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례 세계대전 전야 같은 반세계화 속 ‘트럼프 혁명’
세계화 거품→붕괴→보호무역 블록화→세계대전
가속 중인 반세계화, 국가간 충돌이 ‘트럼프 혁명’
글로벌화가 세계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설은 오류
해외투자 비판하고 보호주의 무역을 설파한 케인즈
세계화를 제한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해법?
독자적인 대응전략 세워야
지금의 국제경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세계화(글로벌화) 때 상황과 유사하다. 제1차 세계화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1차 세계대전 뒤의 거품경제 속 대공황과 블록경제화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뒤 브레턴우즈 체제하에서 발전한 글로벌 국제경제는 1970년대 미국의 상대적 약화와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 이후 신자유주의 거품경제 속에 2008년의 미국발 국제 금융위기(‘리먼 쇼크’)까지 제2차 세계화가 진행됐다. 이후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보호주의 무역과 블록경제화가 지금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트럼프 혁명’이며 이는 제1차 세계화가 거품과 그 반동기를 거쳐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것과 유사한 패턴이다. 다가오는 전쟁의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리먼 쇼크’까지 2차 글로벌화의 반동 ‘트럼프 혁명’
일본 교토대 시바야마 게이타 부교수(경제사상사)는 약 100년 전에 진행된 세계화(‘제1차 글로벌화’)가 거품경제와 붕괴를 거치면서 2번의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제2차 글로벌화’에 이은 거품과 경제블록화로 또 다른 세계대전으로 빠져들 수 있는 위기의 시대라고 본다. 4일 <마이니치신문> 발행 ‘주간 이코노미스트 온라인’에 실린 기고문에서 시바야마 교수는 100년만에 찾아온 2차 위기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비우량주택담보 대출과 부채의 증권상품화로 일어난 거품이 터지면서 찾아 온 월스트리트발 국제 금융위기) 때 고비를 맞았으나 각국의 적극적인 금융 및 재정 총동원(돈 풀기 금융완화)을 통해 최악의 사태는 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위기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게 시바야마 교수 생각이다.
경제사상사가인 그에 따르면, 약 100년 전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무역이나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이동(투자)이 활발해진 글로벌화(세계화)가 진행됐다. 이 시기를 그는 ‘제1차 글로벌화’로 정의한다. 그런데 그 글로벌화가 과잉 진행되면서 각국 국민들의 불만과 반발이 거세지고 결국 보호무역과 통화전쟁(자국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는 환율상승 조작으로 수출경쟁력을 높이려는 국가간 경쟁), 블록경제(특정 지역 국가들 간에 경제협력을 강화하면서, 타 지역에 대해서는 봉쇄/배티적인 무역정책을 취하는 경제권 형태)화가 진행됐다.
글로벌화가 진행되면 값싼 물자들이 해외에서 수입돼 국내 제조업이 쇠퇴하고, 실업자들이 늘면서 국민들 불만이 고조된다. 이것이 정치 불안정을 낳고 자유무역에 반대하며 보호무역과 블록경제를 지향하는 반세계화 반동으로 나아갔고, 결국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시바야마 교수는 1980년대부터 2008년의 ‘리먼 쇼크’(월스트리트발 국제 금융위기) 때까지를 ‘제2차 글로벌화’로 보며, 그 이후의 반동적 반글로벌화가 지금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이 ‘트럼프 혁명’이다.
1차 글로벌화 속에 진행된 대공황이 2차 대전으로
제1차 글로벌화보다 한층 더 고도로 진행된 제2차 글로벌화가 더 안정된 정치·경제·사회를 가져다 주진 않았다. 오히려 단순한 경제위기에 그치지 않고 세계 각국 및 지역에서 정치위기를 동반한 점에서 사태는 더 김각해졌다. 세대간 소득격차 확대와 대도시로의 인구 밀집에 따른 지방경제의 피폐는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글로벌화의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시바야마 교수는 지적한다. 2차 세계대전 전인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이 제1차 글로벌화 흐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주목하라고 그는 말한다.
19세기 후반부터 세계의 무역과 투자가 확대되면서 그 규모는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는 것이 세계 역사학계의 표준적인 견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 유럽과 미국(구미)의 제국주의(제1차 글로벌화)였다. 그 거품이 터진 결과 대공황이 일어났고, 그것은 보호무역과 블록경제화를 불렀으며, 그것은 세계경제를 분단시켰다. 블록경제를 관리하는 국가들의 능력은 예전보다 향상됐다고는 하나 큰 흐름으로 보면 지금이나 그때나 별로 다를 게 없다.
시바야마 교수에 따르면, 제1차 글로벌화도 무역과 자본이동, 이민이 ‘리먼 쇼크’ 전까지와 마찬가지로 활발했다. 세계 전체 차원에서 보면, 민간과 정부의 국제적인 자본이동이 20세기 초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거품이 발생하고 경제위기가 일어나면 세계적으로 연쇄반응이 시작되는 현상은 지금이나 그때나 같다.
글로벌화가 세계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설은 오류
제1차 글로벌화와 제2차 글로벌화는 다른 점도 있다. 제1차 글로벌화를 추진한 것은 정부의 개입을 좋아하지 않는 자유방임적인 분위기였다. 자유무역의 장점과 금본위제를 통한 국제수지의 자동조정 메커니즘(수출입 차액을 금 지불로 조절하는 구조)을 신봉하는 경제학이 그 이론적 지주였다. 제2차 글로벌화를 추진한 신자유주의자들은 금본위제에는 부정적(이것이 다른 점이다)이었으나, 자유무역과 시장 메커니즘을 중시하는 자세는 제1차 글로벌화의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런 글로벌화를 통해 세계는 한층 더 평화로워지게 된다는 생각들이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세계경제가 글로벌화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는 경제적 손실이 매우 큰 전쟁을 선택할 나라가 없을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하지만 그 가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근거없다는 게 확연하게 드러났다. 글로벌화로 유럽 국가들간의 힘(세력)의 균형이 크게 바뀌면서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됐다.
제1차 글로벌화 시대에 각국은 값싼 수입품이 밀려들어 오면서 국내 기업들이 쓰러지고 실업자들이 넘쳐나 자유무역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됐다. 미국과 독일, 프랑스는 19세기 말부터 관세를 높였다. 글로벌화로 인한 경제사회의 혼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나 반발이 축적되고 그것이 민주주의와 결합되면서 각국은 보호주의와 블록경제화로 매진했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까지 내달았다. 글로벌화 속에서 돌진해 나간 자본주의가 반드시 국민국가의 발전으로 귀결되진 않는다는 것이 제1차 글로벌화의 교훈이며, 오히려 그것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시바야마 교수는 지적한다.
해외투자 비판하고 보호주의 무역을 설파한 케인즈
대공황이 일어난 뒤인 1933년에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국가적 자급’이라는 에세이에서 “대량생산이 진행된 현재, 자본은 어디에서 생산하더라도 상관없기 때문에, 자유무역의 장점은 사라졌다”고 썼다. 각국이 각자 유리한 물품들을 생산해서 교환(무역)하는 게 상호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 국제무역론을 부정하는 듯한데, 시바야마 교수에 따르면 게인즈는 일찍부터 영국의 해외투자를 비판했다. 해외투자로 자본이 나라 바깥으로 유출되면 국내투자가 정체되고 그것이 실업을 낳고 노동임금 상승을 억제하게 된다고 케인즈는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는 멀리 에둘러서 보호주의의 필요성을 설파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 엉뚱한 주장은 아니었다. 1930년대는 블록화가 진행돼 세계무역이 크게 후퇴했다. 그러나 국내고용 면에서 그것은 개선 효과가 있었다. 미국의 뉴딜 정책으로 대표되는 각국의 경제통제 강화는 그 뒤의 전시경제 돌입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지만, 국민경제를 제조직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트럼프 혁명’도 그런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세계경제의 정치적 ‘트릴레마’(trilemma. 삼자 선택 딜레마)라는 얘기가 있는데, 미국 하버드대의 대니 로드릭 교수가 얘기한 가설이다. 즉 ①글로벌화, ②민주정치, ③국가주권 이 세가지 중에서 조합 가능한 선택지는 논리적으로 2개밖에 없다는 가설이다. 3개를 모두 선택할 수는 없다. 어느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지금의 반글로벌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다.
글로벌화를 제한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해법?
시바야마 교수는 여기에서, 앞서 얘기한 케인즈의 보호주의를 현대적으로 계승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로드릭 교수도 글로벌화를 제한하고, ②번과 ③번 조합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 노선의 모델로 그가 예로 든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뒤의 브레턴우즈 체제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경상수지 균형과 국내의 완전고용, 다양한 복지정책을 그 목표로 삼았다. 대외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안정이 목적이었다. 2차 대전 뒤의 통화체제를 두고 논의한 브레턴우즈회의에서 미국 재무부 차관보로 그 회의의 미국 대표였던 해리 화이트와 영국 대표 케인즈가 격론를 벌이기도 했지만, 그런 이념면에선 둘이 일치했다. 글로벌화를 일정하게 제한한 브레턴우즈 체제에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특히 국제적인 자본이동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된다는 데에 두 사람은 공감했다. 국가 단위의 경상수지를 가능한 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수준에서 유지하면서 세계무역의 전체 양을 늘려가야 한다는 것이 케인즈와 화이트 등이 생각한 국제주의였다.
브레턴우즈 체제 창시자 화이트, 매카시즘에 희생
화이트는 그 뒤 소련 스파이 혐의를 받아 고생하다 56세 때인 1948년 8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그가 소련 쪽과 소통한 것은 확인되지만 그때는 소련이 미국과 같은 연합국의 일원인 시절이었다. 히틀러의 독일 및 히로히토의 일본에 맞서 함께 싸우던 2차대전 동지국이었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반공주의 매카시즘 광풍이 본격화하지만, 화이트가 정말 소련 스파이였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화이트와 함께 브래턴우즈 체제를 만든 케인즈는 그보다 일찍 1946년 4월에 63세 나이로 사망했다. 매사를 ‘빨갱이냐 아니냐’는 잣대로 갈라치기 한 것은 당시 이미 시작된 동서냉전 반공주의 악습의 결과이자 원인이었다.
가속 중인 반글로벌화 속 국가간 충돌 ‘트럼프 혁명’
시바야마 교수도 브레턴우즈 노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것을 실현하는 데에는 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브레턴우즈 체제는 당시 전승국이었던 미국의 압도적인 경제력과 지도력을 배경으로 성립될 수 있었다. 지금의 미국은 그럴 힘도 없고, 새로운 국제주의 질서를 수립하겠다는 생각도 없어 보인다.
따라서 시바야마가 생각하는 해법은, 당분간 글로벌 경제를 미세 수정(조정)하면서 혼란으로 이어질 경제적 타격을 완화하고 벌충하는 실업대책과 복지정책을 실행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앞에는 반글로벌화가 가속하면서 벌어질 국가간 충돌이 기다리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과 ‘트럼프 혁명’은 그것이 이미 시작됐다는 걸 보여 준다.
이른바 ‘대국’들은 그나마 그런 대응을 주도적으로 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소국가들보다는 유리하다. 프랑스 역사인구학자 에마뉘엘 토드는 이 격동기의 미국 유럽, 그리고 중국 러시아의 분열과 이합집산에 섣불리 끼어들지 말고 조용히 지켜보면서 일이 돼가는 꼴을 살피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일본에 충고했다. 한국의 최근 움직임은 가만히 지켜볼 힘조차 없거나 자발적으로 섣불리 그 씨름판에 뛰어들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만든다. 독자적인 대응전략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