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스러진 ‘칼 찬 시인’ 박용만

독립운동진영 분란의 핵 이승만, 최대 피해자 박용만

동지에게 배신당하고 동족 손에 암살된 비운의 인물

2024년은 하와이 국민군단과 사관학교 창설 110주년

미국과 중국에서 둔전병제 토대로 무장독립투쟁 구상

2024-09-14     이희용 줌렌즈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뉴라이트를 비롯한 보수 우익 진영에서 국부(國父)로 추앙하고자 하는 이승만에게는 적이 많았다. 독립운동을 할 때는 박용만, 안창호, 신채호, 이동휘 등과 날카롭게 대립했고 해방 후에는 김구, 이시영, 김창숙, 조봉암, 신익희 등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은 현실 정치에서 정적들을 누르고 권좌에 올랐다가 민중의 저항으로 물러난 뒤 이국땅에서 눈을 감았다. 추종자들은 그를 역사에서도 승리자로 만들고자 기억 전쟁을 벌이고 있다.

반면에 박용만은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운 동지였으나 노선 차이 때문에 멀어졌다가 권력 다툼과 소송 등으로 철천지원수가 됐다. 이승만과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한 그는 중국으로 근거지를 옮긴 뒤 동족이 쏜 총에 숨을 거뒀고 이제는 후세에게도 잊힌 비운의 독립운동가로 남았다.

 

1915년 대조선국민군단 단원들이 하와이에서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올해는 박용만이 옥중에서 이승만과 결의형제한 지 120주년, 미국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국민군단사관학교를 창설한 지 110주년이다, 박용만의 행로를 더듬어보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박용만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정순만·이승만·박용만 ‘삼만’의 옥중 결의형제

박용만은 1881년 8월 26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 집안이었으나 숙부 박희병은 서울에서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게이오의숙과 미국 버지니아주 로아노크대에서 수학한 개화파 엘리트였다.

숙부를 따라 상경한 박용만은 관립일어학교를 1년간 다닌 뒤 1895년 일본으로 유학해 중학교와 게이오의숙에서 공부했다. 숙부의 소개로 일본에 망명 중인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와 교분을 맺고 활빈당에 가입했다가 1901년 귀국한 뒤 역적과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옥고를 치렀다.

숙부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수개월 만에 풀려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서 활동했다. 상동청년회 간부도 맡아 계몽운동에 앞장서면서 민족 지도자, 우국 청년들과 친분을 다졌다. 이승만과도 이때 안면을 익혔다. 1904년 7월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저지하려는 보안회가 결성되자 박용만도 동참했다가 두 번째 옥살이를 한다.

 

박용만이 대조선국민군단 단장 정복을 입고 칼을 허리에 찬 모습

종각 근처(지금의 영풍문고 자리) 한성감옥에서 박용만은 정순만, 이승만과 의기투합해 의형제를 맺었다. 정순만과 이승만은 박용만보다 각각 8살과 6살이 많았다. 사람들은 세 명의 이름 끝자를 따 ‘삼만’이라고 불렀다. 출옥 후 숙부가 있는 평안남도 순천의 시무학교에서 국어, 일어, 산술, 중국 고전 등을 가르쳤다. 제자 가운데는 정한경과 유일한도 있었다.

일제 침략이 노골화하자 박용만은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해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고 1905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승만은 석 달 앞서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 도착한 뒤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했다.

박용만은 이승만이 옥중에서 저술한 ‘독립정신’ 원고를 트렁크 밑바닥에 숨겨왔다. 훗날 로스앤젤레스에서 1천 부를 간행해 이승만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승만의 6살짜리 아들 태산과 정순만의 아들 양필도 데리고 왔다. 태산은 이듬해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고 만다. 뒤이어 정한경과 유일한을 비롯한 제자들도 미국으로 건너왔다.

장인환·전명운 의거 일어나자 구명 운동 앞장서

박용만은 캘리포니아주에서 6개월간 머물다가 네브래스카주 커니에 정착했다. 링컨고를 다닌 뒤 콜로라도대 예비학교를 거쳐 네브래스카대에서 정치학사 학위를 땄다. 학군사관후보생(ROTC) 훈련을 받았으나 미국 시민권이 없어 임관은 하지 못했다. 그는 직업소개소를 운영하며 동포 청년들을 취직시키고 일자리를 주선하는 한편 한인단체 활동과 독립운동에도 열심이었다.

 

둘도 없는 동지였다가 숙적이 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1908년 3월 23일, 친일 외교관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전명운의 의거가 일어났다. 박용만은 두 의사의 구명을 위한 모금 운동에 나섰다.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의 동포들이 성금을 보냈다.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출신의 미국인 변호사 네이선 코글런은 무료 변론을 자청했다. 현지 언론도 동정적이었다.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무력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 데다가 서방세계에 나쁜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재학 중이던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의 재판에 참여할 수 없다”며 통역 요청을 거절해 동포들의 원성을 샀다.

신흥무관학교보다 앞서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박용만은 해외 한인단체들의 통일기관을 조직한 뒤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8년 7월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자회의가 열려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이 통과됐다. 박용만은 1908년 12월 네브래스카 주정부 허락을 얻어 1909년 6월 미국 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1919년 정식 개교한 신흥무관학교보다는 10년, 전신인 신흥강습소보다도 2년 앞선 것이다.

이듬해 4월에는 헤이스팅스대와 교섭해 학교 건물 한 동을 빌리고 농토도 마련했다. 소년병들은 방학이 되면 입소해 농사를 짓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교장 박용만과 교사 백일규·김현구·박치후 등이 가르쳤고 학생은 정한경과 유일한 등이었다. 신규식 조카 신형호와 윤치호 아들 윤영선도 여기서 배웠다. 조인찬은 52세의 나이로 두 아들과 함께 입교해 훈련받았다. 일본의 항의로 1914년 문을 닫을 때까지 90여 명을 배출했다.

 

소년병학교 소년병들의 훈련 모습.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52세의 나이로 입교한 조인찬이다.  

박용만은 독립군들이 주둔지에서 토지를 경작하며 훈련받다가 유사시 전투에 투입되는 둔전병제(屯田兵制)를 구상했다. 미국 독립전쟁 때도 민병대들의 활약이 컸다.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 소집령이 떨어지면 1분 안에 출동한다고 해서 미니트맨(Minuteman)으로 불린 매사추세츠 민병대가 특히 유명했다. 박용만의 학사논문 주제가 ‘미국 독립전쟁’이어서 미니트맨 사례를 깊이 연구했다.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 ‘군인수지(軍人須知)’ 등의 책도 펴냈다.

상해임정 수립 8년 전에 임시정부 필요성 주창

박용만은 ‘칼을 찬 시인’으로 불린다. 무장독립투쟁론을 주장한 무인이면서도 세상을 보는 안목이 남다르고 문학적 감수성도 빼어났다. 1911년 2월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주필을 거쳐 1912년 11월 하와이 지방총회 기관지 신한국보(이듬해 국민보로 개칭) 주필로 부임했다.

그는 신한민보 논설에서 가정부(假政府) 필요성을 제안하며 무형국가를 세워 자치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기 8년 전이다. 그의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지만 1912년 11월 해외 한인단체를 모두 아우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탄생으로 이어졌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는 주정부 묵인 아래 의무금 납부제도를 확립하고 특별경찰권을 행사하는 자치권을 확보했다.

박용만은 1914년 8월 29일 대조선국민군단을 발족하고 박종수가 오하우섬에서 임대 경영하는 486ha(147만 평)의 파인애플 농장에 병영을 마련했다. 첫해 103명이 입대했고 많을 때는 311명에 달했다. 단원들은 병영에 기숙하며 낮에는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군사훈련과 학습을 병행했다. 박용만은 국민군단 사령관과 사관학교 교장을 겸했다. 그해 12월 2층짜리 목조건물 국민회관도 준공했다.

 

이승만이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 영인본. 스티븐스 처단 사건 뒤에 대동신서관에서 펴냈다. 문양목이 서문을 쓰고 통역을 맡았던 신흥우 사진도 실려 있다. 박용만이 원고를 트렁크 바닥에 숨겨 미국으로 가져왔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온 것은 1913년 2월이었다. 1910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돼 압박을 받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용만과 이승만은 노선이 다르긴 해도 틈이 크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제1회 한인소년병학교 졸업식에서 이승만이 축사에 나서는가 하면, 이승만의 저서 ‘한국교회 핍박’ 서문을 박용만이 써주기도 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것도 박용만이었다.

이승만 “박용만 패당은 배일 행동을 하는 무리”

한인기숙학교(한인중앙학원으로 개칭) 교장에 취임한 이승만은 박용만이 주도하는 국민회관 건립에 반대했다. 그 돈을 교육 사업에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회가 제공한 한인여자기숙사 터를 자기 명의로 해 달라는 요구가 거절당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주필을 맡고 있는 ‘태평양잡지’에 “국민회관 건축이 우리에게 학식을 주겠는가, 재정을 주겠는가. 국민회에 돈을 주어서 시루에 물 붓 듯이 없애는 것보다 이승만에게 주어서 사업하는 것이 한인 전체의 유익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대한인국민회로 통합됐던 미주 한인사회는 다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듬해 이승만계는 박용만계인 김종학 국민회의 하와이 지방총회장이 국민회관 건축비를 유용했다며 공금횡령 혐의로 고소했다. 3개월 간의 조사 끝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김종학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승만을 원망하는 글을 남기고 자살을 기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지지파는 국민회를 장악한 뒤 박용만 지지파들에게 폭력을 자행했다. 재미 한인사회는 안창호·이승만·박용만파로 쪼개졌다. 국민군단은 국민회의 지원이 끊긴 데다가 파인애플 농장의 흉작까지 겹쳐 1917년 해체하기에 이른다.

 

대조선국민군단 단원들이 관병식을 거행하고 있다.

1918년에도 이승만은 반대파들을 고발한 뒤 법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그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 군대를 만들었다. 위험한 배일 행동을 하며 일본 군함이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고 음모까지 꾸민 무리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저들을 조처해 달라”고 요청했다.

박용만은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거처를 옮겼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외무총장으로 선임됐으나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그와 함께하지 않겠다며 취임을 거부했다. 이듬해 신채호 등과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해 이승만을 규탄했다.

독립운동 역량 약화시킨 중상모략, 테러, 밀고의 최대 피해자

1926년에는 독립군 양성과 독립기지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륙농간공사(大陸農墾公司)를 설립해 북경 부근에서 농장과 정미소를 운영했다. 1928년 10월 16일 북경의 공사 사무실에서 그를 친일파로 오해한 의열단원 이해명에게 총을 맞아 숨졌다. 이해명이 의열단원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고, 돈을 요구했다가 박용만이 거절하자 쏘았다는 설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가 1995년 대통령장으로 훈격을 높였다.

박용만은 두 살 위의 김해 김씨와 결혼해 딸 동옥을 낳았다. 동옥은 독립운동가 이용화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 난 이영희는 1952년 중국인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소식이 끊겼다. 박용만은 중국 여인 웅씨와 재혼해 아들 광원을 두었으나 중일전쟁 후 행방불명됐다.

 

1913년 4월 하와이 신한국보사가 출판한 이승만의 ‘한국교회 핍박’ 표지와 서지 정보. 표지 글씨는 이승만의 친필이다. 일제가 데라우치 조선총독 암살 음모를 날조해 독립운동가와 교회 지도자들을 투옥한 ‘105인 사건’의 전말을 담고 있다. 박용만이 서문을 썼다. 

박용만은 임정 노선을 두고 김구와도 대립했기 때문에 한동안 추모와 연구가 금기시돼 철저하게 잊힌 인물이 됐다. 국내에 그를 기리는 시설은 고향인 철원고 교정에 세운 유적비가 유일하다.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대 도서관 입구에는 소년병학교 기념비가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각기 출신 지역, 성장 배경, 신념 등에 따라 다양한 노선을 내세우며 경쟁하고 협력했다. 노선 갈등이나 헤게모니 싸움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반대파에 대한 중상모략, 테러, 고소·고발, 밀고 등을 일삼는 것은 독립운동 진영에 막대한 타격과 손실을 입히는 이적행위나 다름없다. 그 분란의 진원지가 이승만이고, 가장 큰 피해자가 박용만이다.

이런 분열상은 독립운동 역량을 약화시킨 것은 물론 해방 후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숱한 희생자를 낳았고, 그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재미 한인사회 역사도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분열과 소송으로 얼룩져 있다. 이승만이 분란의 씨앗을 뿌려놓은 탓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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