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된 ‘트럼프 리스크’…내년 성장률 1% 밑돌 수도
관세 전쟁으로 수출 최대 448억 달러 감소
미국 우선주의에 달러 강제…국내 물가 자극
대미 무역 흑자 급증…관세 폭탄 빌미 제공
트럼프 집권 1기 때도 한국 총 수출액 급감
미국에 투자한 한국 기업 불확실성 높아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나 보호무역 등 공약으로 미뤄볼 때 우리나라 통상이나 수출에 부정적 요인이 좀 더 커 보인다. (원/달러) 환율이 많이 오르면 원유 등 원자재 수입액이 늘어 경상수지나 무역수지 흑자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업종과 품목별로 기회이거나 위기일 수 있지만 부정적 의견이 우세한 것 같다. 오는 28일 수정 경제 전망 발표할 때 그런 부분 반영될 것이다.”
한국은행이 7일 국제수지 잠정 통계치를 발표하며 트럼프 당선이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 논평한 내용 중 일부다. 요점은 트럼프 집권 2기에는 수출이 줄고 환율 급등으로 국내 물가가 불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수와 수출이 모두 타격을 받으면서 경제성장률도 전망치보다 낮아질 확률이 높아졌다.
트럼프 당선으로 불확실성 커진 한국 경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2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 감사를 받으며 수출 물량 감소를 이유로 올해 경제성장률을 기존 전망치인 2.4%에서 2.2~2.3%로 낮췄다. 내년에도 비슷한 성장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내외 기관들은 한국의 내년 성장률을 2.2%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제시된 전망치다. 트럼프는 모든 수입품에 10~20%의 보편 관세와 중국산 제품에는 60%의 높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런 ‘관세 폭탄’ 하나만으로도 한국의 수출은 크게 위축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연합인포맥스가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이 10% 보편 관세가 부과되면 수출과 투자가 줄며 경제성장률이 1.0% 포인트 감소할 것이라고 해다. 트럼프 집권 1기에 비해 미국에 대한 수출의존도가 높아져 미국의 관세 전쟁으로 인한 충격도 커질 것이라는 의미다.
사상 최대인 대미 무역 흑자액이 부메랑 될 수도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0년 166억 달러였던 대미 무역수지 흑자액은 2021년 227억 달러에서 2022년 280억 달러, 2023년 444억 달러로 급증했다. 조 바이든 정부가 중국 견제 정책에 따라 세계 공급망을 재편하며 미국 비중이 급속히 커진 결과다. 이런 흐름은 올해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1월부터 9월까지 대미 무역 흑자액은 400억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전체 무역수지 흑자액 368억 달러를 넘어선 실적으로 이런 추세라면 올해도 기록을 경신할 게 확실하다. 미국이 적자를 보는 국가 순위에서도 한국은 2021년 이전에는 14위였는데 올해 8위로 뛰어올랐다. 이런 변화는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가 공격할 빌미가 될 수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지난달 31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트럼프 공약이 실제로 이행되면 한국의 총수출액이 최대 448억 달러 감소하고 실질 국내총생산도 최대 0.67% 줄어들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은행도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지난 8월 발표한 ‘공급망 연계성을 고려한 대중 수출 평가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트럼프 관세 정책이 현실이 되면 한국의 대중 수출 연계 생산이 6% 이상 감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가 중국에 관세 폭탄을 퍼부어 중국 내 생산 활동이 위축되면 한국도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다.
트럼프 집권 1기였던 2019년 총수출액 10% 감소
불길한 전망은 트럼프 정부 1기였던 2017~2019년 상황을 반추해보면 어느 정도 실감할 수 있다. 트럼프는 집권과 동시에 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기존 협정이 한국에 너무 유리하게 체결된 탓에 미국의 무역적자가 늘고 있다고 트집 잡았다. 결국 트럼프의 이런 태도는 한국의 수출액 감소로 이어졌다.
한국의 총수출액이 줄어든 것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탓도 컸다. 트럼프는 미국의 최대 무역적자 국가인 중국에 연이어 관세 폭탄을 퍼부었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국이라 곧바로 영향을 받았다. 트럼프 집권 후반기였던 2019년 한국의 총수출액은 전년보다 10%가량 감소했다. 트럼프 집권 1기에 벌어졌던 이런 사태는 집권 2기에도 비슷한 양태로 되풀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관세 전쟁에 내년 성장률 1% 달성도 아슬아슬
현대경제연구원은 7일 발표한 ‘트럼프 노믹스 2.0과 한국 경제’ 보고서에서 트럼프의 관세 전쟁이 세계로 확산하며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최대 1.1%포인트 떨어뜨릴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의 수입 관세율 인상이 세계 평균 관세율 인상을 유발하고 그 결과 글로벌 교역을 위축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도 트럼프 당선으로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봤다. 메리츠증권은 더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메리츠증권은 연합인포맥스와 인터뷰하며 수출 충격만으로 성장률 1% 달성이 힘들 수도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가 한국에만 타격을 주는 건 아니다. 영국의 일간지인 가디언은 6일(현지시간) 트럼프의 보호무역 정책으로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반토막 날 위기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재집권 첫해에 0.7%포인트, 그다음 해에 0.5%포인트 성장률이 낮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IMF는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서 트럼프 공약이 현실이 된다면 세계 경제성장률은 내년에 0.8%포인트, 2026년에는 1.3%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달러 강세로 국내 물가 다시 상승할 수도
수출만 위태로운 게 아니다. 극심한 침체에서 탈출하지 못한 내수 경기에도 부정적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달러 강세로 이어지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트럼프 당선 가능성이 커지며 급등했다. 7일 현재 달러당 1400원 안팎을 넘나들고 있다. 지난 1년간 환율은 1400원을 넘은 적이 없다. 한 달 전만 해도 1300원대 중반을 맴돌았다. 급격한 환율 상승은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위험뿐 아니라 국내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의주시해야 한다.
환율이 상승해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입 물가가 급등한다. 수출 기업으로서는 채산성이 좋아지는 측면도 있으나 완제품 생산에 투입되는 원자재를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환율 상승이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둔화한 건 환율과 유가가 하락한 영향이 컸다. 그러나 트럼프 2기 내내 높은 환율이 유지된다면 물가가 다시 오를 수 있다. 지난해 큰 폭으로 상승한 뒤 고공행진 중인 물가로 국민들은 힘들게 살고 있다. 임금 근로자는 실질소득이 줄었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은 장사가 안 돼 줄폐업하고 있다. 고물가와 고금리에 직격탄을 맞은 내수 경기는 장기 침체에 빠져 있다. 환율 급등으로 다시 물가가 오르면 내수 경기는 더 나빠질 것이다.
대미 투자 확대한 한국 기업들도 불안불안
미국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한 한국 대기업들도 좌불안석이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지원법 등 바이든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들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면적 폐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지원액을 축소하거나 정부 보조금 지급 조건을 까다롭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 기업들은 투자 대비 실익이 떨어진다. 정책이 유지된다고 해도 불확실성은 트럼프 집권기 내내 이어질 것이다. 수출과 내수에서 고전하고 우리 경제를 견인하는 대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지면 성장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대응할 만한 카드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호의에만 기대해야 할 처지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7일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는 우리 정부의 대응 방향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정상 외교와 정부의 외교가 중요해졌다”는 말이 나왔으나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뿐이다. 트럼프 집권 2기 한국 경제는 말 그대로 ‘내우외환’에 휩싸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