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외교참사, 한국 언론은 왜 문제의식 없었나
'UAE의 적은 이란' 발언, 심각성 전혀 인식 못해
이란 정부 반발 등 사태 전모 전하는 것도 소극적
현지취재단 단순 중계 , 정부 해명 전하기 급급
윤석열 대통령이 순방 중에 ‘아랍에미리트(UAE)의 적은 이란’이라는 폭탄 발언을 해 초대형 파문이 빚어지고 있지만 한국의 주요 신문에서는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황이 확인되고 있다.
대통령의 입과 인식도 심각한 문제지만 이를 전하는 한국언론의 보도도 ‘참사급'이었다.
윤 대통령 발언에 대해 최초로 문제점을 정면으로 비판한 시민언론 민들레의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이에 주목한 국내 주요 언론은 거의 없었다.
윤 대통령이 UAE 아크부대를 방문한 소식을 전하는 연합뉴스의 첫 보도가 나온 것은 한국 시각으로 16일 오전 1시 9분, <UAE의 적은 이란, 우리의 적은 북한…매우 유사한 입장>이라는 제목이었다. 이 기사는 "UAE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라며 "우리와 UAE가 매우 유사한 입장에 있다"고 썼지만 이 발언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지적하지 않고 단순히 전달만 하는 식이었다. 동행한 부인 김건희 씨가 "사막여우도 많나요?"라고 묻자 윤 대통령이 "별걸 다 알아"라고 말해 김 여사가 "제가 주로 동물을 좋아하니까"라고 했다는 얘기만 덧붙였다.
오후에는 '연합시론'으로 <제2 중동 붐 기대 높인 윤 대통령의 UAE 방문>이라며 방문 성과에 찬사를 보내는 칼럼이 실리기도 했다.
민들레가 이 발언의 심각성을 짚은 첫 보도를 내보낸 것은 16일 오후 7시. <윤 대통령 ’UAE의 적은 이란‘ 쓸데없이 자극…또 외교 실책>이라는 제목의 톱기사에서 발언이 왜 문제인지 상세히 분석하며 “이란의 반발 등 파장을 예고하는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연합뉴스는 늦은 밤 시각인 오후 11시 53분에 '속보'로 대통령실의 해명을 <’UAE의 적' 尹 발언에 "장병 격려…한-이란 관계 무관">이라는 제목으로 내보냈을 뿐이다.
이튿날 아침 주요 조간 신문에서도 이를 제대로 지적하는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유력 매체인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는 ‘이란은 UAE의 적’ 발언이 아예 실리지 않았다. 경향신문도 마찬가지였다. 한겨레와 동아일보가 그나마 이를 보도했지만 한겨레는 원전 현장 방문 등을 전하면서 말미에 ‘한편’을 덧붙이는 식으로 이 발언을 단 한 줄 언급하면서 야당이 비판했다고 짤막하게 곁들였을 뿐이다. 동아일보는 이 발언에 대해 문제점 지적 없이 "양국 모두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을 두고 있다면서 동질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오히려 의미를 부여하고 역시 끝에 민주당의 비판을 붙였다. 전날 민주당이 대변인 서면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이 또 한번 외교참사를 일으켰다”고 성토하지 않았으면 언론의 자체적인 문제 제기조차 되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7일 이란 외교부의 ‘초강경’ 비판 성명이 나온 이후다. 그러나 방송사나 신문사별로 이를 전하는 기사의 양과 내용에서는 크게 엇갈렸다. 이날 저녁 MBC JTBC 등 주요 지상파와 종편 등은 저녁 메인뉴스에서 많게는 리포트 3건씩을 할애해 윤 대통령 발언의 문제점을 거세게 비판했다. 종편 중에서는 JTBC가 관련 보도를 3건 내보내 가장 적극적으로 윤 대통령 발언 문제를 다뤘다.
그러나 SBS는 8뉴스에서 한 건만 보도했을 뿐이며 MBN은 저녁 메인뉴스인 ‘뉴스7’에서 윤 대통령 발언 논란을 후반부인 18번째 뉴스로 배치했다.
특히 TV조선과 연합뉴스TV는 리포트를 하면서 정작 이 같은 발언을 한 윤 대통령의 육성이 담긴 장면조차 내보내지 않았다. TV조선은 여야 공방으로 리포트를 구성하면서 2분간의 리포트에서 37초를 정진석 비대위원장의 윤 대통령 발언 두둔 주장과 정부 해명에 할애했다.
이튿날 주요 조간 신문에서도 이 같은 양상은 비슷했다. 일부 신문은 이를 크게 보도하면서 비판적으로 조명했지만 유력 매체들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18일 조선일보는 이란 외교부 대변인의 발언을 전했지만 ”한국의 대통령의 명백한 무지” “간섭적 발언” 등 강경한 발언을 “이란과 지역 국가들 간의 관계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로 순화시켰다. 윤 대통령을 ‘그 한국 당국자(the South Korean official)’라고 비하하는 호칭까지 동원한 이란 정부의 반발은 조선일보 지면에서는 감지될 수가 없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이란 정부의 반응을 조선일보다는 자세히 전했지만 기사의 지면 배치나 크기는 파문의 크기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를 가장 크게 다룬 것은 한겨레, 경향 2개 신문이었다. 한겨레는 1면 머릿기사에서 '윤 대통령의 설화(舌禍)와 수습불가 외교'를 강하게 비판했다. 경향신문 역시 1면 머릿기사로 <대통령 가벼운 입, 또 외교리스크. 발언 일파만파(一波萬波)>라고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전날 경향에선 이에 대한 보도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작 ‘일파’는 보도하지 않으면서 ‘만파’만 전한 셈이다.
이번 대형 외교 참사에 대한 한국언론의 보도는 전반적으로 최초의 문제점 인식에서부터 큰 허점과 부실을 드러냈다. 대통령의 순방에 동행한 현지 취재단은 근접 거리에서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지만 단순 중계와 인용 보도에 그쳤을 뿐이다. 발언의 문제점에 대해 “우리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한 취지의 말씀이었다”라는 동문서답을 내놓는 대통령실과 외교부의 해명 아닌 해명에 대해 추궁하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