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절대 뺏기지 않으려는 존슨에 힘 보탠 박정희
[베트남 참전 60돌]⑬ 존슨의 베트남 집착
매카시즘 정국에 베트남 공산화의 두려움
'위대한 사회' 건설자 이름을 원했던 존슨
미국 원조에 집착한 박정희는 베트남으로
두 정상, “한반도와 인도차이나는 하나다”
베트남 참전은 한·미간 애증 관계 시작점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1965년 5월 17일. 존슨과 박정희의 백악관 정상회담은 한국 근대사의 전환점이었다. 5.16쿠데타의 불안감에 휩싸였던 박정희가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고, 미국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는 과정에 한국의 베트남 참전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이 거래를 위해 미국에 왔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잡고, 2년 뒤 투표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음에도 떨쳐낼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다. 미국이 한국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는 판단이다. 그가 틀리지 않았다. 미국은 박정희에게 세 가지 정책 변화를 요구했다. 축소, 다변화, 수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국방 관련 지출/부담은 줄이고, 경제는 더 이상 미국의 지갑만 바라보지 말고, 대신 국제 차관과 투자에 의존하며, 과거 식민 통치자 일본의 새로운 위상을 받아들이라고 주문했다. 이 요구는 미국 원조의 삭감을 전제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1961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케네디 정부는 원조 삭감 카드를 박정희에게 내밀었다. 불안해 하는 박정희에게 노련한 러스크 국무장관은 외교 수사를 동원해 원조 규모가 줄지만 아껴서 쓰면 된다고 설득했다. "(박정희의) 손에 들려있는 1달러는 이전 정부의 손에 있었을 때보다 가치가 높다.(a dollar in the Chairman’s hand was worth more than in the hands of previous governments.)" 미국의 원조를 박정희가 제대로 사용해 생기는 이익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을 위한 것이 돼야 한다고 했다. 한국을 위해 살림을 알차게 살라는 뜻이다.
러스크는 또 통역이 쉽지 않았을 숙어를 동원해, 속이 개운치 않은 박정희를 안심시키려 했다. "고양이 가죽을 벗기는데 방법은 여럿이다(many ways to skin a cat)." 목적을 달성하는 데 여러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대외 원조 규모는 의회가 정하기 때문에 행정부가 한국에 대한 원조를 마음대로 늘리기 어렵지만, 방법을 찾자면 길이 있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이 말을 아무리 확대해 해석해도,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 삭감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뜻이었다.
케네디 정부가 되뇌는 외교 수사와 관용구는 박정희를 더욱 불안하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도 역시 통역이 쉽지 않았을 표현을 케네디에게 던졌다. 케네디의 시간을 많이 빼앗았으니 일어나겠다면서, 하지만 가기 전에 한국에 대한 원조와 관련해서 '속 시원한(refreshing answer)' 답을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케네디는 노련했다. 박정희를 속 시원하게 해주려고 되지 않을 일을 약속하지는 않겠다고 답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도 속 시원한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 제안은 지금은 수용할 수 없어도, 속은 시원하다고 했다. 박하게 평하면, 케네디는 말장난을 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어쨌든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64년 1월 주한 미국대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계속되는 미국의 원조 삭감은 한국 경제의 모든 부문에 엄청나고 견딜 수 없는 압박을 가져왔다. 미국의 원조는 정권은 물론 국가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였다.
존슨은 원하는 게 박정희보다 더 많았다. 그도 불안감이 있었고 한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통해 안정감을 찾으려 했다. 많은 존슨 연구자는 그의 상스러운 언행과 상대를 압도하려는 품성에는 깊은 자격지심과 불안감을 감추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분석한다.
1950년 매카시즘 광풍이 미국을 흔들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단순한 산술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일이 하루아침에 미국을 싫어하는 공산주의자가 됐다는 공포가 미국을 쳤다. (한때 중국인들이 한날한시 미국을 향해 집단으로 방귀를 뀌면 미국에 대기 오염이 발생할 것이라는 웃지 못할 블랙 코미디도 있었는데, 중국 인민의 숫자에 대한 두려움의 노출이다.)
3개월 뒤 위스콘신주 출신 조지프 매카시 (Joseph McCarthy, 1908~1957) 상원의원이 과연 어떻게 중국이 공산화되었냐고 따져 묻기 시작했다. “Who lost China?”라고 질문을 던졌고, 매카시는 답을 미 국무부에서 찾았다.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에 경도된 국무부 엘리트들이 마오쩌둥이 중국을 미국으로부터 낚아채 가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음모설은 상식적이 아니었지만, 많은 미국인은 이유 없는 상실감에 빠졌다. 언제 중국이 미국의 소유물이었냐는 당연한 반문에 매카시 추종자들은 귀를 막았다.
외교관 커뮤니티는 물론 군 지도층, 할리우드를 포함한 문화계에 붉은 분자 색출 광풍이 불었고, 피해자가 속출했다. 때마침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싸우고 있었다. 1954년까지 미국은 매카시즘의 열병을 앓았다. 이 병의 시작은 'Who lost China?' 세 단어였다.
'존슨이 베트남을 빼앗겼다(Johnson lost Vietnam)'가 두려웠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미국은 매카시즘에 버금가는 정치적 손가락질과 주먹질이 시작될 것으로 믿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과 자신의 정치생명을 하나로 여기고 다짐했다. "베트남을 잃지 않겠다. 동남아시아가 중국처럼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대통령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I am not going to lose Vietnam. I am not going to be the president who saw Southeast Asia go the way China went.)"
베트남의 공산화는 존슨의 진정한 꿈이 산산조각 난다는 의미였다. 사이공을 지켜야 자유세계가 강해진다는 냉전 전략을 믿고 추구했지만, 그는 동시에 미국에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를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존슨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했다. 자유세계를 지키고, 미국을 세계의 모델 사회로 만들었다고 역사에 기록되길 바랐다. 베트남은 이 두 개 목표를 그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었다. 그의 고민이 배어있는 고백을 인용한다.
“어떤 쪽을 선택하든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정말 사랑했던 그 여인, 위대한 사회를 포기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그 빌어먹을 전쟁에 휘말린다면, 국내에서 추진하려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전쟁을 포기해 공산주의자들이 남베트남을 장악하게 된다면, 나는 겁쟁이로 여겨지고, 미국은 공산 세력에 대한 유화주의자로 취급받을 것이다. 그러면 지구상 어디에서도,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I knew from the start that I was bound to be crucified either way I moved. If I left the woman I really loved — the Great Society — in order to get involved in that bitch of a war on the other side of the world, then I would lose everything at home. All my programs… But if I left that war and let the Communists take over South Vietnam, then I would be seen as a coward and my nation would be seen as an appeaser and we would both find it impossible to accomplish anything for anybody anywhere on the entire globe.”
존슨은 베트남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베트남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도 없었다. 1965년 봄, 존슨은 그의 진정한 사랑 '위대한 사회 건설'을 위해 별로 사랑하지 않는 대상이지만 남베트남을 지켜야 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서 그나마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한 고마운 나라가 한국이었다.
과연 '위대한 사회'는 무엇인가? 존슨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와 만나기 두 달 전인 1965년 3월 연설에서 밝힌 그의 바람이다. 존슨이 만들고자 한 '위대한 사회'를 엿볼 수 있다.
"나는 제국을 건설하거나, 위엄을 추구하거나, 영토를 확장한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다. 어린아이들에게 세상의 경이로움을 가르치고…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그들이 '세금 까먹는' 사람이 아닌 납세자가 되도록 도와주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 또 가난한 이들이 자기의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모든 유권자가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도록 시민의 권리를 지켜주는 대통령이 되길 원한다. 사람들이 서로 증오하지 않고, 인종, 지역,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I do not want to be the President who built empires, or sought grandeur, or extended dominion…I want to be the President who educated young children to the wonders of their world. I want to be the President who helped to feed the hungry and to prepare them to be taxpayers instead of tax-eaters. I want to be the President who helped the poor to find their own way and who protected the right of every citizen to vote in every election. I want to be the President who helped to end hatred among his fellow men and who promoted love among the people of all races and all regions and all parties.”
'위대한 사회'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거주하는 안전한 항구 같은 종착지이 아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되는 도전이며, 삶의 의미가 노동의 놀라운 성취와 조화하는 그런 운명으로 사람을 초대하는 곳이다. (the Great Society is not a safe harbor, a resting place, a final objective, a finished work. It is a challenge constantly renewed, beckoning us toward a destiny where the meaning of our lives matches the marvelous products of our labor.)
그것은 한두 해에 끝나는 국가 프로젝트가 아니다. 영원히 거듭되는 이상이고, 도전이며 혁명이다. 전쟁하면서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존슨은 이 '위대한 사회' 건설을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이 땅의 형제들 사이의 전쟁을 종식하는 데 이바지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I want to be the President who helped to end war among the brothers of this earth)." 존슨의 비전에는 끝이 없어 보였다.
역사학자 로버트 달렉(Robert Dallek)은 이런 존슨을 '자기도취자(narcissist)'라고 평했다. 그의 오랜 공보비서 빌 모이어스(Bill Moyers)는 존슨에게 과장된 표현은 생명을 지탱해 주는 공기와 같았다고 했다.(Hyperbole was to Lyndon Johnson what oxygen is to life.) 존슨 연구의 권위자 로버트 카로 (Robert Caro)의 평가가 적절하게 들린다. "케네디 대통령의 웅변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반면, 존슨 대통령의 망치질 같은 태도는 사람들에게 행동을 유발하게 했다. (President Kennedy’s eloquence was designed to make men think; President Johnson’s hammer blows are designed to make men act)."
존슨은 박정희에 대해 기대치가 높았는데, 단순히 전투 부대를 얻어서가 아니다. 그는 한국군 2만 명이 승리의 열쇠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군이 전투의 부담을 줄이는 역할을 할 것이지만, 그는 한국의 참전을 베트남에서 'motivating force' 즉,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요소로 보았다. 가난하고, 120마일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 한국이 베트남을 돕기 위해 파병을 했다. 당연히 남베트남 군부는 정신을 차리고, 미국의 동남아, 태평양 우방들이 체면치레를 위해서라도 미국을 더 적극 도울 것으로 기대했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존슨이 미국인들에게 한 공언을 표면적으로나마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 존슨은 이미 약속했다. 오래 전이 아니다. 1964년 10월 존슨은 한 연설에서 "미국의 청년들을 9000마일, 1만 마일 떨어진 아시아로 보내, 아시아 청년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떠맡게 하지 않겠다(we are not about to send American boys 9 or 10 thousand miles away from home to do what Asian boys ought to be doing for themselves.)"고 공언했다.
끝으로 박정희는 20세기 들어 미국이 지켜온 외교·군사상의 서사가 끊기는 것을 막아 주었다. 존슨과 박정희는 한국의 베트남 파병으로 형성된 동맹 관계의 확장을 강조하려 노력했다. 군대만 온 것이 아니라 나라가 왔다는 메시지였다. 제1,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모두 미국은 혼자가 아니었다. 연합군이 형성돼 싸웠다. 한국 전쟁에도 미국은 유엔군의 일원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연합군 개념이 약했다. 나중에 5만 명까지 늘어난 한국 군대가 미국으로 하여금 베트남에서 같이 싸우는 동맹국이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했다.
1965년 5월 17일 백악관에서 박정희를 맞이하면서, 존슨은 베트남 전장에서 맺어진 한미 협력 관계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남한은 15년 전 북한의 공격을 받아 공산화될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다시 일어나 반공 태세와 투쟁력에서 더 강해진 나라라고 평가했다. 이제 한국은 그 힘을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베트남으로도 연장했다며 감사 표시를 했다. (We welcome this strength that your land offers now to the defense of freedom not only in Korea but in Viet-Nam as well, Mr. President.) 한국 전쟁에서 그랬듯 베트남 전쟁에서도 자유 수호를 위한 국제 연합전선이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박정희도 뒤지지 않았다. 워싱턴 도착 성명에서 한국의 베트남 참전과 한국의 분단, 대치 상황을 연계시켰다. 한반도와 인도차이나는 하나의 전선인 만큼,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 베트남 군대를 보내는 것이 아니란 메시지를 전했다. 미국 측에 전달된 영어로 번역한 연설문이 존슨을 기쁘게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미국과 한국의 전쟁 목적을 좀 더 숭고하게 드러내려는 노력이 읽히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다. 머지않아 문제가 될 “용병” 논쟁을 미리 차단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한반도의 휴전선에서, 베트남의 정글 속에서,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들이 우리 장병들과 한 막사와 참호에서,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현대의 전쟁도발자 공산주의자들의 침략행위로부터 자유세계를 지켜야만 한다는 '동체적 의무'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안이한 정세평가도, 값싼 명분으로 위장된 후퇴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Along the truce line in Korea, in the jungles of Viet-Nam, your beloved sons and husbands now share the same encampment and trenches with our own men to defend freedom from Communist aggression. They are carrying out their common duty of safeguarding the free world from aggression of the Communists, the modern provocateurs of war. In discharging this duty, there should be no optimistic appraisal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nd no retreat based on easy rationalization.”
다음은 그의 결론이다. "오늘날 모든 한국 국민이, 적어도 '아시아'에 있어서, 끝끝내 여러분과 일치해서 자유를 위한 방파제가 되며, 정의의 편에 서겠다는 결의와 신의를 가졌음을 본인은 명백히 여러분 밖(앞)에 단언할 수 있읍니다." 간결하게 줄인 영어 번역문은 이렇다. "I affirm with pride that the Korean people are today as ever determined in our pursuit of social justice and to stand in Asia for freedom in alliance with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여기서 '방파제' 같은 단어를 건너뛰지 않고 살렸으면 존슨이 더 좋아했을 것 같다.
반려견과 장난을 치면 개가 주인을 무는 척을 한다. 도발(?)에 반응하지만,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주려는 뜻이 없음을 알 수 있도록 살짝 문다. 위아래 이빨의 좁혀짐이 기묘하다. 아프지 않을 선을 정확히 지킨다. 물기는 물지만, 정확하게 보자면 무는 것은 아니다. 귀여워 아이의 볼을 꼬집을 때도 같다. 아프지 않을 선에서 정확히 멈춘다.
존슨의 정책 조언자들은 정상 회담을 위해 그를 준비시키면서 이와 비슷한 조언을 했다.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파병안은 한국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한일 협정(한일 기본조약) 국회 표결과 맞물려 있다. 베트남 파병과 한일 협정이 하나로 묶여서 박정희에 대한 반대 세력에게 투쟁의 목표물을 크게 만들면 안 된다. 파병을 너무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피한다. 베트남 파병을 물긴 물지만, 아프게는 물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두 번째 줄타기는 미국의 원조다. 한국은 미국의 원조 삭감은 한국을 일본에 떠맡기려는 의도의 방증으로 생각한다. 이로 인한 불안심리를 줄여야 한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책임을 줄이려는 의도가 없음을 확인시켜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이 요구하는 대로 원조를 제공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도 오해가 없어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박정희와의 회담 1시간 전에 나온 존슨을 위한 메모에는 흥미로운 정보가 들어있다. 박정희는 농촌 태생으로 수줍고 총명하다. 생애 대부분을 군인으로 살았는데 자신의 작은 키를 의식해서 처음에는 격식을 차리고, 경직되게 행동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단 마음이 편해지면 격식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상대라고 이 보고서는 덧붙였다. 한데 끝에 흥미로운 정보 한 조각이 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승마다. (His one form of recreation is horseback riding.)"
박정희와 존슨은 출신 배경이나 삶의 궤적에서 같은 점이 거의 없었다. '투철한 반공 의식' 정도가 공통분모였다. 승마 언급은 텍사스 출신으로 말타기를 즐긴 존슨과 박정희가 그래도 공통점이 하나 있고, 대화의 소재로 활용할 수 있음을 알리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준비가 철저한 백악관 보좌관들은 둘 사이의 '케미'를 신경썼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 둘은 곧 베트남의 비극을 통해 아주 가까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