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경영 회피 꼼수 부린 재벌 총수 더 늘었다
미등기 임원 근무 비율 0.7%p 증가
이 중 54.1%가 사익편취 규제 대상
이사회 여전히 지배주주 거수기 역할
총수 등재 이사회는 100% 원안 가결
소액주주 보호와 의결권 강화는 시늉만
집중투표제 통한 의결권 행사 달랑 1건
재벌 기업 총수 일가가 주요 계열사 근무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등기임원으로는 등재하지 않는 비율이 더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총수 일가가 30% 이상 참여하는 회사의 이사회는 안건을 100% 원안 가결했다. 이사회가 재벌 총수 일가의 이익에 봉사하는 ‘거수기’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총수 일가의 3, 4세로 경영권이 승계되며 책임 경영이 사라지고 사익편취 시도는 늘어나는 재벌 기업의 민낯이기도 하다. 이런 행태는 기업 가치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지배주주인 총수 일가의 전횡을 막고 이사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재벌 개혁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총수 일가 미등기 임원 계열사 비율 5.2%→5.9%
공정거래위원회는 19일 이런 내용을 담은 ‘2024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 분석’ 자료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올해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집단) 88개 중 신규 지정 집단 7개와 특별법으로 설립된 농협을 제외한 80개 집단 소속 2899개 계열회사가 분석 대상이다. 분석 기간은 작년 5월부터 올해 5월까지다.
눈에 띄는 대목은 총수 일가가 이사회 구성원이 아닌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하는 회사가 전년보다 0.7%포인트 늘었다는 점이다. 71개 총수 있는 집단 2753개 계열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인데 총수 일가가 등기임원으로 등재하지 않고 근무하는 회사가 163개 회사(5.9%)에 달했다. 하이트진로가 11개 계열사 중 7개 회사(63.6%)로 최다였고, 금호석유화학과 중흥건설, 셀트리온, DB 순으로 많았다.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하는 총수는 평균 2.5개 회사에서 미등기 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총수 2·3세는 평균 1.7개였다. 총수 일가의 미등기 임원 겸직 수(1인당)는 중흥건설, 유진, 하이트진로·한화·효성·KG 순으로 많았다.
미등기 임원 계열사 절반 이상이 사익편취 규제 대상
총수 일가가 미등기 임원으로 재직 중인 회사의 절반 이상(54.1%)은 사익편취 규제 대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조사 결과는 재벌 총수 일가가 등기임원으로서 책임을 지지 않고 미등기 임원의 권한만 누리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익편취는 대기업집단 소속 회사가 특수관계인, 또는 특수관계인 소유 계열사와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하거나 사업 기회를 제공해 부당한 이익을 몰아주는 불법 행위를 말한다.
공정위는 “미등기 임원이 있고, 그 과반수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인이 있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건 문제”라며 “총수 일가가 미등기 임원으로서 대기업집단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이를 통해 사익편취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면밀한 감시를 지속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총수 일가 1명 이상이 이사로 등재된 회사는 468개로 17.0%로 집계됐다. 이 비율은 2022년 14.5%에서 지난해 16.6%로 늘고 있다. 분석 대상 회사의 등기이사 총 9836명 중 총수 일가는 638명으로 6.5%를 차지했다. 지난 2022년 5.6%에서 지난해 6.2%에 이어 상승 추세다. 총수 일가가 이사로 등재된 회사 비율은 셀트리온과 부영, 농심, DN, BGF 순으로 높았다. 미등기 임원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기업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기업도 증가하고 있다고 공정위는 평가했다.
총수 일가 30% 이상인 이사회 100% 원안 가결
전체 계열사 내에 총수 일가가 이사로 등재된 회사가 없는 집단은 DL, 미래에셋, 이랜드, 태광, 삼천리 등 5개 기업집단이다. 71개 집단 중 SK와 현대자동차, LG 등 51개 집단에서 총수 본인이 계열회사 이사로 등재돼 있다. 반대로 총수 본인이 계열회사 이사로 등재돼 있지 않은 기업집단은 삼성과 한화, 신세계, CJ 등 20개였다.
이사회의 거수기 역할도 개선되지 않았다. 이사회 안건 원안 가결률은 99.4%로 여전히 100%에 육박했다. 총수 일가가 이사의 30% 이상 등재된 회사에서는 이사회 안건이 모두 원안 가결된 것으로 조사됐다. 총수 일가가 10% 미만으로 등재된 회사는 안건의 99.3%이 원안대로 통과됐다. 미세한 차이인 것 같지만 원안이 100% 통과된 건 문제가 있다. 이사회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이사회의 내부 견제 기능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조성과 시장감시가 중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액주주 권익보호·의결권 행사 여전히 미흡
소액주주 의결권 행사 강화를 위해 도입된 주주총회 집중투표제·서면투표제·전자투표제를 하나라도 도입한 회사는 88.4%로 증가 추세를 이어갔다. 전자투표제의 도입 비율은 86.3%에 달했다. 반면 집중투표제를 통한 의결권 행사 사례는 지난해에 이어 단 1건에 불과했다. 주주제안권(12건)과 주주명부 열람청구권(6건), 회계장부 열람청구권(4건) 등은 총 32건 행사돼 전년보다 4건 줄었다. 이는 소액주주 보호 장치가 미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80개 대기업집단 344개 상장사의 이사회 운영 현황을 보면 사외이사 비중은 51.1%로 작년(51.5%)보다 소폭 감소했다. 사외이사의 이사회 참석률은 97.8%로 전년 대비 1.2%포인트 상승했다. 사외이사 비중은 한국항공우주산업·엠디엠, 케이티앤지, 중흥건설 순으로 높고, 이랜드, 중앙·DN, 글로벌세아 순으로 낮았다.
감사위원회와 내부거래 위원회, 환경·사회적 책무·기업지배구조개선(ESG) 위원회 등 대기업집단 내 의사결정의 객관성과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도입된 위원회 설치는 상법상 최소 기준을 지키고 있다. 공정위는 “앞으로도 대기업집단 지배구조 관련 현황을 지속 분석, 공개해 시장의 자율적 감시를 활성화하고 대기업집단의 자발적인 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