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구제 개편' 비례대표제 강화에 근거해야
1. 요동치는 선거구제 개편논의
윤석열 대통령이 모든 언론을 배제하면서 조선일보와만 단행했던 신년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을 제안하면서 정치권이 뜨겁게 요동치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과의 사전 논의도 알려졌고, 류승민, 김동연, 박지원 등 소위 빅스피커들의 긍정적 평가도 뒤를 이었다. 조선, 중앙, 동아를 비롯, 한겨레, 경향을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들에서 긍정적 평가가 쏟아졌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지는 칼럼들도 확인된다. 35년 만의 선거구제개편논의를 강조하거나,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개혁 구상을 소환해서 중대선거구제 개편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일각에서는 선거구제 개편만이 아니라 내각제 개헌의 정당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윤 대통령은 그 진의와 상관없이 정치개혁 의제를 선점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대선 이전부터 선거구제 개편을 포함한 정치교체 주장을 펼쳐왔던 민주당은 논의의 주도권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당내 분란과 지도력 훼손, 나아가 정치개혁의 걸림돌이라는 오명마저 뒤집어쓸 수도 있는 처지에 내몰렸다.
사실 중대선거구제 개편 논의는 국민의힘 내의 다수 의원들이 보이고 있는 회의적인 반응이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비판적 발언 등으로 인해 실제로 성사 가능성이 의문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현직 대통령의 발언이고, 국민의힘이나 민주당 내에서 중대선거구제 옹호 인사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으며, 주요 언론들이 우호적 여론을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상황이기에 논의의 파장이 어디로 이어질지 쉽게 가늠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2. 반성 없는 정략이 우려스럽다
여기서 선거구제를 둘러싼 교과서적 얘기를 반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2019~2020년 선거법 개정 과정이 파행으로 끝난 이유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역사적 검토와 반성에 근거하지 않으면 동일 사태가 재발하거나 밀실야합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8년 12월 15일 더불어 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5당 원내대표는 연동형 비레대표 도입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비례대표 확대 및 비례·지역구 의석비율, 의원정수, 지역구 의원선출방식 등에 대해 정개특위 합의에 따른다는 내용을 포함한 6가지 항목에 합의한다. 선거법 개정과 정치개혁 입법의 중요한 일보를 내딛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는 자유한국당이 당내 반발 속에 정개특위 논의과정에 불참하면서 무력화된다. 자유한국당은 비례대표제 확대 반대, 소선거구제 고수 입장을 강화한다. 그리고 국민 다수여론, 국회 내 다수의견을 무시하면서 위성정당 창당 불사를 외친다. 국민의힘 인사들은 지금도 그때 당시 자신들의 태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변한다. 소수파를 배려하지 않고, 승자독식을 앞장서 옹호했던 그들은 그 모든 책임을 민주당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지금 윤 대통령은 그런 과거를 전혀 거론하지 않으면서, 승자독식 극복, 다양한 의견 반영을 내세우며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을 주장한다. 중대선거구제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런 윤 대통령의 태도가 문제인 이유다. 만약 윤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 강화를 동시에 말했다면 그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양당제 극복, 다양한 국민의사 반영을 위한 정답이라는 비례대표제 확대에는 한마디도 없이 침묵한다. 그렇기 때문에 윤 대통령의 주장은 다수당 혹은 제1당이 되기 위한 새로운 꼼수로 의심 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 국회에는 선거구제 개편과 관련 총 11개의 개정의안이 제출되어 있다. 그중 소위 윤핵관이라는 권성동, 장제원 의원과 전주혜 의원이 제출한 3개의 개정 의견 모두 연동형 비례대표제 폐지, 소선거구제 옹호를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거대정당에게 더 많은 의석을 갖다 주는 과거의 병립형 비례대표제의 부활마저 주장한다. 완전 이율배반(二律背反), 양두구육(羊頭狗肉) 상황이다.
사실 윤 대통령의 조선일보 신년인터뷰에는 그런 의도가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단지 질문을 달리한 답변으로 감춰져 있을 뿐이다. 그의 답변을 종합해 보면, ‘국회다수당 목표+개헌논의 어려움+중대선거구로의 개편 필요’이다. 더구나 그는 말로만 중대선거구를 얘기했지 사실상 중선거구만 거론했다. 누가 한 선거구에서 2~4명을 뽑는 선거구를 중대선거구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중선거구제일 뿐이다. 물론 그가 그런 차이를 알고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다. 원내 과반의석 확보에 대한 욕망과 중대선거구제 개편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은가?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중대선거구제 찬성론자들은 바로 이점을 외면한다.
아마도 윤 대통령은 대도시 중심으로는 3~4인 선거구를, 농어촌이나 산촌에서는 소선거구나 2인 선거구를 꿈꾸면서 그런 주장을 했는지 모르겠다. 복수공천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군소정당에게 돌아갈 기회가 크지 않다는 것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시범실시되었던 30개 중대선거구제 결과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양대 정당 집중 현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고, 일부에서만 소수정당의 진출이 있었으나 그 효과도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만약 비례대표마저 없거나 병립형으로 만든다면 말만 개편이지 그것은 사실상 개악이며, 소수정당에게 돌아갈 몫은 더 적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는 제도인가? 그게 군소정당의 의회 진출을 도와주는 제도인가? 아마 윤 대통령은 민주당 일부 세력의 호응을 받아 국민의힘이 다수당 혹은 제1당이 되는 전략을 꿈꿀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선거법에 대한 국회 내 합의도 불가능한 상황이 될 것이고, 국민적 분노가 극대화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 최대의 위기는 아마 그렇게 다가올는지도 모른다.
3. 문제의 핵심은 비례대표제 강화
2019년부터 1년여간 계속되었던 선거법 관련 국회 파행사태는 국민의힘의 전신인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논의에 참가했던 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모두 책임이 있다. 특히 민주당은 파행을 막지 못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법을 무력화시키는 위성정당 창당에 나섰다는 점에서 국민의힘 못지않게 큰 책임이 있다. 물론 민주당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위성정당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사과를 했고, 선거구제를 개편하겠다고 약속도 했다. 또 이재명 대표는 당대표 당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과했고, 비례대표 강화 의지를 내보였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 이상의 논의를 주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윤 대통령에게 정치개혁 의제를 선점당하고 있지 않은가? 다행스러운 것은 민주당이 과거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연동형 비례대표제 강화, 위성정당 방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일부 의원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그와 유사한 제도를 바탕으로 대선구제를 중심으로 한 선거구제 개편론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선거구제를 둘러싼 토론을 합리적으로 이끌어내는 중재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선거구제 개편논의를 포함한 정치개혁 논의의 초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 혁신만 얘기하면 그것은 나눠먹기식 중대선거구제 개편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경우 군소정당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크지 않다. 따라서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고, 군소정당의 의회 진출을 보장하면서 양당제의 폐단을 극복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은 소선거구제와 중대선거구제를 둘러싼 논란 이전에 비례대표제 확대에 대한 초당적 합의로 나아갈 수 있다. 사실상 비례대표제나 다름없는 대선거구제 실시를 제외한다면 비례대표제 강화 없이 중대선거구제 확대를 말하는 것은 모두 정략이고 꼼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비레대표제의 기본 설계가 병립형이냐 연동형이냐는 이미 지난 논의과정에서 연동형이 더 바람직하다고 결론이 났다. 국민의힘이 그것을 받아들이냐가 사실 논의의 관건이 될 것이다. 아마 그렇다면 지난번에 선택했던 ‘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것에 대해서도 쉽게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위성정당에 대한 우려는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만 않는다면 사이비 위성정당은 있을 수 있어도, 제도의 취지를 위협하는 위성정당은 존재할 수 없다. 거대양 당이 지역구에서 이미 전국득표율만큼 의석을 확보했다면 비례대표는 군소정당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난번처럼 연동형과 병립형을 뒤섞을 것인가, 아니면 득표율 산정 단위를 전국 단위로 할 것인지, 권역 단위로 할 것인지, 그리고 비례대표 의석수를 얼마나 늘릴 것인지를 결정하면 된다. 만약 초과의석 문제까지도 합의할 수 있다면 굳이 준연동형으로 할 것이 아니라 연동형으로 확실하게 정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비례대표 후보자 명부를 정당 내부에서 결정하는 폐쇄형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유권자가 결정하는 개방형으로 할 것이냐도 논점이 될 수 있다. 개방형이 바람직하지만 그 복잡성 때문에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야가 합의한다면 그것도 충분히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정당과 유권자들의 학습 과정을 고려한다면 시범실시도 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연동형,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정신을 유지하는 것에 합의하는 것이다.
4. 거대 양당의 합의가 중요
비레대표제 강화라는 원칙에 합의할 수 있다면 소선거구, 중대선거구 문제는 좀 더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다. ‘소선거구+연동형 비례대표’ ‘중대선거구+연동형 비례대표’의 조합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선거구 고수’, ‘묻지 마 중대선거구’라는 식의 논의는 선거구제 개편을 무산시키는 최악의 길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진영논리와 음모론이 그것을 촉진 시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소선거구냐 중대선거구냐가 아니라 비례대표제이다. 그걸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선거구제와 중대선거구제를 둘러싼 논의가 더 유연해질 수 있다.
지금 국민들은 누가 정치개혁을 가로막고 있는지에 주목할 것이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인지,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인지에 따라 아마도 2024년 총선의 결과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아마 국민의힘이나 민주당, 윤 대통령이나 이 대표 역시 이런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2023년을 정치개혁과 혁신, 아니 정치교체의 절호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거대 양당의 합의이다. 아마 합의가 안 이루어진다면 기존 선거제도로 총선이 치러지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는지도 모른다. 민주당은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다수의석을 갖고 있고, 윤 대통령은 그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법률안거부권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해 서로 합의할 수 없다면 기존 선거법대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연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또 위성정당을 창당할 것인가?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밀실합의나 담합이 아니라 정치개혁과 혁신을 이끌어내는 방향에서 합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극한대치 상황을 보면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최선, 차선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공론장을 만들어가야 한다. 국민 여론도 그런 방향에서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 아마 그것을 누가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한국정치의 리더십이 달라질 수도 있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리더십이 더 공고해질 수도 있고,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새로운 리더십이 부각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양당제가 아닌 다당제, 양당제의 장점을 가진 다당제, 그 어느 것도 현재의 극한적인 양당체제보다는 멋진 미래를 만들어 낼 것이다. 한국정치의 역동성이 긍정적인 방향에서 표출되었으면 좋겠다. 과연 2023년 한국정치는 어디로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