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고율관세 제조업 부활론 “제 무덤 파는 것”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분석

미국 제조업 몰락(탈산업화)과 중산층 붕괴는

무역적자 때문이 아니라 생산성·소득 향상 결과

소득 증가 따른 서비스 위주 소비패턴 변화도 한몫

일본과 독일 현실 다르듯 제조업 쇠퇴 원인도 달라

복합적 원인 무시한 제조업 부활정책은 쇠망 자초

2025-05-15     한승동 에디터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중동을 순방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5월 15일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기업 리더들과의 아침 식사 자리에서 보잉 CEO(최고경영책임자) 켈리 오트버그(좌)와 GE(제너럴일렉트릭) 에어로스페이스 CEO 래리 컬프와 함께 앉아 있다. 2025.5.15. AFP 연합뉴스

난폭하기 짝이 없는 ‘관세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망가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기 위해서라고 도널드 트럼프와 그의 정부는 주장한다. 그리고 제조업이 망가진 것은 값싼 외국상품의 과도한 수입에 따른 무역 불균형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 때문에 팽대한 무역적자가 나고 미국 국내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고 쇠퇴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 수입을 막고, 값싼 원료와 인건비(제조 비용)를 찾아 해외로 나간(오프쇼어링) 미국 제조업체들을 자국 내로 다시 불러들여야(리쇼어링) 하며, 막대한 관세수입으로 무역적자를 보전하고 제조업을 되살려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리하여 미국을 다시 제조업 대국으로 재건하겠다는 트럼프의 메시지는 블루칼라(제조업) 노동자들이 조립 라인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중산층 임금을 받을 수 있었던, 잘 나가던 시절의 미국에 대한 향수와 그렇지 못한 지금 현실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과거에 민주당을 지지했다가 오프쇼어링에 따른 제조업 공동화로 몰락한 뒤 공화당 트럼프 지지로 돌아선 백인 중산층의 분노가 그것이었다. 그것은 트럼프가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제조업의 몰락과 중산층의 붕괴

미국이 세계의 공장이던 1950년에는 미국 노동자 3명 중 1명이 제조업에 종사했지만, 오늘날에는 12명 중 1명 꼴이다. 부자나라들의 제조업 일자리 감소는 지난 수십년간 정책 입안자들의 고민거리였다. 제조업은 높은 생산성과 다른 경제 부문으로의 파급효과 때문에 역사적으로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여겨져 왔다. 제조업 일자리는 중·저숙련 노동자들에게 번듯한, 괜찮은 임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미화돼 왔다. 그런 일자리가 없어지면 노동자들은 저임금 서비스 부문 일자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중산층이 무너지는 ‘공동화’와 한층 더 심각한 소득 불평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미국 제조업은 무역적자 때문에 무너졌을까?

미국의 제조업은 과연 무역적자 때문에 망가졌을까? 그리고 관세를 높이면 미국 제조업이 부활하고 무역적자도 사라질까?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이 없다. 공장(제조업) 일자리의 소멸은 경제발전의 불가피한 결과일 수 있다. 이 잡지는 지난 4월 25일 기사 ‘국제무역이 정말로 미국 제조업을 죽였나?’(Did international trade really kill American manufacturing?)에서 네덜란드의 그로닝겐 성장개발센터의 역사 자료들을 토대로, 제조업 고용이 뒤집힌 U자 형태를 띠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화 단계에서는 농업분야에서 산업(제조업)분야로 일자리가 이동하지만, 국가가 산업화되고 부유해지면 다시 산업에서 서비스업 쪽으로 일자리가 이동하고, 제조업 일자리는 줄어든다.

 

주요국 제조업의 고용비율 추이. 1801~2019년 기간에 독일(푸른색)과 영국(주홍색), 미국(검은색), 중국(빨간색) 산업(제조업)의 고용비율 추이. 산업(제조업)이 발달하면서 영국과 독일, 미국의 노동자 고용비율이 급격히 높아졌으나 산업화된 1950년대 이후 소득이 늘면서 제조업 분야 고용비율은 계속 하향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산업화가 늦은 중국도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급격히 노동자 고용비율이 높아졌으나 경제성장과 함께 선발국들과 비슷한 추이를 보이게 될 것이다.    이코노미스트  4월 25일

부자나라들의 탈산업화는 주로 생산성 향상 결과

미국과 같은 부자나라들은 왜 탈산업화(deindustrialised)했을까? 트럼프는 그 책임은 전적으로 값싼 수입품에 문을 열어 막대한 무역적자를 낳은 국제무역이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이 2001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등 개발도상국들이 세계무역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많은 미국 기업들(제조업체들)이 외국의 싼 원료와 인건비 등 저비용을 활용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사업장을 옮겨갔다. 그 결과 중국이 “핵심 제조업에서 세계적인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 제조업체들이 중국으로 대거 이전해 간 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제조업 일자리 감소가 그것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로 생산성 향상의 결과라는데 동의한다. 새로운 기술은 노동자 1인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제조업 생산품의 상대적 가격을 낮췄다.

인디애나 주 볼 주립대학의 마이클 힉스와 스리칸트 데바라즈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00년에서 2010년까지 미국 제조업 분야 일자리 감소의 88%는 생산성 향상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무역 요인은 13%에 지나지 않았다.

소득 증가에 따른 서비스 위주 소비패턴 변화도 한몫

소비 패턴의 변화도 제조업 일자리 감소의 한 요인이다. 저소득 국가에서 소득이 증가하면 사람들은 식량에 대한 지출을 줄이고 제조업 제품에 대한 지출을 늘리는 경향이 있다. 소득이 늘면 생활비에서 식품비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이른바 ‘엥겔의 법칙’이 그런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어다. 부자나라들에서는 소득이 증가하면 소비가 제조업 제품에서 서비스 분야로 이동한다. 1950년에는 미국 소비의 약 60%를 제조업 생산품들이 차지했다. 오늘날은 제조업 생산품들 비중은 전체 지출(소비)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고, 3분의 2는 서비스업 쪽이 차지하고 있다.

트럼프의 제조업 부활 정책은 ‘막다른 길’로 가는 것

따라서 탈산업(탈제조업)화는 미국 경제 쇠퇴의 징후가 아니라 소득이 늘면서 더 부유해지는 과정의 일부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서비스업이 더 생산적이고 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된 상황에서 공장(제조업) 노동(일자리)을 부활시키겠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말이 안 된다는 얘기다. 인공지능(AI)의 출현은 이런 추세를 가속시킬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나간 시대의 향수에 초점을 맞춰 제조업 부활을 부르짖는 것은, 오히려 미국의 생산성과 부를 약화시키는 ‘막다른 길’(dead end)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결론지었다.

일본과 독일 현실이 다르듯 제조업 쇠퇴 원인은 복합적

여기에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제조업 쇠퇴는 소득 증대의 필연적 결과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고소득 국가가 되면서 제조업이 쇠퇴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와 달리, 더 잘 사는 독일은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사정이 좀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제조업 경쟁력이 막강하다. 일본은 부자나라가 되면서 제조업이 쇠퇴해 국가 경쟁력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기업 전략으로 제품들의 경쟁력이 쇠퇴한 결과 한국 중국 등의 가성비 높은 새로운 경쟁국들 제품에 일본 제품들이 밀리면서 어쩔 수 없이 더 값싼 제조비용을 찾아 일본 업체들이 해외로 대거 이전하면서 제조업이 쇠퇴하고 국가 경쟁력이 약화됐다는 진단들이 있다. 그에 비해 독일은 경쟁력이 없는 좀비 기업들을 과감히 정리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로 제조업 중심을 이동시켜 소득과 제조업을 다 살릴 수 있었다. 독일 기업들은 오프쇼어링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제조업 쇠퇴는 소득변화뿐만 아니라 여러 복합적 요인에 의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제 와서 미국은 오프쇼어링을 제조업 붕괴의 원인인 양 탓하지만, 오프쇼어링을 통해 그 동안 막대한 돈을 벌지 않았던가.

고비용의 부자나라 미국의 제조 대국 꿈 자체가 망상? 

어쨌거나 국제무역 때문에 미국 제조업이 망가졌고 나라가 위태로워졌으니, 높은 관세로 수입을 막고 관세수입을 제조업 부활에 쏟아부으면 만사 해결된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얘기다. 고율 관세가 미국 물가를 치솟게 하고 서민들의 삶을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들어 여론이 악화되고 있고, 짧은 과도기를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는 트럼프 정권의 낙관론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고소득 고물가 고임금의 부자나라 미국이 중국 등 후발산업국들이 장악해 온 저부가가치 제조업까지 다시 빼앗아 제조업 대국 지위를 탈환하겠다는 것 자체가 망상이 아닐까. 설사 빼앗아 온들 그것이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