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해법, 빨리 밀어붙이라는 기시다…윤석열 진퇴양난

대법원 “전범기업 배상하라”…일본 “1965년 다 끝나”

윤 정부 ‘전범기업 면죄부’ 공식화 …굴욕 외교 실토

촛불 “박근혜처럼 퇴진 서막 열 것”…후폭풍 거세져

초조한 기시다…히로시마 G7 회의 윤석열 초청 검토

2023-01-15     이유 에디터

 

기시다 총리 어깨에 손 얹은 바이든 대통령. 2023. 01. 13. AP=연합뉴스

“가능한 한 신속히 현안을 해결해 한일관계를 건전한 형태로 되돌려 발전시켜 나가겠다.”

방미 기간인 지난 13일(현지시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강연에서 했던 말이다. 그는 ‘역사의 전환점에서의 일본의 결단’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여러분도 걱정하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운을 뗀 뒤 이렇게 말했다.

기시다 총리가 말하고자 했던 진의를 파악하려면 일종의 ‘통역’이 필요하다. 여기서 그가 거론한 ‘현안’이란 강제징용(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가 대표적이다. 여태껏 강제징용 문제가 어떻게 진행돼왔는지,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무엇인지 그 맥락을 살펴야 진의가 드러난다.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의 현장 군함도(일본명 하시마) [연합뉴스 자료사진]

대법원 “전범기업 배상하라”…일본 “1965년 다 끝나”

한국 대법원은 2018년 10월과 11월 전원합의체 선고를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의 “정신적 피해, 인권 침해에 대한 개인 위자료 청구권 행사”를 인정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원고인 피해자들에게 피고인 신일철주금(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 기업들이 각각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도록 했다. 뒤이어 이에 불응하는 전범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하고 현금화 명령을 앞두고 있었으나 작년 7월 윤석열 정부의 요청으로 현금화는 지금까지 중단된 상태이다.

대법원의 이 같은 판결은 강제징용 피해자 위자료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의 대일 8개 요구 항목에 전혀 포함되지 않았던 만큼 국제법상 개인의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법리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의 "일관된 입장"은 강제징용 문제는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났다는 것이다. 청구권협정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 유무상 5억 달러를 지불한 것을 끝으로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기시다 정부는 여기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강제노역 불법행위에 대해 전범 기업들이 사과하거나 배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버티는 중이다.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가 1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2023.1.12. 연합뉴스

윤 정부 ‘전범기업 면죄부’ 공식화 …굴욕 외교 실토

윤석열 정부가 12일 외교부 주최 공개토론회에서 내놓은 강제징용 해법은 한마디로 피고인 미쓰비시와 일본제철 등 가해 기업에게 공식으로 면죄부를 주는 내용이다.

대법원이 지급을 명령한 위자료(배상금)를 가해 전범 기업들이 아닌 제3자가 원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대신 갚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행정안전부 산하 공익재단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청구권협정 수혜기업인 포스코 등 한국 기업들의 기부를 받아 재원을 조성한다.

윤 정부는 불법 행위로 인한 “정신적 피해, 인권 침해에 대한 위자료”를 ‘판결금’이란 모호한 용어로 바꾸고, 위자료 지급 문제를 채권 채무 관계라는 오로지 ‘돈’의 문제로 단순화함으로써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의 불법 행위를 덮고자 세심하게 배려하는 인상을 주었다.

특히 대일 실무협상 책임자인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피고기업의 판결금 지급을 이끌어내기는 사실상 어렵다”거나 “확정판결 피고기업이 전체 강제징용 문제를 대표해 사과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해 일본 전범 기업으로부터 최소한의 사과나 재원 투입도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윤 정부가 시종일관 일본에 굴욕적으로 끌려다녔음을 실토한 셈이다.

 

14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숭례문 앞 대로 구간에서 열린 '23차 촛불대행진'(4차 전국집중촛불)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 1. 14. 사진 이 호 작가

촛불 “박근혜처럼 퇴진 서막 열 것”…후폭풍 거세져

윤 정부의 예상과는 달리 후폭풍이 거세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대표는 1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정부가 인권 침해 사건을 단순히 돈 지급 문제로 전락시켰다”며 “정부의 구걸 외교에 준엄한 심판이 내려지도록 힘을 모으겠다”고 주장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94) 할머니도 “우리나라에서 주는 돈을 내가 왜 받아야 하나”라면서 “무엇보다 일본으로부터 잘못됐다고 사죄받는 것이 내 소원이다. 우리나라가 무엇이 아쉬워서 벌벌대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윤 정부의 저자세 외교를 질타했다.

촛불행동이 14일 주최한 ‘제23차 촛불대행진’(4차 전국집중촛불)에서도 윤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에 대한 규탄이 이어졌다. 박종철 열사 36주기이자 10·29 이태원 참사 3차 추모제가 열린 이날 시민 5만 명(주최 측 추산)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행사에서 ‘친일파 매국노 윤석열은 퇴진하라’ 등의 구호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첫 발언자로 무대에 오른 이연희 겨레하나 사무총장은 “사법주권도 역사의 정의도 피해자 인권도 깡그리 무시한 굴욕적, 매국적 해법”이라며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합의로 박근혜 퇴진의 서막을 열었던 것처럼, 윤석열 정부가 강제동원 해법을 강행한다면 윤석열 퇴진 운동과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해 12월 19일 오전 광주시의회에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양금덕 할머니 인권상·서훈 무산 관련 정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12.19. 연합뉴스

징용 해법, 빨리 밀어붙이라는 기시다…윤석열 진퇴양난

기시다의 SAIS 강연 발언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일관된 입장’과 연관시킬 때에만 그 진의가 드러난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최종적이고 완전히 해결”됐고 이 사안과 관련해 일본이 할 일은 더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가능한 한 신속한 현안 해결’이란 그의 발언은 일본 전범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윤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을 가능한 한 신속히 밀어붙이라고 압박하는 말이다. 한국 내에 반발이 거세다고 해서 절대 우물쭈물하지 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매듭지으라는 주문임은 물론이다.

한국 내 여론이 의외로 부정적인 것에 당황한 기시다 총리가 자칫 시간을 끌다가 ‘공들여온 일’을 망치는 게 아닌가 하는 초조함을 느꼈음직하다. 그가 말한 ‘건전한 형태의 한일관계’도 긴급히 빈공 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던 미국의 압박에 밀려 굴욕적 협약을 맺은 1965년 박정희 정권 때의 한일협정체제로 돌아가자는 얘기에 다름이 없다. 기시다로서는 한국을 발밑에 뒀던 그 옛 시절이 좋았다는 인식을 드러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윤 대통령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작년 11월 한일 정상회담서 기념촬영하는 윤석열(오른쪽)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 [연합뉴스 자료사진]

초조한 기시다…히로시마 G7 회의 윤석열 초청 검토

기시다의 불안감은 다음 날에도 확인됐다. 이튿날인 14일 미국 워싱턴D.C.에서 행한 기자회견에서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꼭 이 노력을 계속했으면 좋겠다”면서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쌓아온 우호 관계의 기반을 바탕으로 한일관계를 건전한 형태로 되돌리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한국 정부와 지속적으로 긴밀히 의사소통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미국과 일본 언론을 인용해 연합뉴스가 전했다. 연이틀이나 ‘관계 개선 의지’를 밝힌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일본 언론들의 때아닌 ‘바람잡이’ 역할도 눈길을 끌었다. 요미우리 신문은 “기시다 총리가 북한에 가까웠던 모습이 두드러졌던 문재인 전 정권과는 달리 미·일 모두 윤석열 정권이라면 한·미·일 협력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기시다 총리는 주변에 ‘윤 대통령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신문은 또한 기시다가 오는 5월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윤 대통령을 초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한국의 G7 정상회의 참석을 제일 반대했던 일본 정부가 입장을 바꿀 수도 있음을 언론에 흘린 것이다. G7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싶다면 그 이전에 강제징용 문제를 ‘알아서’ 확실히 매듭지으라는 유혹 섞인 압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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