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랗게 질린 아시아 증시…‘경제 위기’ 전조인가?

미 경기침체·AI 거품론 덮친 ‘블랙 먼데이’

코스피 9% 폭락…거래 일시 중단되기도

낙폭 역대 최대…아시아 증시도 동반 하락

미국 금리 인하 기정사실 …효과는 미지수

한국은 수도권 집값 불안에 금리 못 내릴 판

2024-08-05     장박원 에디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식시장이 5일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지난 주말 미국 경기침체를 예고하는 지표들이 나온 데다 올해 들어 주가 상승세를 주도했던 빅테크 기업들의 수익성과 사업 전망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나오며 아시아 주요국 증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금융당국은 긴급 시장점검 회의를 개최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미국발 경기침체와 빅테크 기업들의 주가 거품론, 중동 정세 불안 등 대외 악재가 동시다발로 쏟아지며 마땅한 대책을 찾기 힘들었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 집값이 들썩이고 있어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부양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5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 코스닥 지수, 원 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코스피는 전장보다 234.64p(8.77%) 내린 2,441.55로, 코스닥 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88.05p(11.30%) 내린 691.28로 마감했다. 2024.8.5. 연합뉴스

코스피 하락 폭 역대 최대…아시아 증시도 폭락

5일 코스피 지수는 미국발 경기침체(R) 공포에 휩싸여 8% 넘게 폭락했다. 코스피는 직전 거래일 대비 234.64포인트(8.77%) 하락한 2441.55에 거래를 마쳤다. 종가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 하락 폭이다. 장 중 한때 10% 넘게 빠지며 2400선이 깨지기도 했다. 이날 오후 2시 14분께 지수가 8% 넘게 급락하자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돼 거래가 20분간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코스닥 지수는 더 처참하게 빠졌다. 코스닥 지수는 691.28로 직전 거래일보다 11.3%(88.05포인트) 하락했다. 코스닥시장에서도 이날 오후 1시 56분께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코스피와 코스닥시장에서 동시에 거래가 일시 중단된 것은 약 4년 만이다.

 

 역대 코스피 하락률 순위와 하락 폭 순위. 연합뉴스

일본 등 아시아 증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의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는 이날 직전 거래일보다 4451포인트 폭락하며 3만 1458에 장을 마감했다. 이날 낙폭은 3836포인트가 떨어진 1987년 10월 20일 ‘블랙 먼데이’를 뛰어넘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하락률은 12.4%로 역대 두 번째로 높았다. 닛케이지수는 이전 거래일인 지난 2일에도 2246포인트 급락했다. 일본 증시는 올해 들어 큰 폭으로 올랐으나 폭락 장세가 이어지며 작년 연말 종가보다 낮아졌다. 대만 가권지수도 8% 이상 빠지는 등 아시아 증시가 동반 급락했다.

‘R’공포·AI거품·중동 정세 불안…곳곳에 도사린 악재

한국을 포함한 세계 주요국 증시 분위기가 돌변한 것은 미국의 향후 경기를 가늠하는 경제 지표들이 예상보다 좋지 않게 나온 게 결정적이다. 미국 공급관리협회(ISM)가 지난 1일 발표한 7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6.8로 시장 예상치인 48.8은 물론 6월의 48.5를 모두 크게 밑돌았다. 제조업 PMI는 기업 구매담당자들의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산출되는데 50이 넘으면 경기 확장을, 50 밑이면 경기 수축을 뜻한다. 제조업 PMI의 하위 지표인 고용지수도 같은 달 43.4로 전월보다 5.9포인트 급락했고 신규 주간 실업수당 청구 건수도 24만 9000건으로 전망치를 웃돌았다. 이는 주식시장에서 미국 경기가 예상보다 훨씬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24년 8월 5일 아시아 주요국 증시 하락률. 연합뉴스

그러나 증시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은 그동안 인공지능(AI) 기술을 기반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정보기술(IT) 기업들의 주가 거품론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 종목은 인텔과 엔비디아다. 인텔은 2일 시장 예상치를 크게 밑도는 2분기 실적을 내놓으면서 주가가 5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뉴욕증시에서 이날 인텔 주가는 전 거래일보다 26.05% 폭락한 21.4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상장한 지 3년 만인 1974년 31% 폭락 이후 가장 큰 하락 폭이다. 인텔은 내년까지 10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규모 감원 계획도 발표했다.

인텔의 실적 부진은 어느 정도 예상됐다. 대세로 자리 잡은 AI 대응이 늦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AI 기술을 주도했던 엔비디아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AI 거품론이 사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한 달 동안 주가가 12% 넘게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최신 반도체 제품인 블랙웰B200칩 출시가 약 3개월 연기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기술주에 대한 투자심리에 악영향을 미쳤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코스피 지수보다 더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은 이와 관련이 깊다.

 

 주요 기업과 업종별 주가 하락률. 연합뉴스

닷컴 버블 또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과 닮은꼴?

실제로 일부 전문가는 AI 열풍으로 엔비디아를 비롯한 많은 AI 기술주에 거품이 낀 것으로 본다. 실적이나 향후 성장성에 비해 현재 주가 수준이 너무 높다는 뜻이다. 이를 2000년대 초 닷컴 버블에 비유하는 이들도 있다.

기술주들이 전체 주가지수를 비정상적으로 끌어올렸다는 측면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과 비슷한 하락 장세가 이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런 분석이 맞는다면 미국의 9월 금리 인하가 주식시장의 거품을 제거하는 힘든 여정의 출발점일 수 있다.

버핏의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가 애플의 보유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현금 보유를 늘린 것도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버크셔는 지난 3일 실적을 발표하며 지난 분기에 보유 주식을 대거 처분했다고 밝혔다. 버크셔가 보유한 현금 보유액은 1분기 말 1890억 달러(257조 원)에서 2분기 말 2769억 달러(377조 원)로 크게 늘었다. 버크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현금 보유량이라고 한다. 버크셔는 작년 말만 해도 애플 지분이 1743억 달러(약 237조 원)였는데 6개월 만에 이 보유지분을 절반으로 줄였다.

중동의 정세 불안도 주가 하락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하마스 최고 정치지도자가 암살된 이후 중동 정세는 악화 일로에 있다. 현재로서는 ‘5차 중동전쟁’ 가능성이 크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이 커지면서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이 현실화하면 유가 폭등과 물류 대란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세계 증시에 초대형 악재가 될 수 있다.

 

김병환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5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금융리스크 점검회의에서 4대 위험 요인을 점검하고 향후 대응 방안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2024.8.5 [금융위원회 제공] 연합뉴스

수도권 집값 불안에 금리 인하 망설이는 한국은행

금융위원회는 국내 증시가 폭락하자 5일 긴급 시장점검 회의를 열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미국 경기 둔화 우려 등으로 세계 주요 증시가 흔들리는 상황인 만큼 주식시장 변동성에 대해 면밀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이제 9월 미국의 금리 인하는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금리를 0.25%포인트 내릴지, 아니면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0.5%포인트 인하하는 '빅스텝'을 밟을지가 관심이다. 미국은 기준금리를 5.25~5.50%까지 올려놓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하 여력이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행은 3.50%로 인상한 뒤 1년 6개월 동안 금리를 동결했다. 미국이 금리를 내려도 곧바로 인하하기 쉽지 않은 이유다.

윤석열 정부의 무개념 부동산 정책도 한국은행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정부는 수십 조원의 정책 금융 프로그램을 가동해 주택담보대출을 늘렸다. 그 결과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는 통화정책을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의 경기침체와 중국 경제의 성장 둔화 등이 겹쳐 내수는 물론 올해 들어 회복되고 있는 수출마저 얼어붙는다면 한국 경제는 총체적 난국에 직면한다. 이럴 때 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할 필요가 있다. 물론 금리를 내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서울과 수도권 집값 불안 때문에 금리를 인하하지 못한다면 중요한 경제 정책 수단 중 하나를 잃게 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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