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행위자’들의 끈질긴 거짓말, 정보 조작과 은폐
현실 부정과 거짓말 예사로 반복하는 ‘중독 조직’
중독 행위를 옆에서 더욱 부추기는 ‘동반 중독자’
윤석열 정부와 검찰은 전형적인 중독 조직 사례
회피‧부인 아닌 직시‧응답의 ‘책임 윤리’ 구현해야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가담자들이 3명 더 있음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도 알고 있었으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신군부 정권에 대한 총체적 공분이 폭발…”(1987년 전두환 정부 때)
“국민에게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청와대 방문 사실을 감추려다 그 숱한 루머가 난무했고, 그럼에도 속수무책이었고, 그래서 일파만파로 일이 커진 게 아닌가…”(2016년 박근혜 정부 때)
“왜 윤 대통령은 하필 탄핵과 비선, 은폐를 연상시키는 정호성을 대통령실에 들인 것인가 (…) 채 상병의 불행한 죽음을 규명하는 일은 기실 이렇게까지 온 나라의 에너지를 잡아먹을 일은 아니었다. 대통령(실)의 수사 방해 및 은폐가 의심되지 않았다면….”(2024년 윤석열 정부)
우연히 본 <동아일보>의 김순덕 칼럼(6월 1일)에 눈이 멈췄다.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친화적인 보수 언론조차 “국민은 권력자의 비리 그 자체 못지않게 비리 은폐에 무섭게 분노한다”며 앞의 글처럼 지난 40년간 은폐의 흑역사를 간략히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국민은 분노한다. 비리도 문제지만 은폐는 더 문제다.
중독 행위자를 더 중독시키는 동반 중독자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중독 행위 이론’을 떠올린다. A. W. 섀프 박사가 <중독조직> 또는 <중독사회>에서 제시한 ‘중독 행위’란 마치 알코올 중독자의 생각이나 행동처럼 본인의 알코올 중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현실 부정이나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정보 조작과 은폐를 반복하는 행위 패턴이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하면 타인의 느낌, 생각, 행동까지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섀프 박사에 따르면 이러한 개인의 중독 행위 패턴은 다양한 조직이나 심지어 사회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조직 전체가 고유의 사명에 충실하기보다는 우두머리나 실권자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거짓말, 정보 조작과 은폐, 통제 환상 등의 행위 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전형적인 중독 조직! 또, 한 사회 전체가 무한한 경제성장이라는 허구적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가운데 그 구성원들의 심신이 소진되거나 사회적 불평등과 분열이 강화되며 자원 고갈, 생태 파괴, 기후 위기 등 삶의 위기가 고조됨에도 마치 그런 문제는 시간이 가면 자동 해결될 것처럼 믿고 따르기도 한다. 전형적인 중독 사회!
새프 박사의 이론에는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게 있다. 그것은 개인, 조직, 사회 등 그 어느 경우에도 끈질긴 중독 행위(자) 곁에는 반드시 ‘동반중독자’가 있다는 점이다. 만일 동반중독자가 중독 행위자 곁에서 적극 옹호하고 변호하며 호응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 중독 행위자는 자신의 중독 행위를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동반 중독자가 중독 행위자에게 “항상 잘하고 계십니다” 또는 “누가 뭐래도, 옳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라고 맞장구를 치기에 그 중독 행위는 중단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그게 아니오!”라며 비판 또는 저항을 하면 이들은 ‘입틀막’ 식으로 대응한다. 내부 고발자나 온갖 비판자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무시‧귀양), 또는 실제로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투옥‧살해)이 그들의 전형적인 대처법이다. 물론, 매수나 감투 씌우기를 통해 (약간 고급스럽게) ‘존재 변형’을 시키기도 한다. 더욱 ‘폼’ 나게는, ‘협치’의 형식을 빌려 공동 결정과 공동 집행을 하는 것처럼 가장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권력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속 모든 나라가 중독 조직
이런 이론적 논의를 염두에 두고 앞의 비리 내지 은폐 정권의 모습들을 다시 보면, 대한민국 정부나 검찰은 전형적인 중독 조직의 사례를 보여준다. 또 그 조직의 우두머리나 유력자들은 전형적인 중독 행위자의 패턴을 재현한다. 일례로, 김순덕의 칼럼처럼 “채 상병 사건 처리 과정에 대통령실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정황과 추측을 하고, 가짜뉴스를 만들어가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대통령[실]이) 감히 입을 놀렸”던 모습이 바로 전형적인 중독 행위다. 이렇게 뻔한 거짓말로 거짓과 비리를 덮으려 한 것은 “국민이 개돼지로 보이는 모양”이라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은 개한테도 그렇게는 안 하며, 그렇다 해도 먹히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런 식의 중독 행위를 하는 개인, 조직, 사회의 모습은 결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크게 보면, 무한한 이윤 추구를 위해 사람과 자연의 생명력을 흡혈귀처럼 부단히 빨아들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중독 행위자 아닌가?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낮은 도수의 술에 쾌락을 느끼다가 갈수록 도수 높은 술을 마셔야 일시적이나마 만족하듯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인간적 필요가 아닌 무한한 이윤을 추구하기에 영원한 불만족, 무한한 허기의 늪에 빠진다. 그 와중에 사람과 자연이 파괴되는 줄도 모르고 무감각, 무능력, 무책임하게 ‘꼼수’만 부리다가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만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생태, 심리 등의 복합위기가 바로 그 증거 아닌가?
자본주의 시스템 속의 각 나라들 역시 중독 사회 내지 중독 조직의 모습을 드러낸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은 2017년 6월에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하고 2020년에 공식 탈퇴했다. 도널드 트럼프(공화당) 미국 대통령은 심지어 지구 온난화나 기후위기 같은 ‘팩트’ 자체도 부정했다. “비과학적이고 미국 이익에 반한다”라는 것이 파리협약 탈퇴의 근거다.
원래 파리기후협약은 (1997년 12월, 37개국에 의해 채택되어 2005년 2월부터 발효, 2020년 만료된) ‘교토의정서’(6대 온실가스 감축 권고)의 뒤를 잇는 국제 환경 협정으로,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195개국 서명으로 체결됐다. ‘2030년까지 서명국들이 감축할 ‘온실가스 목표량’과 ‘이행 강제성’을 담았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면이 있다.
기후위기 간과하는 미 대법원도 중독 행위자
반면, 트럼프 이후 대통령이 된 조 바이든(민주당)은 2021년 1월 취임 직후에 전임 정부의 파리협약 탈퇴를 공식 사과하고 재가입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미 연방대법원은 2022년 6월 말, 연방정부 기관인 환경보호청(EPA)이 미 전역의 석탄·화력발전소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했다. 웨스트버지니아 등 공화당 우세 주들이 EPA의 규제가 주 정부의 권한을 넘어선다며 제기한 소송에 연방대법원이 6대 3의 다수 의견으로 원고의 손을 들어준 것! 미 대법의 판결문은 “의회가 EPA에 모든 발전소의 배출량을 제한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라고 그 근거를 들었다. 이렇게 미국의 연방대법원조차 기후위기나 삶의 질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형적인 중독 행위자의 모습을 보인다.
이는 미국의 많은 주들이 주헌법에서 ‘환경권’ 개념을 명시하거나 실제 환경 소송에서 시민의 편을 드는 것과 상반된다. 일례로, 2023년 8월, 미국 서부 몬태나주에서 미래 세대가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와 주 정부의 화석연료 정책 책임을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최초로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원고는 5~22세 청소년 16명으로, ‘깨끗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규정한 주헌법에 의거, 주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캐시 시엘리 판사는 “주 정부의 지속적인 화석연료 개발은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주헌법의 조항을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중독 조직 아닌 건강 조직의 사례다.
최근 한국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헌법재판소(소장 이종석)는 2024년 4월 23일, 사상 처음으로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 제42조 제1항 제1호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의 공개변론을 시작했다. 원고는 청소년 및 환경단체 회원들로, 2020년 3월에 정부의 미온적 정책이 헌법 35조의 환경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같은 취지로 접수된 3개 사건과 함께 4개 사건이 병합되었다. 이종석 헌재소장은 “이른바 ‘기후소송’인 이 사건의 주된 쟁점은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불충분해 청구인들의 환경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여부”라고 전제하고 “미국과 독일,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기후소송 관련 다양한 결론이 나왔고 지금도 (소송이) 진행 중에 있다”며 “최근 유럽인권재판소는 스위스 정부 기후변화 대응책이 불충분해 국민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결정을 선고했고, 이는 국내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는데 재판부도 이 사건의 중요성과 국민적 관심을 인식해 충실히 심리하겠다”고 했다. 물론 최종 결과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이 소장의 발언을 보면 그나마 헌법재판소가 (최소한 이 건과 관련해서는) 기존 정부 기관이나 검찰 조직에 비해 (중독 조직이 아닌) ‘건강 조직’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피고에 해당하는 정부 측) 환경부나 국무총리실은 여전히 ‘정부 정책엔 별 문제가 없다’는 식의 중독 행위(현실 부정)를 보이고 있어 헌재의 최종 결정이 주목된다.
회피나 부인 아닌 직시와 응답이 ‘책임의 윤리’의 밑바탕
미국 몬태나주 법원이나 한국 헌법재판소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듯 개인이나 조직, 사회나 세계가 중독 행위를 벗어나 건강한 회복력을 보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전제조건들을 관통하는 것은 ‘책임의 윤리’다. 더 이상 ‘꼼수 정치’가 아닌, ‘책임 정치’가 절실한 까닭이다. 여기서 ‘책임’(responsibility)이란 말의 라틴어 뿌리가 ‘응답’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회피나 부인이 아닌 직시와 응답이 ‘책임의 윤리’를 구현하는 밑바탕이다.
첫째, 현실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일들(예, 각종 비리, 사회 불평등, 구조적 폭력과 살인, 기후위기 등)을 부정, 은폐, 왜곡, 조작하지 않고, 사실과 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공개할 것.
둘째, 그 잘못을 저지른 개인과 조직이 상응하는 책임을 지고 합당한 절차를 거쳐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며,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각도의 예방 체계를 구축할 것.
셋째,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긴요한데,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더 나은 삶’을 공동 목표로 세우고 정보 공유, 열린 대화, 상호 치유, 집단 지성을 통해 꾸준히 ‘시스템 전환’을 할 것.
앞의 칼럼에서 김순덕은 “윤 대통령이 이종섭 국방부 장관과 통화한 사실과 내용을 진솔하게 밝혀준다면(그리고 앞으론 격노하는 버릇도 고치겠다고 덧붙인다면), 대통령 편에 서겠다는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했다. 그러나 사태의 해결책은 윤 대통령의 개인적 자백이나 반성보다 훨씬 먼 곳에 있다. 왜냐하면 그를 둘러싼 개인들, 조직들, 사회가 여전히 ‘동반중독자’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과 단호하게 ‘헤어질 결심’이 책임 정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동반중독자란 그 부인만 일컫는 게 아님이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