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역사가 논쟁 2.0’ - 독일과 일본이 같고 다른 것
서방 주요국 대사들 나가사키 원폭 평화행사 불참
홀로코스트, 원폭 피해의 ‘유일 절대화’와 사고 정지
서방의 ‘이중 기준’ 더 ‘문제적인’ 일본의 과거반성
이스라엘 지지 고수 독일정부와 ‘역사가 논쟁 2.0’
1980년대의 ‘역사가 논쟁 1.0’, 하버마스의 승리
식민주의 침탈과 다른 제노사이드 범죄 포함된 2.0
이스라엘 정부 비판 ‘반이스라엘’ ‘반유대주의’ 딱지
지난 9일 오전 11시 2분, 79년 전 그 시각에 원폭이 투하된 일본 나가사키 시에서 원폭희생자위령 평화기념식이 열렸다. 해마다 이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그때의 참화를 떠올리며 다시는 핵무기가 사용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결의를 새롭게 다지는 자리다.
서방 주요국 대사들 나가사키 피폭 평화기념식 불참
그런데 이날 행사에 늘 참석했던 미국과 영국 등 주요 7개국(G7) 주일 대사들(주최국 일본 제외)과 유럽연합(EU)의 대사급 인사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아니 참석을 거부했다.
참석 거부 이유는 나가사키 시가 이스라엘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가사키 시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벨라루스를 초대하지 않았는데,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초대하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을 러시아 등과 동렬로 취급한다는 오해를 부른다”며 참석 거부 국가들은 반발했다고 한다.
나가사키 시는 이스라엘에 대해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가자에서 정전(전투 중지)하라고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평화기념식에 초대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미국 영국 등 참석 거부국들의 주일 대사들이 이스라엘을 초대하라며 연명으로 나가사키 시에 서한까지 보냈다. 그럼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참석을 거부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기념행사 하루 전날 스즈키 시로 나가사키 시장은 이스라엘을 초대하지 않은 이유와 관련해 “정치적인 이유로 초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평온하고 엄숙한 분위기 아래서 행사를 원활하게 진행하고 싶어서였다”고 밝혔다. 내세운 이유가 애매하고, 왠지 변명처럼 느꺼지는 수동적인 해명이었다. 그 때문에 왜 당당하지 못하냐는 핀잔도 들었다. 각료(장관)가 핵무기 사용을 “선택지의 하나”라고 공언하고, 가자지구에서 4만 명이 넘는 민간인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비인도적 무력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 정전을 촉구했다면, 당당하게 그 때문에 초대하지 않았다고 얘기했어야지 왜 그렇게 발뺌하듯 하느냐는 힐난이었다.
미국 영국 EU의 ’이중 기준‘
<아사히신문>은 10일 사설에서, 지금까지 늘 참석해 온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주요국들 대사들이 나가사키 기념행사에 불참한 것에 유감을 표하면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사설은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받고 반격한 이스라엘과, 일방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는 경우가 다르지만, “이스라엘이 수많은 시민들을 참화 속으로 내몬 것은 결코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심각한 사태”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미국 등 서방 주요국들이 러시아를 비난하면서 인도를 경시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대응에는 둔감하다면서, “이 ‘이중 기준’을 가자지구 참화에도 적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 지지 고수하는 독일정부와 ‘역사가 논쟁 2.0’
이 ‘이중 기준’과 관련해 <아사히>는 그 다음날인 11일, 같은 2차대전 전범국이지만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걸어 온 독일의 ‘역사가 논쟁’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무력공격이 거세지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여론이 고조되고 있음에도 이스라엘 옹호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독일정부의 경직된 대응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량 학살)의 ‘과거 극복’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 온 것처럼 보인 독일은 다른 제노사이드(학살)나 인권침해 등의 범죄행위에는 눈을 감은 것이 아닌가.” 이것이 지금 진행중인 독일의 ‘역사가 논쟁 2.0’의 중심주제 가운데 하나다.
유대인 제노사이드에 대해선 그토록 철저한 반성과 ‘과거 기억(상기)’과 극복 자세를 보여 온 독일정부가 왜 가자지구에서 제노사이드를 자행하는 이스라엘의 만행에는 눈을 감고 강경하게 옹호하는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가?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인식논쟁과 관련해 독일의 식민주의를 연구해 온 아사다 신지 고마자와대학 교수는 이에 대해 “2019년의 ‘BDS 반대 결의’가 큰 요인”이라고 했다. BDS란 보이콧(Boycott), 투자 철회(Divestmet), 제재(Sanctions)의 영문 머리글자인데, 이스라엘의 정책에 협력하는 기업이나 대학과는 관계를 단절하도록 촉구하는 국제적인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으로, 2005년부터 시작됐다.
독일 연방의회의 반BDS 결의 채택
이 BDS와 관련해 독일 연방의회가 2019년 5월 반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을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그 주된 이유는 이스라엘 제품을 보이콧하라는 호소가 나치 독일 시대의 “유대인한테서 (제품 등을) 사지 마라”는 구호를 연상시키는 반유대주의적이라는 것이었다.
연방의회의 결의 직후에 이에 항의하는 언론 매체 논설이 나왔고, 이에 대해 독일정부는 민감하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 논설을 온라인 링크로 자체 공식 트위터에 연결해 놓은 베를린유대박물관이 비난을 샀고, 결국 박물관장은 사임했다. 2020년에는 독일 미술전시회에 초대받은 카메룬 출신의 정치철학자 아쉴 음벰베가 독일 주요 정당들의 정치가들로부터 ‘반유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음벰베는 결국 예정된 강연마저 저지당했다. 이유는 음벰베의 저작물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비판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었다.
메르켈 총리 “이스라엘 안보에 대한 책임은 독일의 국시”
독일의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 ‘반BDS’가 자리잡고 있다. 독일 내의 반BDS 결의는 당파를 초월해 확산됐다. 이미 2008년에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총리는 이스라엘 국회 연설에서 “독일은 이스라엘의 안전보장에 대해 특별한 역사적 책임이 있으며, 그것은 독일의 국시다”라고 공언했다. 메르켈 총리의 그 발언이 있기 3년 전에 BDS 운동이 시작됐다. 독일의 반BDS 결의는 메르켈의 공언으로 대표되는 독일사회의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다.
메르켈은 보수적인 기독교민주연맹 정치가였으나, ‘좌파’ 중심으로 진행돼 온 독일의 ‘과거 극복’ 운동은 이제 보수파도 합의할 수 있는 국가정책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아랍지역에서 무슬림들이 대거 독일로 이주하는 등의 변화로 독일사회가 다양화하면서 국가정책으로 자리잡은 반BDS를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없게 됐고, 커다란 마찰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의 가자 제노사이드로 독일정부 비판 거세져
독일사회에서 이런 이스라엘 지지 고수에 대한 비판이 몇 년 전부터 시작됐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계기로 거세졌다. 그런 맥락에서 홀로코스트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이를 두고 미국의 홀로코스트 연구자 마이클 로스버그가 1980년대에 일어난 ‘역사가 논쟁’을 약간 비틀어 ‘역사가 논쟁 2.0’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80년대의 ‘역사가 논쟁 1.0’, 하버마스의 승리
그렇다면 1980년대의 ‘역사가 논쟁 1.0’은 어떤 것이었나?
그때의 논쟁은 홀로코스트를 소련의 스탈린 체제 아래서 자행됐던 대규모 강제수용과 같은 폭력행위와 비교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런 비교를 통해 홀로코스트를 상대화하려 했던 사람이 당시 서독의 보수파 역사가 에른스트 놀테였고, 이에 대해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와 좌파 역사가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때의 논쟁을 거쳐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비교 불가능’한, 역사적으로 ‘유일한’ 범죄였다고 해석한 하버마스 등의 주장이 독일의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이 ‘비교 불가능성’을 전제로, 교육현장이나 기념비 등의 여러 현장에서 홀로코스트를 되돌아보는 ‘상기(想起, 기억) 문화’가 독일사회에 정착했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가 논쟁 1.0'에서 승리한 쪽은 홀로코스트 외의 다른 식민지배나 제노사이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하버마스는 이번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에 대해서도 식민주의와 팔레스타인 상황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다”고 현대 독일문학 연구자 소에지마 미유키 교수는 지적했다.
역사가 논쟁, 글로벌한 2.0 버전으로 진화
마이클 로스버그는 그 ‘역사가 논쟁’이 최근에 ‘역사가 논쟁 2.0’으로 진화했다며, 나치즘 대 스탈린주의라는 ‘역사가 논쟁 1.0’ 때의 이원적인 비교 구도가 더 크게 열린 글로벌한 틀로 변화했다고 논했다.
‘역사가 논쟁 2.0’에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제노사이드뿐만 아니라 1871년 독일제국 탄생 이후 19세기 말부터 세계 각지에서 전개된 독일의 적극적인 식민지 확장과 그 과정에서 자행된 제노사이드 등 제국주의적 범죄행위들에 대한 사실 인식과 반성들이 포함된다. 독일은 당시 남서 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 동아프리카(탄자니아 등), 서아프리카(카메룬 등), 뉴기니, 중국 칭다오 등을 식민 지배했다.
식민주의 침탈과 다른 제노사이드 범죄도 포함된 2.0
특히 1904년에 남서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난 현지 주민들의 봉기를 독일이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은 악명이 높다. 그것이 히틀러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이어진다는 분석까지 있다. 당시 독일군 사령관 로타르 폰 트로타의 지휘 아래 독일군은 식민지 수탈에 항거해 봉기한 헤레로족(Herero)을 포위해 한 곳으로 몰아넣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쏘아죽였으며, 살아남은 주민들은 집단수용소에 가두고 독일 기업들의 노동력으로 착취했다. 강제동원당한 생존자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가혹한 노동에 동원됐으며, 과로와 영양 부족, 질병으로 죽어갔다. 군함도와 사도광산에 강제동원당한 조선인들 참상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 결과 1904년 봉기 전에 8만 명으로 추산됐던 헤레로족은 1911년 인구조사에서 1만 5천 명만 살아남은 것으로 확인됐다. 헤레로족뿐만 아니라 나마족(Nama)도 당시 약 1만 명이 학살당했고, 생존자 9천명은 집단수용소에 갇혔다.
헤레로족, 나마족, 중국 의화단 제노사이드
19세기 말에 중국 산둥지방을 독일이 점령한 뒤 1898년 무렵부터 현지 주민들의 외세배척 운동이 시작됐다. 그 대표적인 운동이 ‘의화단 운동’(의화단의 난)이다. 서양인을 배격하는 의화단이 산둥 일대에서 선교사업을 벌이고 있던 독일 천주교 관계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하자 로타르 폰 트로타가 이끄는 독일군이 개입했다. 독일을 비롯해 러시아, 일본, 영국,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8개국 연합군이 중국에 파병돼 근대무기로 권법을 주무기로 삼은 의화단원을 학살하며 베이징을 비롯한 장강(양쯔강) 이북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패배하고 식민지들을 포기한 독일은 그 뒤 그런 범죄행위들을 대체로 망각했다. 그때 독일이 점령했던 산둥과 팔라우, 마샬 군도 등의 남태평양 섬들을 ‘위임통치령’인 ‘남양 군도’라는 이름으로 대신 지배했던 또 하나의 제국주의 침략국이 이미 조선을 식민지배하고 있던 일본이다.
역사가 논쟁 1.0과 2.0이 다른 점
2021년에 호주의 제노사이드 연구자 더크 모제스가 발표한 논문이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모제스는 그 논문에서 홀로코스트와 다른 제노사이드 및 식민주의와의 비교가 독일에서 터부시 되고 있고, (하버마스가 주장했던) 홀로코스트의 ‘유일성’ 해석이 교조적으로 변질됐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했다.
홀로코스트의 ‘유일성’을 비판하는 것은 홀로코스트의 ‘비교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 독일의 (나치의 유대인 제노사이드) ‘상기(기억) 문화’와 충돌한다.
모제스와 로스버그 등은 홀로코스트 범죄가 독일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과거를 상대화해서 죄를 경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나치즘 및 홀로코스트와 제국주의, 식민주의와의 관계를 밝혀내거나 비교함으로써 전체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논쟁 2.0’은 이처럼 홀로코스트의 ‘유일성’이 아니라 ‘기억의 다(多)방향성’을 읽어내자는 변화와 얽혀 있다. 그럴 경우 미국 유럽이나 이스라엘의 식민주의 피해자였던 팔레스타인 쪽에서, 이제까지의 (독일 및 서방의) ‘상기(기억) 문화’가 상정조차 하지 않았던 다른 회로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연결할 수 있다. ‘역사가 논쟁 1.0’에서는 논쟁 참여자들 진영의 논객들이 모두 독일인들이었으나, 2.0에서는 논객들의 국적이나 민족도 매우 다양하다. 그들은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홀로코스트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이민문제까지도 포함해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사고하려 한다.
일본과는 다른 독일인들의 과거사 반성
독일은 제국주의 식민지 침탈 시대의 중요한 담당자였음에도 과거의 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이 얕다. 1960년대의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같은 반식민 반제국주의 운동, 팔레스타인 연대운동, 그리고 인종주의 및 차별 철폐를 위해 유엔이 주최한 2000년의 남아공의 ‘더반 회의’ 이후 독일사회에서도 식민주의 과거 다시 보기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곳곳에 과거 범죄를 기억하는 조형물이나 장치들이 설치됐고, 뮌헨에서는 식민지 제노사이드를 지휘했던 사령관 로타르 폰 트로타를 영웅시해 그의 이름을 따 붙인 ‘로타르 거리’를 학살당한 이들을 기억하는 ‘헤레로 거리’로 개명했다. 식민지에 유래하는 문화재나 유골들이 있는 박물관이나 연구기관에서는 수장품의 내력을 조사하고 반환하는 기운이 급속하게 높아가고 있다. 이런 것들은 일본의 경우와 확연히 다르다.
이런 움직임은 독일의 ‘과거 극복’이나 ‘상기 문화’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화한 세상의 변화에 걸맞게 ‘부(負, 짐)의 역사’와 마주하는 새로운 사고 틀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 비판하면 ‘반이스라엘’ ‘반유대주의’ 딱지
그럼에도 독일정부와 언론매체들은 경직된 ‘역사가 논쟁 1.0’ 시대의 틀과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반유대주의와 이스라엘 정권 비판은 전혀 다른 것임에도 그것을 동일시한다. 그 때문에 지식인들조차 이스라엘 정권을 비판하면 반유대주의라는 딱지가 붙을까봐 제대로 발언하기도 어렵다고 얘기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독일에서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서는 언론의 자유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태는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하다. 예컨대 일본 우익 정부의 과거사를 대하는 자세를 비판하면, 일본은 그것을 ‘반일’로 받아들이면서 반발한다. 일본 지식인이나 우리나라 지식인들 상당수도 일본정부를 비판하면 ‘반일주의자’ 또는 ‘반일 종족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을까봐 몸을 사린다. 그런 면에서는 일본이나 한국에도 언론의 자유가 없다.
홀로코스트 반성 ‘절대화’와 사고 정지
홀로코스트 참상을 “절대 다른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절대화하는 것은 그와 관련한 사고 정지를 불러올 위험한 행위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독일정부의 경우,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에 감정이입을 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을 절대화하면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제노사이드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사고 정지 상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유일성’을 절대화하게 되면 다른 범죄들과의 비교도 불가능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독일제국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저지른 식민지 수탈과 이민족 제노사이드에 대한 사고도 정지되고 과거사를 망각하게 된다.
미국 등 서방 주요국 대사들도 홀로코스트 절대화
미국과 영국 등 G7 주요국들의 주일 대사들과 유럽연합(EU)의 대사급 외교관들이 이스라엘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가사키 시의 원폭희생자 위령 평화기념식 참석을 거부한 것도 바로 서구가 저지른 유대인 제노사이드(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을 절대화하면서 다른 범죄사실들은 망각해 버리는 이런 사고정지와 동일선상에 있지 않을까. 영국, 프랑스, 미국 등 G7의 주요 멤버들과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등 주요 서방국들이 저지른 제국주의 침탈과 제노사이드 역사가 독일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히려 훨씬 더 심한 경우들도 있다.
그런 나라들 대사나 대사급 인사들이 이스라엘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례적인 나가사키 평화기념식 참석을 거부한 것은 홀로코스트를 유일 절대화하면서 다른 범죄사실들은 망각해 버리는 독일정부의 그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서방보다 더 ‘문제적인’ 일본의 과거사 반성 자세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에게 더 ‘문제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것은 일본, 특히 일본 자민당 정부의 자세다.
독일정부는 자국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을 유일 절대화하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와 같은 다른 범죄사실들을 망각해 버렸지만, 일본이 유일 절대화한 것은 자신들의 일본제국 선조들이 저지른 아시아판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자국민들이 당한 원폭 피해였다. 일본은 피폭 참상을 유일 절대화하고 기억하면서 잔혹했던 과거 범죄사실들은 망각해버렸다.
일본이 독일처럼 홀로코스트와 같은 과거 범죄사실 반성을 위한 국가 차원의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어 주요국들 대사들을 초대하거나 독일과 같은 차원의 역사논쟁을 벌였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일본은 독일정부가 그랬듯이 침략이나 식민지배 기간이 짧았고 제노사이드 규모도 적었다며 자위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 연구자들도 인정하듯이, 일본군은 아시아 대륙을 침략하면서 2천만 이상의 현지인들을 학살했다. 일본군이 사로잡은 중국인들을 일본도로 목을 쳐서 죽이기 경쟁을 벌이는 것을 유력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더 잔혹했던 면도 있다. 일본의 범죄행위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는 다르다거나 규모가 작았다고 결코 주장할 수 없다.
원폭 피해의 유일 절대화와 과거사 망각
1894년의 동학 농민전쟁에 개입해 수만명, 많게는 수십만명의 농민들을 살육했고, 청일전쟁으로 이 땅을 유린하고 1895년에 일국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일본 낭인들과 군인, 고위 외교관들로 짜여진 자객단이 무참하게 살해하고 불태운 사실을 지금 일본인들 중 몇 명이나 알고 있고, 기억할까. 그 수는 독일인들 중 자국의 식민지 침탈과 제노사이드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사람들 수보다 아마도 훨씬 적을 것이다.
일본은 자국민 원폭 피해를 유일 절대화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라는 관념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일본이 저지른 과거사 모든 범죄사실을 망각하거나 망각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윤석열 정부도 거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와 관련해 '제3자 변제'라는 편법으로 일본정부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군함도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당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일본정부 요구대로 빼버리는데 동의했으며, 독립기념관이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 역사관련 국책 연구소나 기관들의 수장자리에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뉴라이트' 인사들을 대거 기용했다. 이는 한미일 안보군사 통합체제를 만들기 위해 한일 밀착을 종용해 온 미국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