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다는 윤석열과 이상민의 심뽀

남들은 불행해도 나만 즐거우면 된다는 부류

쾌락주의적 행복론과 참된 행복론의 대결

그들이 추구했던 건 행복 아닌 반사회적 쾌락

보람 못 느끼는 쾌락만으론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우리 모두의 행복 위해 거리에서 싸우는 국민들

2025-01-10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한국인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 혹은 덕담을 주고받으며 새해를 맞이한다. 복을 많이 받으라는 말에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인사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다. 즉 행복은 그야말로 최종적인 삶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은 불행한데 자신들은 행복했다는 대통령과 장관

윤석열은 내란 실패 후 발표한 12월 14일의 대국민 담화에서 “이제, 고되지만 행복했고 힘들었지만 보람찼던 그 여정을, 잠시 멈추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모름지기 “나는 대통령 놀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했어요”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에 국민들은 엄청난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만이 아니라 그의 최측근인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도 사퇴하면서 그와 비슷한 말을 주절거렸다. 내란 사태 여파로 탄핵 위기에 몰리자 12월 8일에 자진사퇴한 이상민은 부처 내부망에 올린 이임사에서 “모든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윤석열은 대통령 놀이 덕분에 행복했을지 몰라도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가 대통령이었기에 끔찍한 불행을 강요 당해야만 했다. 이상민은 모든 순간이 행복했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행정안전부의 공무원들이나 국민들은 불행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나의 행복이 타인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것이 행복이 맞을까?'

인류가 행복을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꼽고 행복추구권을 보편적 권리로 인정해온 것은 누군가의 행복이 타인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믿어서다. 다시 말하면 행복은 본질적으로 친사회적이어서 나의 행복은 타인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그 반대일 수 없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윤석열과 이상민은 자신들이 행복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필리핀, 싱가포르 국빈 방문 및 라오스 아세안 정상회의를 위해 출국하기 전 환송 나온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2024.10.6.연합뉴스

쾌락주의적 행복론 신봉자들이니 행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

윤석열과 이상민이 자리에서 쫓겨나며 행복 운운한 것은 그들이 쾌락주의적 행복론을 믿고 있어서다. 쾌락주의 행복론이란 쾌락의 증가와 고통의 회피를 행복으로 보는 행복론이다. 한마디로 쾌락이 곧 행복이라는 주장이다.

쾌락주의적 행복론과 금욕주의 행복론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양대 행복론이었다. 종교가 우세했던 시기, 중세봉건제 시기까지는 쾌락을 금기시하는 금욕주의 행복론이 주류 행복론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 이후부터는 금욕주의 행복론은 변방으로 물러나고 쾌락주의 행복론이 주류 행복론으로 부상했다. 그것은 쾌락주의 행복론이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의 이윤추구 욕망과 잘 어울리는 행복론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쾌락은 소비로 연결된다. 예를 들어 음식을 통해 쾌락을 느끼고 싶으면 외식을 하거나 식료품을 구매해야 하고 영화를 통해 쾌락을 느끼고 싶으면 극장에 가거나 OTT 이용권 등을 구매해야 한다. 쾌락주의 행복론이 유행하면 할수록 소비가 늘어난다는 것은 쾌락주의 행복론과 자본주의 제도가 찰떡궁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쾌락주의 행복론이 제안하는 행복 사회의 비결은 너무나 간단하다. 모두가 자기만의 쾌락을 열심히 추구하면 된다! 쾌락주의 행복론의 행복 비법은 한때 코카콜라 회사가 전개했던 ‘오픈 해피니스(Open Happiness)’ 캠페인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코카콜라 회사는 그들의 웹사이트에서 행복을 쟁취하는 요령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진정한 행복의 탐구는 실제로는 탐구라고 할 것도 없다. 그것은 결정이요 선택이다. 그러니 한순간도 더 기다릴 것이 없다. 얼음처럼 차가운 코카콜라의 뚜껑을 따고서 행복을 선택하라!” (마이크 비킹, 『그들은 왜 더 행복할까』, 2018, 마일스톤, 58쪽)

“행복이 별 거냐? 코카콜라 마실 때의 그 짜릿한 쾌감이 바로 행복이야! 그러니 괜히 행복이 뭔지 탐구하지 말고 코카콜라나 사서 마셔”라는 쾌락주의 행복론의 조언을 따르면 과연 행복해질까?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참고로 자본에 충실한 미국 심리학은 쾌락주의 행복론을 열심히 설파하는 일등 공신 중의 하나이고 한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소확행 열풍 역시 일종의 쾌락주의적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다.)

쾌락주의적 행복론을 신봉하는 윤석열과 이상민은 대통령과 장관 자리를 사유화하면서 마음껏 쾌락을 추구했고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니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나는 정말 행복했노라”고 주절거렸던 것이다.

그들이 추구했던 건 행복 아닌 반사회적 쾌락

쾌락주의 행복론은 가짜 행복론이다. 따라서 그것을 믿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닌 가짜 행복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행복이 아닌 단순한 쾌락이나 쾌감일 뿐이다. 쾌락주의적 행복론은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쾌락의 질을 따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쾌락이나 쾌감을 곧 행복으로 이해하는 쾌락주의 행복론에 의하면 윤석열과 이상민은 열심히 행복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윤석열은 국가의 최고권력을 악용해 정적과 국민들을 탄압하고 주변인들을 학대하면서 짜릿한 쾌감을 느꼈을 테니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상민 역시 윤석열에게 충성을 바치고 그 대가로 떡고물과 귀여움을 받으면서 쾌락을 느꼈을 테니 자신이 행복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내란 시도는 자신의 행복을 완성하기 위해 단행한 거사라고 할 수 있다. 비상계엄을 선포해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다 잡아들여 고문하고 처단하는 것이 그에게는 엄청난 쾌락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쾌락주의 행복론을 믿는 것은 사회에 그다지 큰 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사회적인 힘 센 자가 쾌락주의 행복론을 믿는다면 필연적으로 타인들과 공동체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게 된다. 쾌락주의적 행복론에 의하면 윤석열 같은 인간들은 타인을 괴롭히고 학대하면서 살아갈 때 행복할 것이고, 연쇄살인범은 타인들을 살해하면서 살아갈 때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쾌락이냐를 따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쾌락주의적 행복론은 가짜 행복론인 동시에 반사회적인 행복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자 임정환은 『행복으로 보는 서양철학』에서 ‘만약 쾌락이 곧 행복이라면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이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불합리한 결론’(임정환, 『행복으로 보는 서양철학』, 2017, 씨아이알, 99쪽)에 도달한다고 말했다. 쾌락주의 행복론이 옳다면 동물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쾌락주의 행복론은 줄곧 ‘돼지의 철학’, ‘돼지의 행복론’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9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팻말을 들고 있다. 2025.1.9. 연합뉴스

행복했던 안중근

행복은 건전한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생활에서 느끼는 보람과 만족이다. (행복에 대해서는 『가짜 행복 권하는 사회』 김태형, 2023, 갈매나무 참고.) 건전한 삶의 목적이란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의 목적을 의미한다. 윤석열은 자신의 병적인 심리로 인해 끊임없이 힘, 권력을 추구했다. 즉 그는 자신의 사적 욕망이나 이익에 기초한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왔다. 이런 목적은 불건전한, 반사회적인 삶의 목적이다. 반면에 누군가가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해 훌륭한 작가가 되려는 삶의 목적을 세웠다면, 그것은 건전한 삶의 목적이다. 행복은 건전한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갈 때에만 누릴 수 있다.

보람은 사람이 공동체에 기여하는 활동 혹은 생활을 할 때 체험하는 대표적인 감정이다. 사람은 공동체에 기여하면서 살아갈 때 혹은 자신이 공동체에 기여하고 있다고 느낄 때 보람이라는 감정을 체험한다. 보람은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이다. 즉 보람이 없다면 아무리 쾌감을 많이 느끼더라도 행복해질 수 없다. 건전한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보람을 느끼게 되어 행복해질 수 있다. 반면에 불건전한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단지 쾌락만을 느낄 수 있을 뿐 보람은 맛보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쾌락주의적 행복론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들이다. 매국노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호의호식하며 마음껏 쾌락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된 행복론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안중근 의사 같은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들은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았기에 가난하게 살았고 투옥, 고문, 살해와 같은 고통과 위험을 한평생 감수해야만 했다. 한마디로 독립운동가들은 쾌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해방이라는 건전한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했기에 동물적인 삶을 살았던 매국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고, 누릴 수가 없었던 보람을 만끽하며 살았다. 즉 독립운동가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맨몸으로 계엄군 막아선 국민들

윤석열 일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많은 국민이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가 맨몸으로 계엄군을 막아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국민이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거리로 나와 싸우고 있다. 행복론의 견지에서 볼 때, 내란 세력과 국민 간의 싸움은 쾌락주의적 행복론을 믿는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인간들과 참된 행복론을 믿는 인간다운 인간들 간의 결전이다. 참된 행복은 타인들과 공동체에 불행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선물한다. 다시 말해 참된 행복은 단지 나만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어서 그것의 추구는 행복사회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올해에 국민들은 반드시 내란을 진압하고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모두가 행복해지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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