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러=160.88엔…38년만의 엔 약세 '속수무책'
‘시장개입’ 한계, 상당기간 엔 약세 지속
과도한 정부 부채 등 금리 인상이 어려운 이유
“언 발에 오눔 누기”, 외환보유고 가용 규모 한계
미국 금리인하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일본
‘플라자 합의’ 역코스로 가면 1달러=260엔까지
26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 대비 일본 엔 시세가 1달러=160.88엔까지 떨어져, 1986년 12월 이후 38년만의 약세를 기록했다.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이 지난 4월 29일과 5월 2일 2차례에 걸처 약 9조 7천억 엔(약 84조 원) 어치의 달러를 시장에 투입해 엔을 사들이는 ‘시장개입’으로 엔 시세를 1달러=150엔대 초반까지 끌어올렸으나, 그 효과는 2개월도 지속되지 못한 결과가 됐다.
‘시장개입’ 한계, 앞으로 상당기간 엔 약세 지속
이날 엔 시세는 전날의 같은 시각 1달러 대비 1.17엔 떨어진 160.78~88엔에 거래됐으며, 유럽의 유로에 대해서도 한때 1유로=171.79엔까지 떨어져 2년만의 최약세를 보였다.
일본 재무성의 간다 마사토 재무관은 이날 “(엔의) 지나친 움직임에 대해서는 필요한 대응을 할 것”이라며 시장개입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해 시장의 엔 매도, 달러 매수 움직임을 견제했으나 그 효과는 한정적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견고한 미국 경기로 인한 인플레 우려 때문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예고했던 금리 인하 가능성이 불투명해지면서, 미국 금리 인하에 기대를 걸고 있는 일본 당국의 계산이 빗나가고 있어, 앞으로도 엔 약세가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중앙은행격인 FRB 고위관리들은 애초 올해 3차례 정도의 금리인하 조치를 예고했으나 경기 호조로 인플레 우려가 커지자 한 차례 인하 쪽으로 물러섰고, 그마저 언제가 될지 불투명해졌다.
정부 부채 이자 등 일본의 금리 인상이 어려운 이유
그렇다고 해서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려, 지금 엔 약세의 핵심 요인인 미국과의 금리 격차를 줄이기도 어렵다. 일본 정부가 조율 중인 2024회계연도(2024년 4월∼2025년 3월) 일반회계 예산안에서 112조700억엔(약 1015조원)의 세출액 중 4분의 1가량이 국채비(국채 원리금 상환비)인 상황(<교도통신> 20일)에서 금리를 올릴 경우 국채(정부 부채) 상환비가 늘어나 국가운용이 더 어려워진다. 일본정부 부채 규모는 일본 GDP(국내총생산)의 260%가 넘어 이미 이자 부담 위험이 너무 크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023년도의 일본정부 예산에서 국채비는 25조 2503억 엔으로, 일반회계 세출(114조3812억 엔)의 22% 정도를 차지한다. 이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본은행은 국채 발행 잔고를 줄여나가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세수가 세출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국채를 더 발행해 부족분을 채워야 할 처지인데다, 1조 2천여 억엔에 이르는 외환보유고의 대부분인 미국 국채로 채워져 있는 상황에서 이를 팔아 엔 매입에 나서기도 쉽지 않다.
미국 금리인하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일본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의 엔 매입, 달러 매도 시장개입은 일시적인 개선효과밖에 기대할 수 없으나, 그것을 통해 미국 FRB가 금리를 대폭 인하해 미일 간의 금리격차를 줄임으로써 엔 시세가 올라갈 때까지 시간 벌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금리 인하 조치가 늦어질수록, 그리고 그 인하폭이 줄어들수록 일본 엔이 약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번의 엔 시세 하락도 미국의 금리 하락에 대한 일본 당국의 기대가 오산, 오판이었음이 드러난 것이지만,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으로서는 미국의 금리인하에 매달리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엔 약세로 소수의 대기업들은 수출 호조 덕을 보고 있으나 대다수 중소기업과 가계 쪽은 수입물가 인상으로 더 어려워져, 경제 전체의 펀더멘털(기초 요건)은 좋지 않다. 지난 19일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5월의 무역통계속보에 따르면, 수출액은 지난해 동기 대비 13.5% 늘어난 8조 2766억 엔이었으나, 엔 약세로 원유 등의 수입액도 13.6% 늘어 무역수지는 1조 2212억 엔 적자였다. 2개월 연속 적자다.
미국 경기 호조, 인플레 우려로 금리인하 꺼려
5월 이후에 공표된 미국의 경제지표들에 따르면, 탄탄했던 개인소비가 약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인플레도 다시 둔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5월의 고용통계에서 취업자수가 시장의 예상치를 넘었고, 신용평가기관인 S&P 글로벌이 발표한 6월의 미국 제조업 구매관리자 경기지수(PMI)도 2년 2개월만의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미국경제는 여전히 호조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따라 인플레가 재연될 위험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금리 인하 시작 시기를 둘러싼 FRB 내의 견해들도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금융 긴축 쪽으로의 방향 수정에 호의적인 시카고 연방은행의 오스턴 굴스비 총재는 금리 인하에 전향적인 발언을 하고 있으나, FRB의 미셸 보우먼 이사는 지난 25일 강연에서 “아직 금리를 인하하기 위한 적절한 시점에 이르지 못했다”며 섣부른 인하 조치에 반대했다.(<일본경제신문> 27일)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지난 12일 공표한 정책금리 전망에서 2024년의 금리 인하를 1회로 제한한다는 것을 중심으로 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시장에서는 금리 인하를 한 번만 실시한다면 그 시기가 12월쯤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를 반영해 정책금리의 움직임에 민감한 2년물 미국 국채 이자가 4.7% 정도로 높은 수준을 유지해 달러 강세로 이어지고 있다.
‘플라자 합의’ 역코스로 가면 1달러=260엔까지
엔 시세는 1973년 변동환율제로의 전환과, 1985년의 ‘플라자 합의’로 장기적인 엔 강세 국면이 이어지면서 2011년에는 1달러=75.32엔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2012년 말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제2기 집권을 시작한 아베 신조 내각이 장기불황에 시달리는 일본경제의 디플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2013년에 시작한 무제한의 초저금리 금융완화 정책으로 엔을 시장에 풀어 엔 강세를 약세로 반전시킨 데다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2021년 이후 엔 약세, 달러 강세 흐름이 가속화했다.
일본이 급격한 엔 강세에 직면하기 시작한 것은 ‘플라자 합의’ 다음해인 1986년 12월이었다. 지금의 달러 대비 엔 시세가 당시의 경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급격한 약세로 바뀐다면 1달러=260엔 부근까지 가는, 저점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닛케이>는 예측했다.
“언 발에 오눔 누기”, 막대한 외환보유고 가용 규모 한계
가류(柯隆) 도쿄재단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엔 약세가 진행된다는 것은 인플레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런 상황이 더 심해지면 일본은행은 가을 이후에 금리 인상을 가속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기시다 정권이 정책 감세를 실시했지만 소비는 늘지 않았다면서, 그 이유는 그것이 “언 발에 오줌 누기”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가 상승에 비해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이 별로 없고, 그것마저 한 번 정도밖에 쓸 수 없는 돈이라고 그는 말했다. 1조 2천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자랑하지만 대부분이 미국 국채로, 그 중에서 실제로 마음대로 팔아서 시장개입에 나설 돈을 마련하기는 어렵고(당연히 미국은 반대할 것이다), 하더라도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이 한 번 개입할 수 있는 정도밖에 없다는 얘기다. 다시 한 번 시장개입에 나설 경우 만일 그 효과는 제한적인 데다 그 뒤에는 동원할 방법이 없어지게 된다면, 시장의 투기세력 공략에 속수무책이 돼 엔 약세를 더 가속시킬 수 있기에 개입에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