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그리고 제주4.3과 광주5.18
한강 노벨상 수상 “상징적이며 희망이 있다는 것”
‘마이니치’ 대담 “약자에 대한 깊은 시선과 시대성”
마음속 깊은 곳에 와 닿는 속삭이는 듯한 어투
기도를 담은 말과 이미지의 연쇄
작고 소중한 것 지키는 게 미래향방 가를 분수령
일본의 서평가로 <한국문학 가이드북>(공저) 등을 쓰기도 한 구라모토 사오리(45)는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서 “동시대성을 느낀다”면서 한강의 작품에서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절대 놓아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을 느낀다고 했다. 한강이 정밀하고 투철한 문체로 그려낸, “사소하고 소중한 것을 놓아버리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향후 세계의 향방을 가를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가라시마 데이비드(45) 와세다대 교수도 ‘보통’ 취급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비판을 받게 된 사람들에 대한 한강의 “속삭이는 듯한 어투가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고 했다.
한강의 수상은 “상징적이며 희망이 있다는 것”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14일 ‘노벨 문학상 한강의 문학-약자에 대한 깊은 시선과 시대성’이라는 제목을 단 이 두 사람의 대담을 실었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자들이 여러 형식으로 거론했지만, 일본 전문가들의 또 다른 시각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구라모토는 한강의 수상이 “단지 백인 지상주의로부터의 탈각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특정한 영역, 특권적인 입장에서의 가치 부여, 권위 부여에 의존하는 경향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전쟁의 참상이 이어지고 있지만 매스컴의 관심이 점차 둔감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강이 노벨상 수상자로 선택받은 것은 “상징적이기도 하고 희망이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그리고 제주4.3과 광주5.18
이 부분은 노르웨이의 노벨위원회가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피단협)를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밝힌 수상 이유에 담겨진 메시지와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 위원회는 피단협이 오래 전부터 “핵무기가 두 번 다시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증언을 해 왔다”며 “오늘날 핵무기 사용에 대한 ‘터부’가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은 우려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구라모토는 ‘4.3사건’(1947~1954년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주민 학살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상처입은 자나 죽어가는 자들을 중심으로 “약자가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구도”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폭력에 항거하면서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광주 ‘5.18사건’을 다룬 <소년이 온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한강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하면서,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고 있는 무자비한 폭력과 제주 4.3, 광주 5.18에서 자행된 무참한 폭력을 동일선상에 놓고 바라보지 않았을까. 이렇게 시야를 넓혀 긴 역사적 안목으로 제주 4.3과 광주 5.18을 바라본다면, 지금 한국사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들 사건에 대한 좌-우 가르기, 진보-보수 편가르기식 논란은 편협하고 소모적이며 백해무익한 ‘정쟁적 소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구라모토가 한강의 작품을 두고 “사회가 정해 놓은 노멀한 인간상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자상하고 날카롭다”거나, 그의 수상이 “세계에서 ‘기타(문학)’는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한 말도 인상적이다.
아래에 대담 전문을 붙인다.
노벨 문학상 한강의 문학-약자에 대한 깊은 시선과 시대성
대담
구라모토 사오리(45): 서평가. 2018~20년 <마이니치신문> ‘문예시평’ 담당
가라시마 데이비드(45): 번역가이자 소설가. 와데다대 교수.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한국 작가 한강(53). 아시아 여성작가로는 첫 수상자가 됐다. 이번 한강의 수상과 그 문학의 매력에 대해 아시아 작가들을 잘 아는 서평가 구라모토 사오리와 번역가요 소설가인 가라시마 데이비드 와세다대 교수가 대담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와 닿는 속삭이는 듯한 어투
-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감부터.
구라모토= 이미 일본에도 많은 독자가 있던 작가로, 동시대성을 느낀다. 이번 수상이 단지 백인 지상주의로부터의 탈각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특정한 영역, 특권적인 입장에서의 가치 부여, 권위 부여에 의존하는 경향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가라시마= 2016년에 (<채식주의자>로) 영국 맨부커 국제부문상을 수상하고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지 10년도 되지 않았다. 한강의 작품은 영어권, 일본어권에서도 비교적 작은 출판사들이 지속적으로 출간해 왔다. 그 결과 레이더에 걸렸다. 번역의 힘도 작용했다고 본다.
구라모토= <흰>(일본어판 ‘모든 흰 것들의’) 등을 비롯해 갈고 닦은 말의 이미지가 강하다. 여백으로 얘기하는 것도 있어서, 각국에서 어떻게 번역돼 있을지 궁금하다.
가라시마= 단편적으로 씌어진 것이 세계에서 재평가되고 있다고 느낀다. 필요한 여백을 너무 채워버리진 않을지, 번역자의 기술이 중요한 부분도 있다.
-한강이 평가받은 배경이나 의미는.
구라모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끝이 보이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참상이 계속되고 있는 한편으로, 언론 미디어의 관심은 점차 둔감해지고 있다. 누구나 자기 일만으로도 벅찬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한강이 선택받은 것은 상징적이기도 하고 희망이 있다는 얘기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절대 놓지 않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을 작품에서 느낀다.
가라시마= 한강은 소설 형식과 독자를 압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좀 더 시속에 맞춰 알기 쉽게 쓰는 것이 요구되는 시대에, 큰 사건을 다룰 때에도 정적이고 차분한 관점에 흔들림이 없다.
구라모토= 정밀(靜謐)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문체다. 투철하다는 말도 쓰고 싶어진다.
가라시마= 속삭이는 듯한 어투가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구라모토= <작별하지 않는다>도 마지막 한 문장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갯짓하듯”이 정말 좋다. 그것이야말로 말의 날갯짓과 같은 것으로, 사소하고 소중한 것을 놓아버리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앞으로의 세계가 어떻게 돼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라시마= 여러 인물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도록 다성(多聲)적으로 작품을 그리고 있는 것도 높이 평가할 만하지 않을까.
기도를 담은 말과 이미지의 연쇄
-다시한번 한강 문학의 매력에 대해.
가라시마= <채식주의자>에서는 먹을 수 없게 된 사람, <희랍어 시간>에서는 시력을 잃어 가는 사람, 말을 잃은 사람이 나온다. ‘보통’ 취급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비판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의 재미(物語性)가 있다.
구라모토= 사회제도 속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진 사람들, 사회가 정해 놓은 노멀한 인간상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자상하고 날카롭다. 예컨대 <채식주의자>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고기를 먹지 않게 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곤혹스러움에서 시작해, 오로지 주위 사람들과의 반응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을 치밀하게 복층(다층)적으로 그려내 보였다.
가라시마= 그것이 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 폭력 피해를 당한 사람들로 연결된다.
구라모토= 이질적인 존재를 둘러싼 사회의 무관심이나 폭력의 모습이 교묘하게 그려지는데, 이 소설이 마지막까지 아내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끌어가지 않는 것도 포인트다. 안이하게 그녀를 이해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것이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계속 지닐 수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라시마= 이 작품은 한국의 시인이 쓴 '식물이 되자'와 같은 말에서 착상을 얻었다고 들었다. 한강은 시인이고 음악을 하고 있다는 점과도 큰 관련이 있다. 직접적으로 등장인물이 말을 하게 하지는 않는다.
구라모토= 목소리 높여 의견을 서술하지 않고 기도를 담은 말과 이미지를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듯한 글쓰기다. ‘4.3사건’(1947~1954년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주민 학살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상처를 입은 자나 죽어가는 자들을 중심으로 약자가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구도가 작중에서 되풀이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폭력에 항거하면서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일본에서도 아시아의 작가, 문학이 주목받게 될 것이다.
구라모토= 이미 한국문학은 해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읽혀지고 있다. 서점에서는 코너 하나를 차지할 정도가 됐지만, ‘기타 문학’ 취급을 받았던 시대도 있다. 세계에서 ‘기타’는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가라시마= 한국정부가 번역 지원에 힘을 쓴 측면도 있지만, 문학은 사람과의 연결을 통해 퍼져 나간다. 작가, 번역가, 편집자 등의 개인적인 연결이 세계적인 확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른 분야에서는 소수가 이 정도까지의 확산을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좋은 작품이 언어와 국경의 장벽을 넘어 더욱 널리 읽히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