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가경쟁력 역대 최고라는데…신뢰성은 의문
IMD평가 8단계 올라 20위, 역대 최고 기록
“기업인 설문조사 비중 높아 주관적 평가”
신뢰·타당성 의문…매년 순위도 들쭉날쭉
박근혜 정부 때는 “신뢰 어렵다” 공식 주장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18일 ‘2024년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해마다 이맘때쯤 나오는 보고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해는 전체 67개국 중 한국이 20위를 차지해 역대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국민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가인 ‘30-50클럽’ 7개국 가운데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인구 2000만 이상인 30개국으로 범위를 넓혀도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조사 대상과 방식, 매년 들쭉날쭉 바뀌는 순위 등을 자세하게 뜯어보면 흥분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IMD 국가경쟁력 평가는 경제성과와 정부 효율성, 기업 효율성, 인프라 등 4대 분야, 20개 부문, 336개 세부 항목에서 이루어진다. 전체 세부 항목 중 80개는 보조지표다. 이번에 순위를 끌어올린 분야는 ‘기업 효율성’과 ‘인프라’다. 기업 효율성은 지난해 33위에서 23위로 뛰어올랐고 인프라도 16위에서 11위로 상승했다. 반면 경제성과는 14에서 16위로, 정부 효율성은 38위에서 39위로 하락했다.
기업 효율성 부문에서는 생산성·효율성(41→33위)과 노동시장(39→31위)이 각각 8단계 상승했고, 금융(36→29위)과 경영 관행(35→28위), 태도·가치관(18→11위)이 각각 7단계 올랐다. 인프라 5개 부문 중에는 기본 인프라(23→14위), 기술 인프라(23→16위), 과학 인프라(2→1위), 교육(26→19위) 등 4개가 상승했고 보건·환경 부문만 한 단계(29→30위) 낮아졌다. 세부 상목인 보건 인프라(14→27위) 순위가 떨어진 영향이 작용했다. 이에 대해 기재부는 “보건 인프라가 사회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조성돼 있는지에 대한 설문조사 항목인데 조사 시기가 올해 3~5월인 점을 고려하면 ‘의대 증원과 전공의 파업’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경쟁력 평균 순위를 떨어뜨린 경제성과 분야에서는 성장률(44→34위) 등 국내경제 부문 순위가 11위에서 7위로 올른 반면 국제무역 부문이 42위에서 47위로 하락했다. 국제무역 세부 지표 중 무역수지(54→49위) 순위는 상승했으나 여행수지 악화 등 민간 서비스수지 순위가 38위에서 62위로 큰 폭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투자와 물가 부문도 각각 3단계(32→35위), 2단계(41→43위) 떨어졌고 고용 부문은 작년과 같았다.
한 단계가 하락한 정부 효율성 분야에서는 조세정책이 26위에서 34위로 하락한 영향이 컸다. 조세정책 부문 중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총조세가 32위에서 38위로, 소득세가 35위에서 41위로, 법인세가 48위에서 58위로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조세정책 순위를 좌우하는 것은 조세 부담이다. 윤석열 정부의 부자 감세 정책에도 순위가 떨어진 건 조사의 신빙성에 의문을 들게 만든다.
설문조사 대상은 주로 기업인인데 세율을 낮춰도 실적이 떨어지면 세금 부담을 크게 느낄 수 있다. 조세정책을 뺀 재정(40→38위)과 제도(33→30위), 기업 여건(53→47위), 사회 여건(33→29위) 등 4개 부문은 모두 순위가 올랐다. 기재부는 이날 발표한 보도 참고 자료에서 “정부는 평가 결과를 참조해 기업 효율성 제고를 더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재정의 지속가능성 확보, 세제 합리화, 기회균등 등 정부 효율성 제고와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와 수지 개선 등 경제성과 개선, 인프라 구축 등 종합적인 국가경쟁력 강화에 더욱 힘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메시지 없이 형식적인 내용의 논평을 낸 셈이다.
IMD 국가경쟁력 순위가 20위를 기록한 것은 1997년 한국이 평가 대상에 포함된 이래 최고 순위다. 비교 대상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 신흥국 등 67개국이다. 올해는 싱가포르가 지난해 4위에서 1위로 올랐고 스위스, 덴마크, 아일랜드, 홍콩이 그 뒤를 이어 5위권에 들었다. 대만(8위), 미국(12위), 중국(14위), 사우디아라비아(16) 등이 한국을 앞섰고 일본은 38위, 독일은 24위로 순위가 밀렸다. 영국과 프랑스도 각각 28위와 31위로 한국보다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상위권에 포진한 나라 중 상당수는 인구나 국토 면적이 작은 강소형 국가다.
매년 6월 IMD 국가경쟁력 순위가 나올 때마다 대다수 언론은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 보도한다. 올해는 기업 효율성 순위가 뛰어오른 데 반해 정부 효율성 분야 중 조세정책 부문이 낮은 점수를 받은 만큼 세제 개혁을 주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공허한 울림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조사 자체가 신뢰성과 타당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에는 기재부와 금융위원회가 IMD와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를 놓고 “객관성에 문제가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해외에서는 국가경쟁력 순위를 단순 참고 자료 정도로 보고 있고 폴 크루그먼을 비롯한 세계적 석학들은 각종 경쟁력 지표상 순위 하락을 국가경쟁력 자체의 하락으로 인식하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WEF와 IMD 국가경쟁력 평가에 대해 “국가경쟁력을 설명하는 명확한 개념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경쟁력을 설명하는 하위요소의 구성에 관한 이론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두 기관 모두 설문조사를 통한 연성자료의 활용도가 매우 높은데도 불구하고 표본설계의 타당성 및 대표성은 낮은 편”이라고 혹평한 국내 연구 논문도 있다. 이들 기관 정한 국가경쟁력 순위가 여러 측면에서 국가 간 비교 정보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국가 정책을 평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지난해 IMD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은 28위로 전년보다 한 단계 하락했다. 최근 3년간 윤석열 정부의 정책 기조나 기업 경쟁력, 인프라 측면에서 바뀐 것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올해 갑자기 8단계나 상승하며 역대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들쭉날쭉한 순위 변동만 봐도 IMD 국가경쟁력 평가의 신뢰성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