당 안팎에서 커가는 퇴진 압박에 직면해 있다. 지난 23일 자민당 최고고문인 아소 다로, 스가 요시히데 부총재,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 등 총리를 지낸 3명의 당 원로들과 만나 계속 집권 용인 발언이라도 얻어내 당 내 퇴진여론을 바꿔 보려 했던 이시바 총리는 아소 고문으로부터 면전에서 “이시바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민의를 (참의원선거 결과) 확인했다”는 야멸찬 얘기만 들었다. 혹 떼려다 하나 더 붙인 꼴이 됐다.
물러날 기색 없는 이시바 “누구 탓이냐” 항변
그럼에도 이시바는 아직 물러날 기색이 없다. 그는 아소 다로 등 자신에게 퇴진하라 압박하는 당 실력자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베 신조 전 정권 때 불거져 나온 불법선거 자금 운용 비리로 당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그 때문에 기시다 정권 때 악화일로의 여론에 밀려 파벌들까지 해체했지만 무너진 신뢰를 자민당은 회복하지 못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기시다 총리가 물러나고 만년 비주류였던 이시바가 기적적으로 총리가 된 것은 그런 당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민심이반 때문이었다. 자민당은 불법 정치자금의 온상인 파벌들 해체를 선언하고 비주류 이시바를 내세워 당 이미지 쇄신을 꾀했지만 지난해 중의원선거에서 참패했다. 그리고 이번 참의원선거에서도 또 대패했다. 이시바는 당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자들이 누군데, 참의원선거에 패배하자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듯 자신에게 선거패배의 책임을 다 떠넘기고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겠다고 나선 옛 파벌 실력자들을 비판함으로써 계속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당신들이 그럴 자격이 있느냐고 항변하면서 당 안팎의 여론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 한다.
자민당에 대한 민심이반으로 계속 집권이 어려워지면, 자민당 내 파벌들은 담합해서 총재를 새 얼굴로 바꿔 이미지 세탁을 한 뒤 마치 정권교체라도 한 듯한 모양새를 만들어 이 파벌 저 파벌 번갈아가며 집권해 온 것이 자민당의 장기집권 전략이었다. 지난해 위기에 처한 자민당의 실세들은 비주류 이시바를 내세워 이미지 세탁을 시도했으나 연이은 선거 패배로 이시바 효과가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총재라는 간판을 바꿀 심산인 듯하다.
이시바는 미국과의 관세협상이라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난제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총리직 공백은 잠시라도 허용될 수 없으며, 그들 ‘구악의 원로’들이 다시 자민당 실세로 돌아올 경우 ‘도로 아베당’이 돼 자민당이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반론을 펴고 있다.
그런 그의 주장이 일 리가 없지 않으나, 비록 이시바의 탓만은 아니라고 하지만 중의원선거 참패에다 도쿄도 의회선거 패배, 그리고 참의원선거 대패까지 속수무책 당하면서 과반의석 확보라는 최소한의 ‘필수 목표’ 약속조차 달성하지 못한 현실에서 그의 집권 계속 주장이 먹혀들기는 어렵다.
하라 위원 같은 이들은 그런 처지의 이시바가 집권 연장을 위해 감세 주장을 편 야당들을 무리하게 끌어들일 경우 ‘일본판 트러스 쇼크’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걱정할 수도 있다.
28일 자민당 양원 의원 간담회가 고비
하지만 이시바가 계속 집권에 집착할 경우 쉽게 결론이 나지 않고 자민당은 분열의 골이 깊어질 가능성도 있다. 자민당 바깥 여론은 이시바에게 불리하지 않다.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28일 열기로 한 중참 양원 의원간담회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시바 총리가 그 자리에서 퇴진의사를 표명한다면 가을 임시국회까지 자민당은 총재선거를 해서 새 총재를 뽑고, 그 총재를 내세워 중참 양원의 총리지명선거를 거치게 된다. 지금 중참 양원의 국회의원 수가 야당쪽이 많아서 자민당 새 총재가 총리에 취임하기 위해서는 일부 야당의 협력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알 수 없다. 일반여론은 이시바 퇴진으로 몰고 가려는 자민당 내 움직임에 호의적이지 않다. 이시바의 퇴진 여부는 28일 간담회 결과를 지켜본 뒤에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