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러시아 판사의 생각
한국이나 러시아나...소름 돋는 판사들의 '법대로’
2024년 11월 러시아 법원은 나데쥐다 부야노파(Nadezhda Buyanova 67세)에게 5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했다. ‘러군 모욕 및 허위사실 유포죄’로 중형을 때린 것이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루어진 수많은 재판 판결 중 하나일 뿐이지만 러시아 진보 언론 사이에서는 작지 않은 화제가 됐다. 유죄 이유, 재판 과정, 징역 기간, 피고인 등등 여러모로 주목할 만했기 때문이다.
증거 하나 없이 반전쟁 발언 혐의 하나로 중형 때린 러시아 현실
전개는 이렇다. 2024년 1월에 아나스타시아라는 한 여성이 7살 아들의 질병 때문에 내과의사인 나데쥐다가 근무하는 동네 보건소를 방문했다. 진료시간 때 두 여성 간에 말다툼이 벌어졌고 고성이 오갔다. 환자의 주장에 따르면, 의사는 아이가 왜 이렇게 우울하냐고 물어봤고, 자기는 아이 아빠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징집돼 나갔다가 죽었기 때문에 아이가 많이 슬퍼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아이를 보고 의사는 “당연한 일이다. 두 나라가 전쟁 중이니 모든 병사가 상대 군대의 목표가 되어 죽을 수 있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데쥐다 의사는 이를 전부 부인하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아나스타시아는 억울해서 이 사건을 자기 sns에 올렸다. 그리고 자기가 구독하는 극우 (친전쟁) 블로거에게도 전달했다. 그 블로거는 ‘이런 반전쟁, 즉 반러시아 쓰레기를 싹 다 없애야 한다’면서 본인 인맥을 동원해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일을 키웠다.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현재 러시아에서 불법이기 때문에 경찰이 광속으로 나데쥐다 의사의 혐의를 확정했고 검찰이 광속으로 기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나데쥐다 의사측 변호사는 피고인의 유죄 증거가 하나도 없다고 지적했다. 보건소 진료실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지만 음질이 좋지 않아 대화 내용이 전혀 안 들리기 때문에 증거로 사용 불가하다. 목격자도 없고 아나스타시아가 주장하는 대화 내용을 들은 주변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심지어 검찰 조사 과정에서 7살 아들을 신문했는데 그 아이도 의사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다고 진술했다.
그럼에도 판사는 징역 5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데쥐다 의사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소된 내용의 말을 했든 안 했든 상관이 없다. 재판부의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현행 법 그대로 판결을 내렸을 뿐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군대 모욕하고 허위사실 유포하면 모조리 잡아가는 법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러시아 두마 (국회)는 법안 몇 건을 급히 통과시켰다. 그 중 하나가 소위 ‘러 군대 모욕 및 허위사실 유포죄’다. 이 법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정보 외에 모든 정보는 허위사실이고, 이런 정보를 제작, 유포, 공감 표시(인터넷에서 ‘좋아요’ 클릭), 공유 등을 하는 사람은 처벌 대상이 된다.
나데쥐다 의사 사건은 최근에 화제가 된 사건이지만 그 전에도 언론에서 이슈가 된 사건들이 수없이 많다. 딸이 학교에서 반전쟁 뉘앙스의 그림을 그려서 아버지가 감옥으로 간 사건, 학교 수업 때 선생님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고 말하자 부모가 이 선생님을 고발해서 감옥으로 보낸 사건, 자기 sns에서 ‘러시아 군대의 명예를 훼손’하는 영상이나 사진을 공유해서 감옥으로 간 수많은 사건, 인터넷에서 우크라이나 국기가 포함되어 있는 포스팅에 ‘좋아요’를 눌러서 감옥으로 간 사건 등등. 러시아 사법부는 정보를 전부 다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유죄 판결 수를 알 수 없지만 이와 관련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 평가에 따르면 1000명에 가까운 케이스가 이미 선고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는 소련 말기의 ‘국가모욕죄’법으로 감옥으로 간 사람보다 더 많은 숫자다.
작년에 내가 구독하는 러시아 진보 언론에 한 러시아 판사의 인터뷰가 실린 적이 있다. 익명으로 진행한 이 인터뷰에서 그 판사는 현 러시아 사법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는데 그중 한 대목이 특별히 내 눈에 들어왔다. 그 판사는 최근 러시아에서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재판 판결들을 전부 다 정당화하고 있었다. 판사는 정의를 따지지 않고, 검찰이 갔다 준 케이스를 법에 의해 판결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기소하는 혐의가 법에 해당이 되면 유죄, 해당이 안 되면 무죄를 때리는 것은 대부분 판사의 원칙이라고 했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판사가 아니라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나 기소한 검찰을 비난하라고 짜증을 내는 뉘앙스도 느껴졌다. 돈을 받거나 승진을 보장 받고 검찰이 원하는 쪽으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도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대부분 판사는 증거대로, 즉 법대로 판단한다는 것이었다. 설사 증거가 조작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증거 진위 여부는 판사가 결정하는 일이 아니니 문제 제기는 법원 말고 검찰에 가서 하라는 억울함이 엿보였다.
한국이나 러시아나...소름 돋는 ‘판사들의 생각’
이 인터뷰가 떠오른 것은 얼마 전에 ‘민들레’에 유시민 작가가 쓴 ‘어느 판사의 생각’ 칼럼을 보고서였다. 법에 대해, 그리고 사법부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물론 현재 러시아에서는 권력의 눈치를 보고 법을 아예 무시한 채 선고를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런 판사의 사고방식은 러시아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로 통한다는 것에 소름 돋았다. 죄를 지은 사람을 법으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어서까지 죄없는 사람들을 처벌하려는 것. 법치주의를 내세우면서 독재하는 방식은 러시아가 발명한 방법이 아니지만 사법 시스템이 이 정도까지 몰락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법을 이용해서 상대 정치인을 제거하려는 것도 비판 받을 일이지만 공포 정치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아예 법체계를 흔들어 버린다는 것은 정상 국가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틀 안에서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도 공범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