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로, 너의 붉은 피" 역사의 뒷것이 남긴 '오월의 노래'

1980년 광주 참상과 살아남은 자들의 각오 담아

민주화 한 세대 지나도 모습 드러내지 않는 작사가

멜로디는 폴나레프 샹송과 박인희 번안곡서 따와

"그날 장군들 금빛 훈장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다"

붉은 피 솟는 우리들의 오월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4-05-18     이승원 코리안헤리티지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꽃잎처럼 금남로에 /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의 부릅뜬 눈 /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자들아 동지들아 /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 역사 /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피!피!

 

광주 5.18 민주공원의 구 묘역(망월동 묘역)에 있는 김남주 시인의 묘. 2009.5.18 연합뉴스

해마다 오월이 오면 이 노래를 부른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가장 널리 불린 곡 가운데 하나다.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은 강렬했다. 이 노래 가사 1절과 2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몽둥이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쏘았다. 젊은이들을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갔다. 여고생은 대검으로 가슴이 잘렸다. 계엄군의 폭력에 턱이 깨지고 머리가 함몰된 주검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5월 광주였다.

그러나 군사정권과 주구들은 광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했고 계엄군의 폭력을 고발하면 유언비어로 날조했다. 진실을 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쳤다. 그 결과 1995년 전두환, 노태우는 감옥에 갔고 1997년부터 ‘5·18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됐다. 망월묘역은 5.18 국립묘역이 됐다.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제자리를 잡기까지 17년이 걸렸다.

'축하' 화환과 '방아타령'

그렇지만 오월 광주에 대한 모욕과 조롱은 여전하다. 잊을만하면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이라고 이야기하는 자가 나타났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광주 타령이냐며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정부 공식기념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하고 <방아타령>으로 대신했다. 기념식장에 축하 화환을 보낸 정치인도 있었다. 가짜 민주화유공자가 있다며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는 주장도 끊이지 않는다. 오월 광주를 비하하고 욕보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망동은 멈추지 않는다.

 

오월의 노래

돌이켜보면 <굳세어라 금순아> <단장의 미아리고개> <전우야 잘 자라>처럼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노래는 꽤 많았고 지금도 널리 사랑받는다. 가사 역시 "눈보라가 휘날리는 / 바람 찬 흥남부두에"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고 / 맨발로 절며~ 절며 / 끌려가신 이 고개여” “전우의 시체를 / 넘고 넘어” 등 전쟁의 참혹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공감을 얻었다.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도 베트남 파병 용사가 돌아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적고 있다.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를 반기며 "우리 아들 왔다고 / 춤추는 어머니 / 온 동네 잔치" 한다. 어딘가 있을 법한 소박한 노랫말이다.

 

김원중의 '바위섬'

어둔 시대 광주의 아픔을 노래한 <바윗돌> <바위섬>

반면, 오월 광주를 소재로 한 노래는 정오차의 <바윗돌>과 김원중의 <바위섬> 정도로 몇 편 안 된다. 이마저도 은유와 상징으로 슬픔과 아픔, 분노를 삼키는 특징이 나타난다. 정오차는 <바윗돌>로 1981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뒤 TV 인터뷰에서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말하자 바로 금지곡으로 묶였다. 광주의 아픔을 다룬 노래가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했으니 정권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김원중은 "세상 사람들 하나둘 모여들더니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라는 노랫말에 나타나듯 광주항쟁에 모인 시민들과 폭압적 진압을 폭풍우에 비유하며 고립된 광주를 '바위섬'에 빗대어 노래했다. 사실 이 노래는 배경을 모르면 <등대지기>처럼 서정적인 노래로 들리지만, 속뜻을 알고 들으면 그렇지 않다. 특히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 아무도 없지만 /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는 대목은 더 이상 서정적이지 않게 들린다. 슬픔을 딛고 살아남은 자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역사의 ’뒷것‘으로 남은 작사가

<오월의 노래>는 앞의 노래와는 다르다. 멜로디는 기존 곡을 빌렸지만, 가사는 사실적이고 직설적이다. 특히 1, 2절과 3, 4절 가사의 결이 다르다. 1, 2절은 광주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3, 4절은 산 자의 결의를 담고 있다. 이 노래 덕분에 많은 이가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되었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한길을 갈 수 있었다.

 

미셀 폴나레프(Michel Polnareff) -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Qui a tué grand maman?). 2007년 라이브

그런데 이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처음 불렀는지는 모호하다. 광주항쟁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노래치곤 의외다. 대략 1983-4년경 이 노래가 나온 것으로 추정한다. 1, 2절이 먼저 나오고 3, 4절은 덧붙여졌다고 생각된다. 5공 당시 엄혹한 분위기에서 만든 이가 자신을 드러내기는 어려웠음은 이해하지만, 4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퍼뜨렸는지 공백으로 남아 있다.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지났으니 만든 이가 나타날 법한데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알면서도 입 다문 이들도 마찬가지다. 소임을 다했으니 역사의 ’뒷것‘으로 남겠다는 생각이었으리라.

미셀 폴나레프의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와 박인희의 번안곡에 가사 붙여
<오월의 노래> 멜로디는 늘 라이방 선글라스를 써서 이른바 '라이방 가수'로 알려진 미셸 폴나레프의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Qui a tué grand maman?)>에서 따왔으나 원곡과 약간 다르다. 1974년 박인희가 이 노래를 번안한 <사랑의 추억>에 더 가깝다. 아마도 <오월의 노래>를 만든 이는 박인희 노래를 꽤 좋아했나 보다. 폴나레프 노래에 가사를 붙였다기보다 전형적인 사랑 노래인 박인희의 번안곡을 개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단조인 멜로디와 가사가 잘 어울렸다.

 

박인희의 '사랑의 추억' (1974)

원곡으로 알려진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는 1971년작으로 재개발에 저항하다 죽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다. <오월의 노래>와 맞닿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 노래는 미셸이 자신을 데뷔시킨 프로듀서 뤼시앙 모리스가 자살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다. 왜 미셸이 남자인 뤼시앙을 할머니로 표현하면서 이 노래를 추모곡으로 삼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태춘은 <5.18>에서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고 노래한다.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고 소년들의 무덤 앞에,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말이다. 그날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은 죽었어도 아직 땅에 묻히지 못했다. 유골함에 담겨 연희동 집에 있다. 지은 죄가 크니 편히 쉬지 못한다. 업보다.

 

정태춘의 '5.18'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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