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러스킨, 빅토리아 시대의 '아름다운 반항아'

미술평론가로 시작해 사회개혁가 변신

모리스와 손잡고 미술공예운동 이끌어

주류 경제학에도 도전해 양극화 비판도

'길드 사회주의'로 노동당 토대 만들어

오늘날 '워라밸', '친환경'도 그의 유산

2025-07-05     김성수 시민기자

19세기 영국에는 참 특이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이라는 이 남자는 미술평론가로 시작해서 사회개혁가, 교육자, 심지어 경제학자까지 됐다. 요즘 말로 하자면 '멀티플레이어'의 원조 격이다. 물론 그 시대에는 SNS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러스킨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을 했다면, 하루에 몇 십 개의 글을 올리며 빅토리아 여왕부터 동네 공장주까지 모조리 멘션을 걸었을(모든 사람들을 다 태그해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을) 것이다.

터너를 구한 남자, 아니 터너가 구한 남자?

러스킨이 처음 유명해진 건 화가 터너(J.M.W. Turner, 1775-1851)를 옹호하면서부터다. 당시 터너의 그림은 '물감을 캔버스에 던져놓은 것 같다'는 혹평을 받았는데, 러스킨은 〈근대 화가론(Modern Painters)〉에서 터너를 극찬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러스킨 자신도 나중에는 터너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 되어버렸다.

터너의 그림이 안개 속 풍경처럼 몽환적이었다면, 러스킨의 사상은 산업혁명의 매연 속에서 피어난 이상향처럼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 '동떨어짐'이 영국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1850년 젊은 시절 러스킨(왼쪽), 말년의 러스킨. 위키피디아 발췌, Sora 제작. 김성수 시민기자

공장 굴뚝을 보며 중세시대를 그리워한 남자

러스킨의 가장 큰 특징은 영국의 산업혁명시대에 산업화에 대한 강력한 반감이었다. 그는 기계가 인간의 창조성을 죽인다고 믿었고, 대량생산보다는 수작업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요즘 말로 하면 '수제 맥주'나 '핸드메이드(손으로 만든) 초콜릿'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원조 격이랄까?

그의 대표작 〈건축의 일곱 등불(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에서 그는 "기계로 만든 장식은 거짓"이라고 단언했다. 공장에서 찍어낸 똑같은 난간 장식들을 보며 "이게 무슨 예술이냐!"고 분개했다. 빅토리아시대 사람들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주장이다. 마치 삼성 갤럭시 시대에 "다시 삐삐를 쓰자!"고 외치는 것과 비슷했을 테니까.

윌리엄 모리스와의 우정, 미술공예운동의 탄생

러스킨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다. 이 둘의 만남은 19세기 영국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브로맨스("Brother + Romance", 형제와 로맨스를 합쳐 남성 간의 깊고 친밀한 우정을 이르는 신조어)였다. 러스킨이 이론을 제시했다면, 모리스는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모리스는 러스킨의 사상에 영감을 받아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을 이끌었다. "아름다운 것은 쓸모 있어야 하고, 쓸모 있는 것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모토 아래, 벽지부터 가구까지 모든 생활용품에 예술성을 불어넣었다. 오늘날 스웨덴을 대표하는 글로벌 가구 브랜드인 이케아(IKEA)의 디자인 철학이 사실은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스웨덴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묘하겠지만.

경제학에도 한 방, "부는 생명이다"

러스킨은 미술 이야기만 한 게 아니다. 그는 〈이 마지막 온 자에게까지도(Unto This Last)〉라는 책에서 당시 주류경제학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던 시대에, 러스킨은 "진정한 부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부자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지는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요즘 우리가 '양극화'나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문제를 이미 150년 전에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당시 경제학자들은 러스킨을 "경제학을 모르는 몽상가"라고 무시했다. 하지만, 훗날 간디나 톨스토이 같은 인물들이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걸 보면, 과연 누가 몽상가였는지 알 만하다.

옥스퍼드대 교수가 된 반항아

1870년, 러스킨은 옥스퍼드 대학교 최초의 미술사 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이 양반, 교수가 되어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학생들을 데리고 직접 도로를 건설하는 실습을 했다. "몸으로 일하는 것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옥스퍼드의 귀공자들이 삽질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마치 SKY 대학생들이 건설현장에서 '노가다' 하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교수님, 이게 미술사 수업인가요?"라고 묻는 학생들이 있었을 법하다.

 

러스킨이 40세 때 사랑에 빠진 11세의 로즈 라 투시, 1861년 로즈가 13세때 러스킨이 그린 초상화(위키피디아).

로맨틱한 스캔들, 로즈 라 투시와의 사랑

러스킨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로즈 라 투시(Rose La Touche, 1848-1875)와의 사랑이야기다. 러스킨이 40세일 때 11세의 로즈에게 사랑에 빠졌다. 그는 무려 7년을 기다린 끝에 로즈가 18세가 되었을 때 청혼했다. 하지만 나이 차이 등으로 인해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로즈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아픈 사랑은 러스킨을 더욱 감성적이고 몽환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애잔함과 신비로움은 아마도 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빅토리아 시대판 <겨울연가>라고 할까?

길드 사회주의의 아버지

러스킨은 중세 길드제도에 매료되어 '길드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대량생산과 자본주의적 경쟁 대신, 소규모 공동체에서 서로 협력하며 질 높은 제품을 만들자는 아이디어였다.

이는 훗날 영국 노동당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고, 협동조합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러스킨이 제시한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회"라는 비전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의미 있는 일"보다는 "월급 많이 주는 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게 함정이지만.

러스킨의 유산, 여전히 살아있는 영향력

러스킨이 영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우선 교육 분야에서는 그가 설립한 러스킨 칼리지가 지금도 성인교육의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 환경운동의 선구이기도 한 그의 사상은 현재의 환경보호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그의 미학이론은 20세기 디자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모던 디자인 운동인 바우하우스 운동부터 현대의 지속가능한 디자인까지, 러스킨의 DNA가 곳곳에 스며 있다. 아이폰의 세밀한 디자인을 보며 "장식은 죄악"이라고 했던 러스킨이 무덤에서 웃을지, 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영국노동당과 복지사회에 미친 영향

러스킨은 영국 노동당 초기 의원들이 칼 마르크스나 성경보다 더 많이 언급한 인물이었고, 그의 아이디어가 현대 영국 복지국가의 씨앗을 뿌렸다. 그의 사상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토대가 되었다. 러스킨의 핵심철학이 바로 "모든 사람이 문화와 교육에 무료로 접근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국민연금 개념도 러스킨의 제안이었다. 러스킨은 그의 책 <이 마지막 온 자에게까지도>에서 "국가가 시민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진정한 부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철학적 기초가 된 것이다.

무료공공도서관 또한 러스킨의 주장이다. 러스킨은 "지식은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권리"라고 봤다. 그래서 그가 설립한 러스킨 칼리지도 성인교육을 무료로 제공하는 개념이다.

무료박물관 역시 러스킨의 아이디어다. 그는 "예술과 아름다움은 부자들만의 것이 아니다.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동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러스킨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영국의 복지국가 건설에 핵심역할을 했다. 러스킨은 "150년을 앞서간 몽상가"였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무료 공공서비스들이 사실은 모두 러스킨 같은 "몽상가"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몽상가의 승리

존 러스킨은 생전에 종종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라고 비판받았다. 산업혁명과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중세시대를 그리워하고, 효율성보다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1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러스킨이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환경파괴, 노동소외, 양극화 같은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이미 19세기에 정확히 예견했던 것이다. 그의 "아름다운 반항"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워라밸'(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고, '느리고 여유 있는 삶'을 꿈꾸고, '친환경 제품'을 선호하는 것도 사실은 러스킨이 150년 전에 제시했던 가치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러스킨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게 아니라, 시대가 러스킨을 따라잡는 데 150년이나 걸린 건 아닐까?

어쨌든 확실한 건, 존 러스킨이 없었다면 영국은 지금보다 훨씬 삭막하고 재미없는 나라가 되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의 '아름다운 고집'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예술의 가치를 믿고, 사회복지를 누리며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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