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잉글 라이트, 양심이 서로를 알아보다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만난 두 사람

국경도 언어도 넘은 인연과 '내면의 빛'

한국 의료 지원한 30대 여성 병리학자

불의에 침묵하지 않은 사상가·교육자

잉글 "함석헌은 동양의 신비스런 현자"

2025-05-23     김성수 시민기자

1950년대 초반, 한반도는 그야말로 절망의 땅이었다. 6.25전쟁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집이 사라지고, 가족이 흩어졌으며, 삶의 희망도 무너졌다. 폭격으로 허물어진 도시 위에는 눈물과 절규만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폐허 위에 다시 삶을 세워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그 시절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몸으로 겪은 '생존'의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봉사한 영국의 병리학자 잉글 라이트. 1953. 12.

그런 시대, 조용히 한국 땅을 밟은 한 영국인이 있었다. 잉글 라이트(1923-1997). 이름조차 낯선 이 영국여성은,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병리학자였다. 잉글은 퀘이커교도로, 전후 복구와 인도적 지원을 위한 자원봉사로 군산에 자리를 잡고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고아와 전쟁미망인, 병든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며,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잉글은 난민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돌봤다. 병든 아이들의 체온을 재고, 필요한 약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걸었으며, 함께 밥을 지어 먹고 겨울을 견뎠다. 자신이 머물 숙소 침대를 아이들에게 내주고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다. 이방인이 아닌, 이웃으로 존재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말로 동정을 표현하기보다, 행동으로 연대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손길은 조용하지만 깊었고, 목소리는 낮았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한국에는 또 다른 이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버텨내며, 해방 이후에도 정치와 사회의 불의에 침묵하지 않았던 사상가이자 교육자 함석헌(1901-1989). 그는 일찍이 '씨알'이라는 개념으로 민중을 이야기했고, '비폭력'과 '내면의 양심'이라는 주제로 평생을 살아낸 인물이다. 그가 추구한 건 단순한 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가치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외로움을 견디고, 감옥을 감수하고, 오해와 비난을 감내했다. 그렇게 그는 늘 홀로 선 사람이었고, 동시에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사람이었다.

 

1988년 1월 2일 자택에서 만난 함석헌 선생.

함석헌은 훗날 그가 처음 만난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들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6·25 직후 우리나라 복구사업을 하는데 퀘이커교에서 영·미 합작으로 수십 명의 사람을 보내왔어요. 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 복구공사를 했는데 거기에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참가해서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어요. 나는 그들의 신앙에 참 감동했어요. 그들 때문에 나는 퀘이커리즘에 흥미를 느끼게 됐어요."

당시 잉글은 30세였는데 50대 초반의 함석헌을 만나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전쟁 후 척박한 폐허 위에서 만난 함석헌의 단아한 모습이 마치 '동양의 신비스러운 현자(sage)'와 같았다고 표현했다.

함석헌도 당시 잉글을 만났던 것 같다. 다만 그녀의 이름을 기억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결국 이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언어도, 국적도, 문화도, 인종도 다르지만, 마음이 먼저 닿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양심이라는 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으니까.

 

1993년 여름 영국 멘체스타에서 만난 잉글과 필자

양심이 양심을 알아본다

잉글은 한국에서의 활동을 마친 후에도, 한국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원조 활동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걸로 끝나기 일쑤지만, 그녀는 달랐다. 영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해서 한국 유학생들을 도와주고, 생활을 함께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내가 지난 1990년 5월, 잉글을 영국 런던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첫 질문은 "함석헌 아세요?"였다. 그 후 그녀는 '함석헌의 죽음을 접하고' 무작정 영국으로 유학을 온 나에게 자신의 집을 따스하게 활짝 열어주었다.

잉글은 나를 항상 친아들처럼 대해 줬고, 유학생활 중 그녀는 내게 항상 어머니 같은 사랑을 베풀었다. 심지어 내 박사과정의 학비와 생활비를 전적으로 지원하기까지 했다. 잉글의 헌신적인 사랑과 후원 덕에 나는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잉글은 한 번도 '내가 너를 도와 준다'는 말을 하거나 생색을 낸 적이 없다. 오히려 항상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다가왔다. 때로는 조용한 미소로, 때로는 차 한 잔을 건네는 따뜻한 손길로. 잉글의 삶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신념을 증명하는 삶이었다. 그녀의 방식은 소리 없이 깊게 파고드는, 뜨거운 감동과 영감의 힘이었다.

혼자라고 느껴질 때,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우리는 살다 보면, 때때로 강력한 철벽 앞에 선다. 아무리 말해도 바뀌지 않는 사회, 아무리 노력해도 정의가 통하지 않는 구조, 온 세상에 나 혼자만이라는 외로움. 그럴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혼자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양심이란 게, 정의라는 게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지?"

하지만 나는 그런 순간마다 매번 잉글과 함석헌을 떠올린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겠다며 깃발을 든 영웅이 아니었다. 잉글은 그저 아픈 사람들을 돌봤고, 함석헌은 붓을 들어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그들의 무기는 붓 한 자루, 붕대 한 장, 차가운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그 작고 조용한 실천들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전부가 되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흥사단 앞 인도에 설치되어 있다.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함석헌은 감옥에서도 글을 쓰며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고 물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나는 그 질문을 다시 묻고 싶다. 당신도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당신이 흔들릴 때, 외로울 때, 어려울 때 그 사람을 생각하며 버틸 수 있었던 누군가를.

잉글과 함석헌은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들은 내게 말없이 온 삶으로 가르쳐 줬다. 세상에 아무리 불의와 부조리가 정의와 진실보다 앞서는 것 같아도, 조용히 자신의 빛을 따라 걷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빛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걸 지키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양심’은 어떤 모습인가? ‘독실한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약자가 아닌 강자 입장을 옹호하는 이들이 진실화해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 정부기관을 이끄는 현실을 보며, 나는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1954년 봄 한국 의료진과 함께 한 영국의 병리학자 잉글 라이트.

함석헌과 잉글은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한 삶을 살아낸 증인이었다. 정치인도, 유명인도 아니었지만, 그들의 존재는 어두운 밤 북극성처럼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 역설적이게도 북극성은 컴컴하고 어둠이 짙어야만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니 세상이 어둡다고, 그래서 앞날이 전혀 안 보인다고 절망하지 말자.

오히려 어둠이 짙은 컴컴한 하늘에서 우리는 북극성이라는 희망의 강렬한 빛을 더 잘 볼 수 있지 않은가! 설령 우리가 그 북극성의 자리에 영원히 다다를 수 없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자! 북극성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희망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내 자녀들은 중간 이름이 '잉글'이다. 그것은 단순한 잉글에 대한 감사를 넘어, 하나의 영혼이 또 다른 영혼에 남긴 깊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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