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으로 간 ‘집중투표제’…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기로
도입 여부 따라 승부 바뀔 확률 100%
“경영권 지키려는 꼼수” 비판 있으나
‘캐스팅보터’ 국민연금도 도입 찬성
대주주 전횡 견제…기업가치 개선 효과
“집중투표제 의무화” 상법 개정 정당화
대기업은 지배주주 반대로 정관서 배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중대 갈림길에 섰다. 오는 23일 고려아연의 현 경영진인 최윤범 회장 쪽과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영풍·MBK파트너스 연합(MBK)은 이날 임시주주총회에서 이사회 구성을 놓고 표 대결을 벌인다. 더 많은 이사를 선임하는 진영이 경영권을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최 회장이 가족회사를 통해 임시주총 첫 번째 안건으로 ‘집중투표제’를 제안한 것이다.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면 주주들은 주식 수가 아닌 이사 수만큼 투표할 수 있다. 예컨대 10명의 이사를 선임할 때 1주를 보유한 주주가 1표가 아닌 10표를 행사할 수 있다. 자신이 선호하는 이사에 표를 몰아줄 수 있다는 의미다. 최 회장 쪽은 MBK 쪽보다 의결권 지분율이 낮은데 집중투표제를 도입해 소액주주의 지지를 얻으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다.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 집중투표제로 승부수
집중투표제는 최 회장 같은 재벌기업 지배주주들이 반대하는 제도다. 소액주주들의 의결권을 확대해 대주주를 견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면 지배주주가 반대해도 일반주주들이 원하는 이사를 선임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최 회장이 경영권 사수를 위해 집중투표제를 꼼수로 쓰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재벌 총수가 직접 나서 집중투표제를 도입하겠다고 한 건 이례적이다. 지금은 비상계엄과 내란 사태로 올스톱 상태지만 기업가치를 개선하기 위한 상법 개정이 국회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일반주주로 확대하는 내용과 함께 대기업의 집중투표제 의무화 방안도 포함돼 있다.
최 회장 쪽이 집중투표제에 매달리는 이유는 임시주총에서 표 대결이 벌어졌을 때 경영권을 지키기 유리하다는 판단에 있다. 일반주주가 MBK 쪽보다 최 회장 쪽을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다. MBK도 최 회장 쪽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집중투표제’라는 꼼수를 쓰고 있다며 법원에 집중투표제 도입을 임시주총 안건으로 올리지 못하도록 하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은 늦어도 21일까지 이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MBK 쪽의 의결권 지분율은 약 47%에 달한다. 최 회장의 의결권 지분은 약 39%에 불과하다. 하지만 집중투표제 도입 안건은 현행 상법에 따라 대주주 의결권이 3%로 제한된다. 이 규정을 적용하면 MBK 쪽 의결권은 47%에서 14%로 70%가량 줄어든다. 반면 지분이 분산돼 있는 최 회장 쪽은 39%에서 34%로 감속 폭이 크지 않다. 집중투표제가 임시주총 안건으로 확정되기만 하면 도입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캐스팅 보터’ 국민연금도 집중투표제 도입 찬성
최 회장 쪽은 집중투표제로 이사를 선임하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12명으로 구성된 고려아연 이사회는 영풍 장형진 고문을 제외하면 11명이 최 회장 쪽에서 선임한 이사들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MBK 제안대로 14명의 신규 이사를 임명한다고 해도 최 회장 쪽이 집중투표제를 통해 최소 4명의 이사를 추가로 확보하면 이사회 구성은 최 회장 쪽 15명, MBK 쪽 11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집중투표제 도입 여부에 따라 경영권 분쟁의 승부가 완전히 갈리는 셈이다.
국민연금은 지난 17일 고려아연 임시주총에서 집중투표제 도입을 위한 정관 변경 안건에 찬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집중투표제 배제 조항을 삭제하는 정관 변경하는 건에 ‘찬성’을 결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MBK는 집중투표제가 최 회장의 경영권 방어에 악용되고 있다며 반발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소액주주의 권리를 강화하는 최근 흐름에 따라 최 회장 손을 들어준 것으로 해석된다. ‘캐스팅 보터’인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행사하기로 하면서 최 회장이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 다만 법원이 MBK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임시주총에서 집중투표제 도입 안건 상정이 불발되면 경영권을 지키기 힘들어진다.
글래스루이스 “집중투표, 소액주주 영향력 확대”
의결권 자문사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글로벌 양대 의결권 자문사인 글래스루이스와 ISS는 각각 집중투표제 도입 찬성과 반대를 권고했다. 글래스루이스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집중투표제 도입이 이사회 구성에서 소액주주 영향력을 확대하고, 더 대표성 있는 이사회 구성을 촉진할 것”이라고 찬성 이유를 설명했다. 반면 ISS는 “집중투표제는 소액주주에게 유리한 제도지만 이번 고려아연 경우에는 현 경영진인 최 회장 측이 지지하는 후보를 선임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뿐”이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최 회장에 우호적인 현대차그룹과 한화그룹이 집중투표제에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관심사다. 이들 재벌기업은 지배주주에게 불리한 집중투표제에 반대해왔다. 경제단체들도 재벌 총수의 이익을 대변하며 집중투표제을 반대하고 있다. 대기업에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면 경영권이 위협받고 외국 투기꾼에 휘둘릴 것이라는 공포 마케팅도 서슴지 않고 있다.
고려아연 도입하면 집중투표제 반대 논리 무너져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재벌 총수가 스스로 집중투표제를 도입하겠다고 하고, 국민연금과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가 찬성한 것은 의미 있는 변화다. 현행법은 집중투표제 도입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기업이 정관에서 이를 배제하도록 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실제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기업은 매우 드물다. 고려아연도 자회사의 집중투표제 도입을 막고 있다.
하지만 고려아연이 집중투표제를 통해 이사회를 구성하면 그 파장이 작지 않을 것이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와 대기업 집단투표제 도입 의무화를 포함한 상법 개정이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유상증자를 발표했다가 주주들의 거센 반발로 철회한 바 있다. 하지만 집중투표제는 유상증자와는 다른 차원으로 봐야 한다. 재벌기업의 총수와 사모펀드 경영권 분쟁이 역설적으로 소액주주 영향력 확대를 통한 기업가치 개선과 자본시장 선진화 측면에서 의외의 성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