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모범생' 현대차 31조 대미 투자…국내는?
정의선 “미국 내 철강·자동차 공급망 강화”
트럼프 “현대차 위대…관세 낼 필요 없어”
한국 기업들 대미 투자 확대 불가피하지만
국내 투자 줄어 제조업 경쟁력 약화 우려
철강·자동차는 이미 국내 생산 감소 확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 위협에 현대차그룹이 미국에 21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한화로 약 31조 원에 달하는 거액을 들여 자동차와 철강 공장을 새로 짓고 에너지와 미래산업에도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의 대규모 대미 투자는 트럼프 발 관세 전쟁에 대응하는 차원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12일 외국산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했다. 다음 달 2일에는 모든 교역국을 대상으로 상호관세를 부과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 미국에 120만 대 생산능력 구축
현대차그룹이 대미 투자를 확대하는 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미국이 최대 수출국이기 때문이다.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와 철강에 관세가 붙으면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수출 실적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현대차는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대미 투자 현황과 향후 계획 등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등 발 빠르게 대응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정책의 성과를 언급할 때마다 현대차를 모범 사례로 꼽은 배경이다.
미국을 방문 중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24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 주재로 백악관에서 열린 대미 투자 발표 행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앞으로 4년간 미국에 210억 달러를 신규로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자동차 생산에 86억 달러, 부품과 물류, 철강 분야 61억 달러, 미래 산업과 에너지 분야 63억 달러 등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자동차 분야에서는 미국의 세 번째 현지 공장인 조지아주 메타플랜트아메리카의 생산능력을 30만 대에서 50만 대로 증설하는 데 쓰인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앨라배마주 현대차 공장과 조지아주 기아 공장에서 연간 약 70만 대를 생산 중이다. 메타플랜트아메리카 공장 증설이 끝나면 현대차그룹은 미국에서 연간 총 120만 대 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현대제철도 루이지애나에 전기로 제철소 건설
철강 계열사인 현대제철도 루이지애나주에 연간 270만 톤 생산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를 건설한다. 여기에서 강판을 생산해 미국 현지 자동차 공장에 공급할 예정이다. 정의선 회장은 루이지애나주에 건설할 제철소를 자세하게 소개하며 “이번 투자의 핵심은 미국의 철강과 자동차 부품 공급망을 강화할 60억 달러의 투자”라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자동차와 철강 외에 자율주행과 로봇, 인공지능(AI), 원자로 등 미래 산업과 에너지 분야에서도 대미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혔다.
정 회장 발표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현대차의 대미 투자가 관세정책의 성과라며 거듭 자랑을 늘어놓았다. “현대차가 곧 연간 100만 대 이상의 미국산 자동차를 생산할 예정이다. 이 투자는 관세가 매우 강력하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현대차그룹은 미국에서 철강과 자동차를 생산하게 되며, 그 결과 관세를 낼 필요가 없다.”
현대차 대미 투자, 트럼프 대통령 맞춤형 전략
현대차의 통 큰 대미 투자는 관세 전쟁을 촉발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맞춤형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가 싫으면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고 주장해왔다. 자동차와 철강은 전후방 파급 효과가 매우 큰 산업이다. 원자재와 부품을 공급하는 수많은 협력업체가 필요하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같은 장치 산업에 비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 미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이 “진정 위대한 기업인 현대차와 함께하게 돼 큰 영광”이라고 추켜세운 건 투자 효과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현대차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평가가 한국과 미국의 통상 협상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현대차의 대미 투자는 12·3 내란 사태로 한국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각자도생하는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현대차 외에 다른 한국 기업들도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을 피하려고 대미 투자를 늘리거나 미국산 제품 구매를 확대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한국 기업들의 자발적 노력이 두 나라의 관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협상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대미 투자 확대로 위협받는 한국 제조업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 확대는 국내 제조업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업황이 좋지 않은 철강산업은 이미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국내 주요 철강업체들은 일부 국내 공장을 폐쇄하거나 가동률을 낮추고 있다. 대다수 철강업체의 국내 공장 가동률은 70~80%대에 불과하다. 세계적으로 철강 수요가 감소한 데다 중국산 제품이 과잉 공급된 탓이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는 길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철강만큼 절박한 상황은 아니지만, 국내 자동차 산업도 전망이 어둡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자동차 생산량은 약 413만 대로 세계 7위였다. 멕시코에 밀리며 세계 생산량 순위가 한 단계 낮아졌다. 수출이 조금 늘었으나 내수 판매가 큰 폭으로 줄면서 생산량이 전년 대비 2.7% 감소했다.
국내외 환경을 고려하면 한국 제조업은 계속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내수 경기침체로 국내 소비가 줄고, 무역전쟁으로 수출도 늘어나기 어렵다. 국내 제조업에 대한 투자 요인도 사라지는 것이다. 제조업에서 투자가 줄면 지역 경제가 망가지고 일자리도 감소한다. 이런 점에서 현대차그룹의 수십조 원대 대미 투자는 제조업 강국인 대한민국의 쇠락을 알리는 경종일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