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제로썸’, 한국 사회의 진실을 인양한다
세월호 참사 후 ‘의지'로 10년 동안 추적해온 진실
‘삶은 소대가리 같은’ 정부 발표 믿어야만 하나
아직 수많은 진실이 바다 속 가라앉아 있는 사회
한 개인의 진심이 그 진실의 일단을 길어올린 영화
신예 윤솔지 감독이 만든 세월호 영화 ‘제로썸’은 일종의 인터뷰 다큐멘터리이다. 수많은 증언, 진술, 코멘트가 이어진다. 학술적인 것도 있고 ‘저널스러운’ 것도 있으며 법과 정치적인 함의가 담긴 것도 있다. 그 중 가장 귀에 콕 박히는 말이 스님 명진이 하는 말이다. 그의 코멘트는 딱 한 줄이 들어간다.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일이오!” 명진은 세월호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이 국가기밀로 분류되거나 그렇게 쉬쉬거리는 것에 대해서 일갈한다. 삶은 소머리가 웃을 정도라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이겠는가.
윤솔지의 ‘의지’와 ‘진심’으로 추적한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일’
영화는 의지만 가지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본과 물질과 인력, 네트워크가 총동원돼야 한다. 그럼에도 나온 작품이 예술이냐 장삿속 물건이냐, 그 가르마를 타는 기준은 아무래도 의지의 유무이다. 인간의 의지. 다큐멘터리는 종종 자본 ’따위’ 없이 오로지 정신력만으로도 만들어진다. 다큐의 위대함은 인간의 선한 의지 때문에 이룩된다. 영화 ‘제로썸’은 지난 10년간 이 참사를 꾸준하고 끈질기게 추적한 ‘의지’의 산물이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영화 ‘제로썸’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10년 후에 ‘자 이제부터 사건 기록을 꼼꼼히 따지고 살펴보자’, 의 차원에서, 그렇게 10년 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제로썸’은 사건이 발생한 2014년 4월 16일 이후부터 2024년 4월까지 10년간을 줄기차게 진실을 파헤쳐 온 작품이다(그러니 제작 완료하고 공개되기까지 1년이 걸린 셈이다). 그러니까 10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지닌 성취의 꼭지점이다. 다큐에서는 푸티지의 힘을 당할 자가 없다. ‘제로썸’은 10년을 찍고 모아왔다. 푸티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 수많은 인터뷰들과 스케치 화면들을 골라내고, 솎아내면서도, 전체의 서사에 맞춰내는, 편집의 과정이 지옥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정통으로 공부한 적 없이, 외국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초짜’ 감독 윤솔지가 이걸 해낼 수 있었던 데에는 무식해서 용감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세월호 아이들에 대한 진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감추고 있나, 세월호는 왜 침몰했나
이 다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가장 큰 축은 왜 아이들을 그렇게 많이 죽게 ‘내버려 뒀느냐’이다. 초동 대처가 너무 미흡했다는 점은 우리 모두가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다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 행정당국이 생각보다 너무 미적댔음을 보여 준다. 서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 무언가를 감추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 그 국가 기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등에 대해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파고든다. 유가족들은 도청 및 사찰을 당했고 기무사 요원들이 현장에서 암약했다는 점, 황교안이라는, 박근혜 탄핵 후 대통령 대행을 맡았던 이 인물이 관련 문서를 30년 간이나 봉인시켰다는 점 등등을 추적한다. 그 과정의 얘기가 흥미와 분노를 동시에 유발시킨다.
이 다큐의 또 다른 축은, 그리고 어쩌면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세월호가 왜 침몰했느냐, 침몰원인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 역시 아직도 최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암초에 걸렸다는 설(김지영 감독의 또 다른 세월호 다큐 ‘그날, 바다’가 여러 원인 중 하나로 제기하고 있는 설)도 있고 내인설, 곧 내부 장비 점검 부실이나 조타수의 운전 미숙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내인설은 정부의 공식 발표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스님 명진의 말마따나 삶은 소대가리 얘기일 뿐이다.
그 후 10년 ‘당신의 세월호는 끝났습니까?!’
윤솔지의 ‘제로썸’은 보다 합리적인 의심에 가까운 ‘외부 충격설’을 따라간다. 미군 잠수함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새로운 음모론으로 치부할 사람들도 있겠으나 다큐는 그 점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구성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내부 인사들의 증언을 담아낸다. 세월호 유가족들, 잠수사들, 사건을 조사했던 검사 변호사 기자들은 비교적 한결같이 ‘사참위’가 외부 충격설을 배제할 수 없으나 배제할 수 없을 만큼은 아니다, 라는 ‘삶은 소 대가리’ 논법으로 진상을 서둘러 덮었음을 지적한다. 외부 충격설은 새로운 얘기는 아니나 ‘제로썸’은 가장 합리적 논거로 사건을 재구성하게 하고 재환기 시키며 재각성 시킨다. 여기에 윤솔지는 포스터 문구로 사람들의 가슴에 쐐기를 박는다. ‘당신의 세월호는 끝났습니까?!’
사회적 대참사는 곧바로 영화가 되지 않는다. 사건에 대해 더 이상 통곡하지 않기까지 내성의 벽을 쌓을 시간이 필요하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뒤 그 비극을 배경으로 하는 프랑스 알랭 레네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은 1959년에 만들어졌다. 14년 후이다. 명작이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너무 서둘렀다. 참사 5년 만인 2006년에 만들어졌다. 졸작이었다. 삼풍붕괴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 역시 2006년이었으며 9년 만이었다. 영화는 그닥 주목받지 못했다. 아직 사람들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세월호의 시간은 충분조건인가 아직 필요조건인가.
신의 손길 느끼게 하는 비전문 신임 감독의 세공력
그러나 다큐는 언제 어디서든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 때론 전체를 조망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사건의 한 부분만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우도 있다. 윤솔지의 다큐는 사건 전체의 개요를 비교적 일목요연하게 다시 정리하고 이것이 아직 미제임을 확실하게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거의 효시격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영화 제작이나 연출, 배급, 유통 경험이 없는 비전문가이자 데뷔격인 감독의 손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제로썸’은 그래서 다분히 액티비스트의 작품으로 보이는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기이한 세공력이 느껴진다. 음악의 사용도 다소 범상치 않다. 전체 구성의 리듬도 나쁘지 않다. 다큐가 갖는 심금을 울리는 효과를 위해 작가는 때론 치고 빠지기를 잘해야 하는데 그 점도 나쁘지 않다. 유가족의 분루(憤淚)가 과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편집에서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톤앤매너가 좋다. 놀랍고 신기할 뿐이다.
잠수부의 증언에서 사람들은 울컥할 것이다. 그가 어떻게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는지, 물 아래서 위로 올라오면서 아이들의 얼굴을 닦아주고 훔쳐줬다는 대목은, 거의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신이 있었다면 그렇게 해 주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 인터뷰 잘 담아냈다. 유명 앵커 손석희는 ‘그답지 않게’ 슬픔을 감추지 않는다. 세월호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거기서 잠시 호흡을 고른다. 한 민간 잠수사의 마지막 대사는 화룡정점이다. 세월호 사건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유는 죽지 말아야 할 아이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픈 각성의 바늘과 침이 한 가득 머리에 꽂히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바다 속 수많은 진실 인양하기 위한 우리들의 발품
극영화는 진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큐는 진심만으로 만들어진다. 만들어져야 한다. ‘제로썸’은 한 개인(혹은 한 창작집단)의 진심이 한 사회의 진실을 길어 올린 영화이다. 어쩌면 이것이 시작일 것이다. 우리 사회만큼 인양해야 할 진실이 저 바다 속 깊이 많이 가라앉아 있는 나라도 없다. 세월호의 진상이 밝혀지면 12.3 계엄의 진실도 알려질 것이다. 진실은 그렇게 하나하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 작품이 도화선이 될 수 있음을 비평적으로 크게 치하하는 바이다. 네이버나 다음, 구글 등 포털에는 ‘제로썸’에 대한 개봉 정보조차 나오지 않는다. 4월 2일 전국 22개 군데 극장에서 개봉한다. 발품이 필요하다. 당신이 정의에 대해서 고민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그 발품을 주저하지 마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