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대선과 6.3 항쟁에 얽힌 역사의 아이러니
12.3 계엄 심판일 6월 3일이 61년 전 계엄 선포일
굴욕적 한일 협상 반대하며 4.19 이후 최대 시위
일본 반성과 사죄 없이 졸속 타결해 지금도 후유증
항쟁의 주역 상당수가 계엄 옹호 보수 정치인 변신
“6월 3일 오후 8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①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금한다. 단 관혼상제와 극장 상영은 제외한다 ②언론·출판 보도는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③일체의 보복행위를 금한다 ④직장 이탈을 금한다 ⑤유언비어의 날조 유포를 금한다 ⑥서울시내 각급 대학교 및 중·고·국민학교는 6월 4일을 기해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휴교한다 ⑦통금시간을 엄수하여야 한다. 하오 9시부터 상오 4시까지로 한다. 이상 위반자는 영장 없이 압수수색 및 구속 구금할 수 있다.”
1964년 6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전역에 발동한 계엄령 포고문 제1호다. 조선일보는 6월 4일자 1면 머리기사로 정부의 게엄 결정 및 선포 과정을 보도하면서 “박 대통령은 ‘학생 데모가 크게 확대, 혼란화해 계엄법 제4조에 지적된 대로 교란된 질서를 유지하고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또 정부 고위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박 대통령은 이날 하오 4시 40분부터 약 2시간 동안 헬리콥터로 청와대에 온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 해밀턴 하우스 유엔군 총사령관과 계엄령 선포에 따른 병력 이동 문제 등을 협의했는데 미국 측은 비상계엄령 선포에 반대 의사를 전혀 표명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제2의 을사오적, 현대판 한일합병 중단하라”
당시 상황이 계엄령 선포 요건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다를 수 있겠으나 학생 시위가 격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정부가 한일 협정을 위한 회담에 지나치게 저자세로 임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더욱이 협상 과정을 비밀에 붙이다 보니 “제2의 을사오적”이니 “구걸 외교. 굴욕 외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군정을 거쳐 대통령에 취임한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아 퇴진 위기를 맞은 박정희는 한일 협력 체제를 통해 동아시아 반공 블록을 완성하려는 미국의 양해 속에 계엄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는 일본의 청구권 자금과 차관을 종잣돈 삼아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한다는 구상을 세워놓아 어떻게든 협상을 성사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35년 간의 식민지 지배의 기억이 생생하고 피해자 상당수가 버젓이 살아 있는 터에 순조로울 리 없었다. 일본의 진심 어린 반성과 사죄 없이 한일 간 국교 정상화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국민감정이 뒤덮고 있는 가운데 일본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5·16 쿠데타의 설계자이자 정권의 2인자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이던 1962년 2월부터 일본을 여러 차례 드나든 끝에 1964년 3월 23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장관과 4월 말까지 조약 초안을 작성하고 5월 초 협정에 조인한다는 일정에 합의했다.
이 사실이 언론 보도로 알려지자 부글부글 끓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그해 초 5개 야당은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반대 투쟁의 열기를 높여가고 있었다. 위원장을 맡은 윤보선 전 대통령은 “박 정권의 친일 매국 행위를 호국영령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질타했고, 장택상 전 국무총리는 ‘현대판 한일합병’이라고 비난했다.
경찰 저지선 뚫고 청와대 길목까지 진출
3월 24일 서울대생들은 “한일 회담 즉각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어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매국노 이완용 허수아비 화형식을 치른 뒤 거리로 나섰다. 다른 대학 학생과 시민들도 가세해 5천여 명이 서울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경북 대구와 전남 광주 등지로도 번져갔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최대 규모로 이날 하루에만 280여 명이 연행되고 25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박정희는 28일 김종필을 일본에서 소환하는 한편 30일 11개 종합대 총학생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면담했다. 이튿날 정부도 32개 대학 학생대표 57명을 만나 협상 경과를 설명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를 통한 공작정치, 매판자본과 결탁한 부정부패 등 5.16 쿠데타 이후 거듭된 실정(失政)과 각종 의혹을 폭로하며 정권을 압박했다.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가 열린 데 이어 22일 서울 30여 개 대학 공동으로 ‘대일 굴욕외교 반대 학생 총연합회’를 발족했다. 30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6월 2일 대학생 3000여 명이 서울시청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이다가 630여 명이 연행됐다. 3일에는 1만여 명이 쏟아져 나와 “박정희 군사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곳곳에서 경찰과 유혈 충돌을 빚었다. 일부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 길목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한일 양국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65년 6월 22일 한일 협정 조인
그러나 맨주먹과 돌멩이만으로는 무장한 군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계엄령과 함께 3개 사단 병력이 서울에 진주했다. 그날 밤 시위는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진압됐다. 계엄 선포일부터 7월 29일 해제될 때까지 정치인·학생·언론인 등 1120명이 체포되고 348명이 구속됐다. 동국대생 김중배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숨진 것을 비롯해 3명의 사망자를 냈고 수천 명이 다쳤다.
한일 협상은 중단됐다. 김종필은 사태를 촉발한 책임을 지고 공화당 의장에서 물러나 두 번째 외유를 떠났다. 박 정권은 7월 언론윤리위원회법 제정과 8월 인민혁명당 사건 발표 등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해 사전 정지작업을 한 뒤 1964년 12월 3일 회담을 재개했다.
이듬해 2월 20일 양국 외무장관 이동원과 시나 에쓰사부로가 기본조약에 가조인한 뒤 4월 3일 가장 큰 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자금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로 타결지었다. 여기에 추가로 상업차관 3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마침내 양국 대표는 1965년 6월 22일 한일 기본조약,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청구권 및 경제협력 협정, 어업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 협정 등 33건에 서명했다. 조인식 당일 오전까지도 실랑이를 벌인 독도 영유권 문제는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에 모호하게 기술하는 것으로 봉합했다.
이날 한국에서는 10개 대학 400여 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간 가운데 1만여 명이 반대 시위에 나섰다. 일본에서도 학생 수천 명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일본 공산당도 항의 시위를 펼쳤다. 한일 협정은 그해 8월 14일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일본에서도 11월 12일과 12월 11일 각각 중의원과 참의원 동의를 얻어 12월 18일 발효됐다.
청구권 자금 중 5%만 희생자 유족에 보상
한일 협정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미국의 의도대로 동아시아 반공 블록을 구축해 공산화 도미노를 막는 데 성공했으며, 한국과 일본의 동반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범국민적 반대를 총칼로 억눌러가며 졸속으로 협상을 마무리짓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의 사과와 배상 책임 문제를 명확히 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은 “일본법에 따라 보상금을 개인에게 직접 지급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우리 정부는 “피해자 보상은 국내 문제이니 알아서 하겠다”며 반대해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 정부와 일괄 타결했으니 개인 배상 책임이 없다”고 발뺌할 빌미를 줬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그때까지 스스로 피해 사실을 밝힌 당사자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약탈 문화재의 경우 ‘반환(返還)’ 대신 ‘인도(引渡)’라는 표현을 써서 대부분 돌려받지 못했고, 나머지 문화재에 대해서도 ‘소유자의 자발적 의지’란 표현을 삽입해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어업 협정에서도 독도 인근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해 말썽의 소지를 남겼다.
청구권 자금의 상당액을 현금이 아니라 일본산 중고 설비나 재고품 등 현물로 받은 것도 원성을 샀고, 자금의 용처와 배분 비율도 문제로 꼽혔다. 청구권 유무상 자금 5억 달러(1795억 원) 가운데 91억 8700만 원(5.1%)만이 징용 사망자와 금융 피해자 등에게 보상금으로 지급됐다. 징용 사망자 1명당 유족이 받은 돈은 쌀 15가마 값에 불과했다. 부상자나 생존자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았다.
402억 원(37.4%)은 농림수산 부문에 투입됐다. 174억 원(16.2%)은 포항종합제철 공장 건설 비용으로 들어갔다. 유상 자금 2억 달러(718억 원)는 광공업과 사회간접자본 등 경제 기반 시설을 마련하는 데 쓰였다. 2004년 KBS TV ‘일요스페셜’은 한일 협상 과정에서 박 대통령이 일본 기업으로부터 거액을 받았다는 미국 CIA(중앙정보국) 보고서를 공개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친일독재 정권 참여로 자기를 부정한 항쟁 주역들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한일 협정 반대 투쟁은 무력 진압에 의해 좌절됐다. 그러나 민족 자존심을 일깨워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운동을 촉발했다. 한국 정부의 협상력을 높여 조금이나마 일본의 양보를 받아내는 데 보탬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1964년 3월 24일부터 6월 3일에 이르는 시위와 계엄 등 일련의 사건을 6.3 사태라고 일컫다가 민주화 이후 6.3 항쟁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들을 가리켜 6.3 세대라고 한다. 이들은 4.19 세대에 이어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 정치 무대에 주역으로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을 맡아 단식농성을 주도한 김덕룡이다. 6.3 항쟁으로 구속돼 제적됐다가 1970년 김영삼 비서로 정계에 입문해 상도동계 일원으로 활약했다. 1988년 국회에 입성해 5선 의원을 지냈고, 노태우 정권 때 3당 합당에 참여한 이래 국민의힘과 민주당 계열 정당을 넘나들었다.
고려대 상과대 학생회장이던 이명박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을 겸하고 있었다. 시위 주동 혐의로 투옥됐다가 집행유예로 6개월 만에 풀려났다.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뒤 12년 만에 사장에 오른 샐러리맨 신화를 낳았다. 1992년 정치인으로 변신해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을 거쳐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퇴임 후 뇌물수수, 횡령, 배임, 조세 포탈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철창 신세를 지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재오는 중앙대 농촌사회개발학과 대표를 맡고 있다가 총학생회 간부가 모두 체포되자 시위에 앞장서 제적됐다. 민주화운동으로 5차례나 옥고를 치렀으며 1988년 민중의당을 거쳐 보수정당 소속으로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실세 중의 실세로 꼽혔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이끄는 문재인 대통령 반대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 영문과에 다니던 한광옥도 제적됐다. 동교동계 중진으로 4선 국회의원을 지낸 뒤 김대중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국민대통합위원장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중앙대 총학생회장이던 서청원은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8선의 관록을 쌓았다. 상도동계 대표 인물에서 친박계 좌장으로 변신했다.
김지하는 박근혜, 손학규는 김문수 후보 지지
손학규는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시위에 참여했다가 6개월간 복역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 김근태·조영래와 함께 ‘65학번 운동권 삼총사’로 불렸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강대 교수로 재직했다.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를 역임하고 4차례나 대선에 도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22일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다니던 현승일은 국민대 총장을 지냈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이회창 총재 특별보좌역을 맡기도 했다. 2022년 윤석열 대선 후보를 지지 선언한 헌정회원 명단에 포함됐다. 고려대생이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김덕규 전 국회부의장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6.3 항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서울대 미학과 재학생이던 김지하다. 5월 20일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弔詞)를 낭독했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로 시작되는 이 글은 5.16 쿠데타 세력의 반민족성과 반민주성을 통렬하게 풍자해 정권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후 ‘오적(五賊)’ 등의 저항시를 발표하며 반독재 투쟁의 상징적 존재로 떠올랐다. 1991년 대학생들의 분신을 비판하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기고한 것을 계기로 운동권과 갈등했으며 2012년 박근혜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혔다. 2022년 5월 8일 별세했다.
6.3 항쟁 정신만이라도 6.3 대선에서 부활하길
박정희의 굴욕 외교에 저항하다가 계엄령으로 탄압받은 6.3 항쟁의 주역들이 군사정권을 뿌리로 하는 정당의 정치인으로 변신하거나 박정희 딸을 비롯한 친일 정권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부정에 가깝다. 더욱이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비호하는 정당의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떠올리게 한다.
공교롭게도 윤석열의 12.3 계엄을 민의로 심판하는 날은 61년 전 계엄령이 내려진 날과 똑같다. 6.3 항쟁 주역들의 인생유전(人生流傳) 궤적을 더듬어보니 6.3 대선의 역사적·시대적 의미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6개월 전 그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듯이, 극일과 반독재를 외친 6.3 항쟁의 정신이 6.3 대선에서 다시 부활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