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민주주의의 방패일까, 칼날일까?

다수당 ‘줄탄핵’과 대통령 거부권 남발 충돌

12.3 비상계엄 대통령의 중대한 ‘헌법 남용’

헌법상 ‘비상수단’이 일상적 ‘정치무기’ 전락

탄핵소추에 공청회 등 독립적 검토 추가를

초당적 협의체 구성 대통령-국회 갈등 조정

2025-04-13     황광선 시민기자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이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2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 게양된 깃발이 바람이 날리고 있다. 2025.3.23. 연합뉴스

근래에 한국 정치권은 헌법적 권한의 극단적 활용 논란을 일으켰다. 국회 다수당은 국무위원에 대한 탄핵소추를 시도하고, 대통령은 국회 입법에 연이어 거부권을 행사했다. 명목상으로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 행사가 맞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우려는 깊다. 헌정 질서의 '비상 수단'들이 일상적인 '정치 무기'로 전락할 때, 우리 민주주의의 건강은 과연 안전한 것일까? 이 물음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여러 민주 국가들이 유사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헌법 절차의 남용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잠식할 수 있는지에 관한 학계의 통찰도 쌓여 있다.

헌법적 하드볼…규범의 경계까지 밀어붙이는 정치

미국의 헌법학자 마크 터쉬넷(Mark Tushnet)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헌법적 하드볼(constitutional hardball)'이라고 칭했다. '헌법적 하드볼'이란 법률상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기존의 정치 관행이나 민주주의의 비공식적 규범과는 충돌하는, 공격적이고 편법적인 권력 행사를 뜻한다(Tushnet, 2004). 쉽게 말해 규칙 위반은 아니지만 게임의 정신을 거스르는 플레이인 셈이다. 터쉬넷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를 하는 정치세력은 자신들이 이판사판의 승부를 벌이고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관행이나 신사협정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패배하면 영구히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절박감이 이런 행태를 부추긴다는 분석이다.

헌법적 하드볼이란 개념은 오늘날 여러 민주주의 이론가들의 경고와 맥을 같이 한다. 하버드대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Levitsky & Ziblatt, 2018)은 현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버팀목으로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자제의 규범(forbearance)을 강조했다. 서로를 적이 아닌 경쟁자로 인정하고, 법률이 허용하는 권한일지라도 절제하여 행사하는 문화가 민주주의의 안전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드러운 가드레일'이 무너질 때 정치권은 헌법적 하드볼이라는 강경 전술로 기울어지기 쉽다.

 

남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7일(현지시간) '페론주의(Peronism) 충성의 날'을 맞아 친정부 시위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1945년 10월 17일 투옥된 페론주의 창시자인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대적 시위가 벌어진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블렛은 실제 사례로 아르헨티나를 들어 설명했다. 형식상 미국 헌법을 거의 그대로 베낀 아르헨티나 헌법 아래에서, 후안 페론 대통령은 대법관들을 탄핵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사들로 교체하고는 대통령 모독법안을 통과시켰다. 헌법 조항 자체는 문제없어 보였지만, 견제 장치를 무력화하고 권력에 도전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도구로 악용된 것이다. 이처럼 헌법적 하드볼은 민주주의의 비공식적 규범을 깨뜨림으로써 체제의 균형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

탄핵소추와 법률안 거부권 역시 원래는 헌법이 마련한 최후의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상적인 정치 쟁투의 수단이 되면 문제가 된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은 최근 보고서에서 “탄핵과 같은 극단적 수단의 남용을 자제하는 관행이 무너지면 이는 민주주의 침식의 전형적인 징후”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탄핵 남발은 “헌정 질서를 지탱하는 규범을 잠식해, 결국 정부 기능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헌법이 예정한 비상 절차를 상시적 정치 무기화할 때, 민주주의는 서서히 마비되어 간다는 진단이다.

Dixon과 Landau의 경고: 남용적 헌법 차용의 함정

그렇다면 권위주의적 야심을 가진 세력은 어떻게 이런 헌법 무기화를 정당화할까? 헌법학자 딕슨(Rosalind Dixon)과 랜더우(David Landau)는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바로 '헌법 차용 남용(abusive constitutional borrowing)'이다. 이는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이 겉보기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설계와 논리를 모방하지만 실제로는 반자유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는 현상을 가리킨다(Dixon & Landau, 2021). 쉽게 말해 민주주의 국가에서나 볼 법한 그럴듯한 헌법 조항과 제도를 도입하지만, 그 의도는 민주주의의 약화를 노린다는 것이다.

딕슨과 랜더우는 세계 각국의 사례 연구를 통해 이러한 전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밝혀냈다. 가령, 독재자는 사법 독립을 명목으로 헌법재판소를 강화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사람들이 법원을 장악하도록 하고, 부패 척결을 빌미로 야당 정치인을 탄압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는 식이다. 표면적으로는 선진 민주주의의 제도를 채택한 듯 보여도,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교묘한 전략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헝가리와 러시아 등 신흥 권위주의 국가들을 연구해온 킴 레인 쉐퍼리(Kim Lane Scheppele) 교수는 이를 두고 '독재적 합법주의(autocratic legalism)'라고 이름 붙였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등 민선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군부 쿠데타 같은 노골적 불법이 아니라, 법의 언어를 빌려 민주주의를 조금씩 잠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30년대 나치의 부상을 지켜본 독일의 정치철학자 칼 뢰벤슈타인(Karl Loewenstein)은 일찍이 “파시즘은 합법성의 외피를 공식적으로 획득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민주주의자들이 쿠데타보다는 “공부하는 합법성(studious legality)”에 기대어 권력을 잡는 파시즘의 전략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체코 출신의 연구자 얀 페트로프(Jan Petrov)는 이러한 딜레마에 주목하여, 헌법적 행위의 남용성을 판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페트로프는 어느 헌법 조치가 정당한 개혁인지 남용적 개악인지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헌법 개정의 ‘선의’를 입증하기보다는 그 변화가 민주주의에 미치는 구조적 영향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Petrov, 2022). 특히 그는 견제와 책임 메커니즘(accountability mechanisms)에 중대한 약화를 가져오는지 여부가 핵심적인 판단 기준이라고 지적한다. 새로운 헌법 조치나 권한 행사가 권력자의 책임성을 감소시키고, 권력 분립의 작동을 저해한다면 그것은 남용적일 가능성이 크다.

 

윤석열 정권 퇴진 강원운동본부는 26일 오후 강원특별자치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한 뒤 대형 망치로 '검찰 독재, 민생 파탄, 거부권 남발'이라고 쓴 푯말을 내리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4.11.26. 연합뉴스

한국의 헌정 위기와 민주주의의 경고등

최근 한국에서는 헌정 사상 유례가 드문 일들이 잇따랐다. 국회 다수당이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를 의결하는가 하면(소위 ‘줄탄핵’), 대통령은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안들에 대해 연거푸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야당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지지 않으니 헌법적 절차에 따라 문책한 것”이라 주장하고, 대통령실은 “의회 다수파가 입법권을 남용해 국정을 방해하니 불가피하게 거부권을 행사했다”고 맞선다. 양측 모두 헌법이 준 권한을 사용했을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시민의 눈에 비친 정치 풍경은 협력과 토론은 사라진 채 '헌법 무기 창고'를 총동원한 전면전과 같다.

탄핵소추는 본래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가 중대한 위법 행위를 저질렀을 때 쓰라고 만든 헌법의 비상 구제수단이다. 미국 연방헌법은 탄핵 사유를 '반역, 뇌물, 그 밖의 중대한 범죄 및 비행'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한국 헌법은 구체적 사유를 명시하진 않지만 유사한 기준이 요구된다. 탄핵 발의 자체가 정치적 승부수로 사용되면서 탄핵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 역시 유사한 우려를 낳는다. 대통령제 하에서 거부권은 입법부의 일방적 폭주를 제어하는 마지막 수단이지만, 거듭된 거부권 행사는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정책 조율 메커니즘을 무력화할 수 있다. 여소야대 구도 속에서 야당은 입법을 밀어붙이고, 대통령은 거부권으로 응수하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정책의 연속성과 예측 가능성은 약화되고 있다.

12.3 계엄 조치 역시, 대통령의 중대한 ‘헌법 남용’이다.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문에 명시되었듯, 대통령이 쓸 수 있는 ‘민주적 절차’가 있었음에도(가령, 임기 중 국회의원선거를 통한 대국민 호소, 헌법 개정안 발의, 국가 안위에 관한 국민투표 시행 등), 대통령은 ‘무력’의 길을 택했다.

정치가 타협의 기술이 아닌 힘의 대결이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그 생명력을 잃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헌법의 기본 원리마저 경쟁적 무력 시위의 수단이 된다. 레비츠키와 지블랫(2018)이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법의 문자뿐 아니라 그 운용에 동반되는 관용과 절제가 있어야 지속 가능하다.

 

초당적정치개혁 의원모임 운영위원회 긴급 기자회견이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리고 있다. 2023.6.19. 연합뉴스

제도 개혁과 정치 문화의 전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조건

이러한 악순환의 정치를 끊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와 정치 문화의 동시 개혁이 요구된다. 먼저, 탄핵소추 요건을 명확히 하고 절차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국회의 탄핵소추 권한이 정치적 무기로 오·남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법률적 요건을 강화하거나 발의 절차에 독립적인 검토 단계(예: 공청회, 청문회)를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이는 탄핵을 최후의 수단으로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안전판이 될 것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관련해서는 대통령-국회 간 갈등이 반복될 경우 중재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초당적 협의체의 구성을 제도화할 수 있다. 미국의 연방정부 셧다운 위기에서 보듯, 정치적 교착을 조정할 제도적 메커니즘이 부재할 경우 민주주의는 쉽게 마비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딕슨과 랜더우의 분석은 국제관계와 헌법 동형화 현상을 중심으로 하지만, 오늘날 개별 국가 차원의 헌법 개정 논의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 사회는 헌정 질서의 미래를 둘러싼 격렬한 논의에 직면해 있다. 헌법 개정, 선거제 개편, 행정 및 정치 구조 전환(예: 선관위의 헌법적 지위, 감사원의 소속, 수사구조 조정, 국회 양원제 등) 논의가 다시금 활발해지는 시기에,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 한다.

- 특정한 개헌이나 제도 변화가 민주적 책임성과 권력 분립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조치가 실제로 다양한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는가?
- 헌법의 형식만 따르고 그 정신(spirit)을 위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헌법의 조문을 개선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것이 어떤 의도와 맥락에서 작동하는지를 끊임없이 감시할 때에만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 더불어, '정치의 사법화' 같은 저급한 수단은 지양하고 정치(政治)의 본질인 '토론과 절제'를 통해 '바름(正)'을 추구하는 치리자들을 우리 사회는 길러내야 할 것이다. 정치 자체가 국민에게 짐이 되면, 국회의원 등에 대한 국민소환제 확대 등, 국민참여제도의 강화로 갈 수 밖에 없다.

헌법이 허용한다고 해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브루스 애커먼(Bruce Ackerman)은 헌정 위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의 정치적 상상력과 헌법적 애국심을 강조한 바 있다. 제도가 작동하려면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바탕이 되어야 하며,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이 절제와 숙의를 통해 책임 있는 정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시민 역시 정치 권력의 남용을 외면하지 말고, 선거와 여론을 통해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최종 방어선이자, 헌법이 진정으로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참고 논문)

- Ackerman, B. (1991). We the People: Foundations. Harvard University Press.

- Dixon, R., & Landau, D. (2021). Abusive constitutional borrowing: Legal globalization and the subversion of liberal democracy. Oxford University Press.

- Levitsky, S., & Ziblatt, D. (2018). How democracies die. Crown Publishing Group.

- Petrov, J. (2022). How to detect abusive constitutional practices. European Constitutional Law Review, 18(3), 518–540.

- Scheppele, K. L. (2018). Autocratic legalism. University of Chicago Law Review, 85(2), 545–583.

- Tushnet, M. (2004). Constitutional hardball. John Marshall Law Review, 37(2), 52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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