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의 진실…반 이상이 10대 “하루 30명 상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 ①]

미군이 작성한 조사 보고서로 드러난 일본군 만행

동남아 최전선에 끌려간, 주로 경상도 출신 어린 여성들

취업 거짓말에 속고 빚에 팔려 “매춘은 생각도 못해”

포주들, 일본군의 조직적 관여 아래 위안소 운영

보수 많았다지만 절반 이상 착취당하고 결국은 맨손

2024-07-15     배연홍 시사 저널리스트

편집자 주

일제 강점기의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들은 끌려간 것인가, 가해자들의 주장대로 돈벌이를 위한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인가? 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모집’된 사람들이며, 모집 당시 몇 살들이었나? 그렇게 동원당한 그들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됐나? 그들은 어디에 배속돼 어떤 생활을 했으며, 얼마의 보수를 받아 어떻게 썼나? 실제로 그 돈을 소유하기는 했나? 일본 패전 뒤에도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먼 이역 땅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그들 ‘위안부’는 일본군에 학살당한 것인가, 자결한 것인가?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동지적 전우애’가 형성됐다는 일부 주장, 일본군의 위안부 모집, 이송, 위탁운영은 강제동원이 아니라 당시의 공창제도를 활용한 합법적 사업이었고 위안부들은 많은 돈을 벌었다는 일본 우익 논자들과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반일 종족주의> 필자들을 비롯한 한국 내 ‘뉴라이트’들의 주장은 사실인가?

많은 세월과 논란을 거쳤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일제 강점기의 가장 처절한 피해자들인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들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사실조차 거의 모른다.

재일동포 출신 저널리스트 배연홍은 <민들레>에 기고한 이 글을 통해 그들의 그런 ‘진실’에 더 깊숙이 접근한다. 침략자 일본군 병사들의 ‘성욕 배출구’로 철저히 착취당한 ‘위안부’들에 관한 일본정부와 군부 등 가해자들의 주장이 왜 뻔뻔한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지, 배연홍은 일본과 미국, 한국의 여러 증거자료들을 추적해 살피고 취재한 사실들을 토대로 냉정하고 차분하게 기술한다.

1955년 도쿄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 한국인 2세인 배연홍은 오랜 세월 ‘한반도 문제’를 비롯한 국제분쟁을 중심으로 일본의 신문 잡지와 TV 프로에 기고하고 협업해 온 시사 저널리스트다. 이 기고문은 2021년 하반기에 작성해 개인 블로그 ‘전쟁과 기억’에 올린 글을 토대로 한 것으로, 일본어 원문을 한글로 옮겼다. 그와는 1990년대 말 도쿄 특파원 시절에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 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을 모두 5차례로 나눠 연재한다.

한승동 에디터

 

배연홍 국제분쟁 전문 시사 저널리스트

1944년 미군이 작성한 조사 보고서

1944년 7월 31일, 버마(현 미얀마) 북부의 미치나에 틀어박혀 있던 1천 명 이상의 일본군이 야음을 틈타 진지 탈출을 감행했다. 같은 해 5월에 시작된 연합군의 맹공격으로 옥쇄 직전 상황에 처해 있던 미치나 수비대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탈출한 일본군 가운데 200명 가까운 병사들이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에 20명의 젊은 조선인 여성과 중년 나이의 2명의 일본인 남녀가 있었다. 그 머나 먼 최전선의 전장에 왜 민간인이 가 있었을까. 연합군의 포로가 된 여성들은 8월 15일 미치나에서 군용기로 인도 북동부의 레도 수용소로 이송돼 20일간에 걸쳐 심문을 받게 된다.

심문한 것은 미 육군 전쟁정보국(OWI) 심리작전반의 알렉스 요리치(3등 기능병)였다. 미 육군정보부(MIS)가 창설한 정보·프로파간다 기관인 OWI에는 일본계 2세 병사 중에서도 일본에 유학한 뒤 미국으로 돌아간 ‘귀국 2세’ 병사들이 많았다. 여성들은 요리치가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 제49호(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1944년 10월 1일자. 이하 「심문 보고 49호」)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위안부’라는 말을 번역한 ‘컴포트 걸즈’(comfort girls)로 소개됐다. 이미 태평양 전역에서도 확인됐던 일본군 위안부 실태를 처음 밝힌 미군 조사 보고서다.

1990년대 초에 이 보고서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발견돼, 그 해석을 둘러싸고 찬반양론의 논쟁이 벌어졌다. (일제에 동원당한 사람들의) 피해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문서인 동시에 가해 사실을 부정하는 쪽(일본) 주장의 근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찬반 어느쪽이든, 제3자인 미군 병사의 눈을 통해 위안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자료가 돼 있다.

주로 경상도 출신 ‘위안부’, 평균 22세, 절반 이상이 10대

「심문 보고 49호」의 표에는 포로가 된 20명의 위안부, 그리고 포주로 여겨지는 2명의 일본인 남녀의 성명, 연령, 주소가 알파벳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미군이 조선어의 발음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던 사정도 있어서, 부정확한 이름 표기가 많고 주소도 대략적인 지역을 나타내는 것 뿐이어서 인물들이 각기 제대로 식별돼 있진 않았다. 명부에서 특징적인 것은 20명 중에 15명이 한반도 남동부 경상도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진주(5명)와 대구(5명)에 집중돼 있었다. 포주의 이름은 남자가 '기타무라 에이분'(41세), 그 아내는 '기타무라 도미코'(38세), 주소는 경기도 경성(지금의 서울)으로 돼 있었다. 일행이 버마에 상륙한 것은 그 2년 전(1942년 8월)으로, 조선을 출발했던 당시 여성들의 평균 나이는 22세였다. 20세 미만의 여성이 절반이 넘는 11명이나 있었다. 최연소자는 경상북도 대구 출신의 17세로, 생존하고 있으면 현재 98세가 된다. 보고서는 그녀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42년 5월 초 (일본군이) 새로 정복한 동남아시아 영토에 조선인 여성들을 ‘위안 서비스’에 동원하기 위해 징집하는 일본 주선업자가 조선에 왔다. ‘서비스’의 성격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부상병을 위문하고 붕대를 감아주는 등 일반적으로 병사들을 기쁘게 하는 일로 여겨졌다. 주선업자의 권유방식은 많은 보수, 가족의 빚을 상환할 기회, 편한 일, 싱가포르에서의 새로운 생활 전망이었다. 이런 거짓 설명으로 많은 여성들이 해외 근무 징집에 응해 수백 엔의 선금을 받았다. 많은 여성들은 무지, 무교육 상태였으며,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매매춘)을 하고 있던 사람도 몇명 있었다.

업자의 감언에 속고 빚에 팔려 “매춘은 생각도 못해”

업자의 감언에 속아 빚으로 묶여 있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들 가운데 도시(경성과 평양) 출신자가 4명이어서 그중 몇 명이 매춘부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교육받지 못한 시골 여성으로, 전장에서 매춘을 강요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관헌에 의한 강제적인 징집, 이른바 (폭력적으로 끌고가는) '강제연행'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주선업자와 연결돼 있는 경성의 기타무라가 어떤 경로로 여성들을 모집했는지 상세한 설명이 없다.

 

연합군 ‘동남아시아 번역·심문 센터’(SEATIC)가 작성한 ‘심문 보고 제2호(INTERROGATION BULLETIN No2)’

「심문 보고 49호」가 작성된 다음 달, OWI와는 별도로 연합군의 ‘동남아시아 번역·심문 센터’(SEATIC)가 작성한 ‘심문 보고 제2호(INTERROGATION BULLETIN No2)’(이하 ‘보고 2호’)에 기타무라 에이분이 포로 번호 ‘M 739’로 등장한다. 기타무라는 레도(Ledo) 수용소로 이송된 뒤 개별 심문센터(CSDIC(I))가 있던 인도 델리로 이송돼 거기서 본격적인 심문을 받았다. '보고 2호'는 그때 기타무라의 심문조서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보고 2호’에 따르면, 기타무라 부부와 기타무라 도미코의 언니(또는 여동생)는 경성에서 요리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장사가 잘 안 되자 돈벌이 기회를 찾아 버마에 위안부를 데려가려고 경성의 (조선군) 육군사령부에 허가를 신청했다고 한다. 같은 장사를 하는 복수의 일본인들이 육군 사령부로부터 허가를 받으라는 시사를 받았다. 기타무라는 여성들의 성격, 외모, 연령에 따라 그들의 부모에게 전도금(선금)을 300엔에서 1000엔씩 지불하고 22명을 뽑았다. 여성들의 '소유자'가 된 기타무라에게 조선군 사령부는 각 육군 사령부 앞으로 서면(문서)을 보내 모든 편의를 도모해 주도록 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조직적 관여 아래 위안부 모집 위안소 운영

즉 민간업자인 기타무라는 군의 시사를 받아 위안부를 모으고, 군의 주선으로 위안부들을 남방으로 이송해서, 전선의 부대에 부속된 위안소를 경영했다. 발안(發案)부터 배치에 이르는 조직적인 '군의 관여'가 없으면 불가능해, 사실상 '동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안소를 필요로 한 것은 다름 아닌 군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집된 조선인 여성은 703명. 그 인솔자인 포주들 약 90명과 함께 조선의 부산을 출항한 것은 1942년 7월 10일이었다. (버마) 수도 랑군에 도착하자(그해 8월 20일), 그녀들은 20명에서 30명의 그룹으로 나뉘어 버마 각지의 부대로 보내졌다. 기타무라가 이끄는 22명(그중 2명은 현지에서 사망)은 북버마의 미치나를 수비하는 보병 제114연대에 할당됐다. 미치나에는 '긴수이'(나중에 다른 위안소 '박신로'와 합병, 조선인 위안부 20명), '모모야'(중국인 위안부 21명), 그리고 기타무라의 '교에이'(조선인 위안부 22명) 등 3개의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배속된 일본군 보병 제114연대가 주둔한 버마(미얀마) 북부 미치나.

일본군 전멸 뒤 버마 미치나에서 미군 등 연합군에 의해 구출된 일부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들이 이송된 인도 아삼주의 레도(Ledo)(빨간 표지)

‘심문 보고 49호’에는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판단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일상 생활과 노동 실태도 기록돼 있다.

그녀들의 버마에서의 생활은 다른 곳에 비해 사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버마에서의 생활 2년째(1943년)가 특히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식량이나 물자의 배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들은 원하는 것을 구입할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형편이 좋았다. [중략] 버마 체류 중에 병사들과 함께 스포츠 이벤트에 참가하거나 피크닉, 연회, 저녁식사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녀들에게는 축음기가 있었고, 도시에서는 쇼핑하러 나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위안소의 '포주'는 각 여성들이 계약할 때 얼마나 빚을 지고 있었는지에 따라 그녀들이 번 돈 총액의 50%에서 60%를 받았다. 이는 그녀들의 평균적인 월별 벌이가 약 1500엔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들은 '포주'에게 750엔을 지불했던 것이다. 많은 '포주'들이 고액의 식비와 물품 대금을 청구해 그녀들의 삶을 괴롭혔다. 1943년 후반에 군은 부채 상환을 마친 특정 여성들에게 귀국을 인정하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까지 일부 여성들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됐다.

보수 많았다지만 절반 이상 착취-‘자발적 응모’ 주장의 근거

이 인용문에 ‘성 노예’의 인상은 없으며, 이는 위안부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쪽 주장의 근거가 되어 왔다. 일본군이 전장에 매춘부를 데리고 다녔던 전대미문의 정보를 조사한 요리치는 이 문장에서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성매매를 강요받은 여성들이 의외로 편한 생활을 했던 시기가 있었고, 게다가 빚만 갚으면 자신의 의지로 귀국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악덕업자인 포주가, 고액 보수를 받는 그녀들을 착취하고 있었던 실상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생활형편이 좋았다"고 하고, 아래 인용문에서는 "삶을 괴롭혔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는 그녀들이 놓여 있던 상황을 짐작하기 어렵다. 당시 버마의 전황(戰況)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41년 12월,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 공격과 말레이 반도의 기습 상륙으로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파죽의 기세로 동남아시아에 침공한 일본군은 1942년 전반에 신속하게 버마 전토를 장악해 영국군을 인도로 패주시킨다. 1943년 3월에는 동남아시아 방면을 통괄하는 '남방군' 산하에 '버마 방면군'이 신설돼 버마 지배는 비교적 안정된다. 그런데, 태평양 전역(戰域)에서는 같은 해인 1943년부터 전황이 악화됐고, 인도를 거점으로 한 영국군도 버마 탈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미치나에서 서북쪽으로 약 250㎞를 가면 영국령 인도의 아삼주 레도, 반대로 동쪽으로 100㎞를 가면 중국 윈난성의 일본군 거점 성벽 도시 텅위에(騰越. 현재 중국에서는 텅충騰沖)가 나타난다. 이 텅위에의 동쪽을 흐르는 누장(怒江, 버마령에 들어가면 살윈강)을 넘으면 윈난 성도인 쿤밍, 그리고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있던 중국 남서부의 충칭으로 통한다. 텅위에는 (일본군이) 중국 국민당군과 대치하는 최전선이었다.

일본군의 북버마 점령에는 연합군이 중국군에 무기나 물자를 공급하는 '버마 공로', 이른바 '원장(援蒋. 장제스 지원) 루트'를 끊겠다는 노림수가 있었다. 이에 대해 연합군은 북버마의 정글을 꿰뚫는 ‘레도 공로’를 건설해 인도→북버마→윈난성을 연결하는 새로운 ‘원장 루트’를 구축함으로써 중국에 진주하는 일본군을 배후에서 압박하려고 했다. 비행장이 있는 미치나가 양쪽의 명운을 가르는 결전장이 된 것이다.

전황은 날로 일본군에게 불리해졌다. 대략 3만 명의 일본병사들이 목숨을 잃은 악명 높은 '임팔 작전'이 결행된 것은 미치나에서 위안부들이 포로가 되기 5개월 전인 1944년 3월이었다. 위안부들이 “생활형편이 좋았다”고 대답한 시기는 버마 도착 후 1년 정도로, 그 시기에 잠깐의 평화를 느낀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용문의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위안부가 고액의 보수를 받고 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당시 1000엔은 조선 공장 노동자의 3년치 연봉에 상당하는 액수였다고 하니, 포주가 절반을 떼어가고 남은 월 750엔도 대단한 보수다.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었던 식민지 조선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벌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성들이 위안부가 된 경위는 부조리 그 자체지만, 그것이 매춘의 실상이며 범죄의 주체는 포주, 즉 뚜쟁이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 이 위안부의 보수다.

속았다고는 해도, 그녀들은 몸이 팔린 신세였다. 전장인 버마까지 끌려간 이상 거기에서 저항해 봤자 들어줄 리 없었다. 가난한 가족을 구하기 위해 진 빚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기구한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녀들에게 어떤 자발성이 있었다고 해도, 그러한 종류의 자발성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기록대로라면 빚을 갚아 귀국이 허용된 경우도 있었던 것 같지만, 앞의 '보고 2호'에는 기타무라의 위안소에서는 한 사람도 귀국할 수 없었다고 적혀 있다.

부대별로 줄을 선 하루 30명 이상의 군인들 상대

사정이 어쨌든 일련의 상황을 만들어낸 일본군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녀들이 강요당한 노동의 실태는 너무 가혹하다. '교에이'에서는 이용자가 너무 많아 혼잡했기 때문에 월요일은 기병대, 화요일은 공병대 등으로 각 부대에 이용일을 할당하는 윤번제를 실시했다. 이용 요금은 병사가 1엔 50전, 하사관 3엔, 장교 5엔이었다. 위안부 1명의 매월 벌이는 1500엔 정도였다고 하니, 이용자의 80%가 병사, 20%가 하사관이었다면, 대략적인 계산으로 매월 800명 이상, 하루에 30명 이상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한다. 전쟁만 나지 않았다면 보통 사람들이었을 장병들이 위안소 앞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광경은 너무 삭막하다.

그녀들이 피 토하는 심정으로 모은 돈도 (결국) 종이 쓰레기가 된다. 미치나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함께 찍힌 20명의 위안부 사진(사진 1)을 보면 왼쪽에 동양계 미군 병사 4명도 나와 있다. 가장 앞에서 쪼그리고 있는 것이 중국계 원로이 창 대위고, 뒤의 3명은 일본계 2세 병사다. 창은 1980년대에 회고록 <버마-알 수 없는 이야기>를 출간해 그때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진 1

1944년 8월 14일 미치나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20명의 조선인 위안부. 왼쪽 끝이 원로이 창 대위, 오른쪽 끝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포주인 '기타무라 도미코'로 보인다.(제164통신 사진중대 프랭크 조지프 시어러 4등 기능병 촬영)

창 대위가 처음으로 그녀들을 방문했을 때, 반항적인 태도의 여성도 한 두명 있었으나 모두 겁을 먹고 있었고, 눈물을 흘리거나 절을 하며 무언가를 간원하는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사진 왼쪽 열 앞에서 세 번째에 있는 일본어가 능통한 그랜트 히라바야시 하사관이 통역을 했다. 그녀들은 서툰 일본어와 조선어를 섞어 말했는데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 중의 한 여성이 리더로 보이는 다른 중년 여성에게 말을 걸자,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여성들이 갑자기 히스테리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들은 돈을 몰수당하는 것을 걱정했던 것 같다.

리더 여성은 포주인 기타무라 도미코인데, 그녀가 미군 병사들에게 앞으로의 처우에 대해 묻자 히라바야시 하사관은 “억류는 단기적인 것이니 인도로 이송된 뒤에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기타무라가 조선어로 다시 그녀들에게 그 얘기를 전하자, 모두가 조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오직 일본군에 즐거움을 안겨 주기 위한” 존재

기타무라는 양복에 기모노 띠를 감은 기묘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띠 안에 뭔가를 잔뜩 집어넣어 임신부처럼 배가 부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창 대위가 띠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묻자 기타무라는 마지못해 띠를 풀고 종이 다발을 꺼냈다. 그것은 일본군이 발행하는 10(버마)루피짜리 군표 다발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그것들이 아무 가치가 없어졌다고 가르쳐 주어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미군 병사들은 안쓰러워져서 군표 일부를 담배나 캔디와 교환하자고 했더니 기타무라는 그것을 '삥땅 뜯기'라고 생각해 2다발만 내밀었다. 그 순간 여성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고, 어떤 사람은 불평하듯 웃었으며, 어떤 사람은 울었다고 한다.

창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조선 벽촌의 농가에서 이런 머나 먼 곳까지 억지로 끌려 온 그녀들은, 오직 제국 일본 병사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기 위해 여기에 와 있었다.”

그래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미치나에 있던 다른 위안소 ‘긴수이’의 위안부들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른다. (‘긴수이’의) 그녀들은 탈주하는 일본병 뒤를 쫓아 미치나를 흐르는 이라와디 강을 뗏목으로 탈출하려고 했으나 대부분 사망한 것 같다. 창은 회고록에서 “(탈출한 위안부의) 대부분은 일본군 병사들과 함께 강변에서 대기 중이던 연합군의 저격병에 사살당했음이 분명하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굶어 죽었거나 북버마의 정글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썼다.

조선어를 구사하는 기타무라 도미코는 아마도 경성 거주 일본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편인 에이분은 일본인 같지 않은 이름이다. 추측일 뿐이지만, 조선인 에이분이 일본인 도미코와 결혼해 아내의 기타무라 성을 갖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공영방송 KBS 시사 프로(2018년 8월 21일 방영)가 인도 이송 뒤의 그녀들을 추적했다. 중요한 발견은 없었지만, 기타무라 에이분에 대한 조사에서 정확한 주소가 기재되어 있는 것을 알아내 소개했다. 영문을 한자로 바꾸면 ‘경성부 아오바마치(青葉町) 2가 64번지(모리 다로)’다. 아버지의 이름은 '기타무라 니타로'로 돼 있었다. 현재의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2가 66번지에 해당해, 실제로 찾아가 보니 개발로 토지 구획이 크게 바뀌어 기타무라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없었다.

전쟁 전의 아오바마치에는 조선총독부 '조선철도국'의 관사가 늘어서 있었고, 완만한 언덕 위에서 경성역(현 서울역)과 남대문이 내려다 보였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현 신세계 백화점) 등이 있었던 번화가와도 가까웠다. 당시에는 경성에서도 유수의 ​​일본인 거주지역이었다고 한다. 어딘가에서 큰 돈이었던 전도금을 조달해 지방에서 위안부를 모집하고, 군 당국의 허가를 얻어 위안소를 경영했을 정도라면, 기타무라 부부는 유명한 뚜쟁이였음에 틀림없다.

 

참고자료

【일본 자료】

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編 「政府調査「従軍慰安婦」関係資料集成①警察庁関係公表資料」、199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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浅野豊美 「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同

西野瑠美子 『戦場の「慰安婦」』明石書店、2003年

尹明淑 『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明石書店、2003年

遠藤美幸 「戦場の社会史:ビルマ戦線と拉孟守備隊1944年6月―9月」慶應義塾経済学会、200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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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井和 「破綻した「日本軍無実論」」『世界』2015年9月号

【한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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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성 편저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 자료 ⅠⅡⅢ> 선인 2018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19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미래사 2020년

【미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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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bi-theater.com/roundup/roundup1130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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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 Won-Loy, Burma, The Untold Story, Preside Press, 1986

Ravenholt, Betty, West Over the Seas to the Orient, 2009

Cornebise, Alfred Emile, Soldier Extraordinaire, 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19

(https://www.armyupress.army.mil/Portals/7/combat-studies-institute/csi-books/soldier-extraordinaire-the-life-and-career-of-brig-gen-frank-pinkie-dor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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