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끝내 퇴치해야 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유령

국립극단 「블랙리스트 사례집」이 되살린 국가폭력의 기억

2024-02-07     홍태림 미술비평가·문화연대 집행위원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홍태림 미술비평가·문화연대 집행위원

국립극단은 2023년 10월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국립극단 사례집」(이하「블랙리스트 사례집」)을 발간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세상에 드러난 지도 8년이 넘은 시점이지만, 「블랙리스트 사례집」은 검열이라는 국가폭력이 많은 이들에게 남긴 상처에 대한 성찰과 외면할 수 없는 과제들을 재호출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국립극단 사례집』 (출처: https://www.ntck.or.kr/ko/publicData/shareInfo)

2013년에 국립극단은 청와대, 문체부와 함께 박정희·박근혜를 풍자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박근형 교수의 <개구리>에 검열을 자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검열은 국립극단에서 열리는 다른 공연들에 대한 대본 검열, 재공연 방해, 홍보물 수정, 공연 및 제작 참여 배제, 대관 취소라는 또다른 검열로 이어졌다. <개구리> 등에 대한 국립극단의 검열은 바로 가시화되지 않았지만, 2017년에 문체부의 민관협동 기구인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가 11개월 간의 조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 개선위원회 백서」(이하 「블랙리스트 백서」)에 기록하면서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국립극단은 2018년에 이「블랙리스트 백서」를 바탕으로 박근혜 정부 시기의 검열 사건들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사과문에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연출가와 같은 공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국립극단의 2016년 공연 사업 후보에서 배제된 <날아가 버린 새> 작가에 대한 사과가 누락되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2021년에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열린 포스터(사진 출처: https://www.facebook.com/photo/?fbid=5074067239329914&set=a.239929186077101&locale=ko_KR)

「블랙리스트 사례집」에서 적시하듯 <날아가 버린 새> 검열 사건에서 피해자는 작가뿐만이 아니라 이 공연과 관계된 배우, 제작진, 관객까지도 포함된다. 따라서 2018년에 국립극단이 발표한 사과문에서 <날아가 버린 새>에 대한 사과가 누락된 것은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누락은 국립극단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인식과 반성이 여전히 불완전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립극단은 2019년 10월에 <날아가 버린 새>에 대한 사과문을 다시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사과문을 계기로 국립극단과 문체부 블랙리스트 재발방지 제도개선 이행협치추진단은 <날아가 버린 새> 사건 당사자와 후속과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들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날아가 버린 새>의 작가와 연출가는 이 자리에서 국립극단에서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 조치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을 배·보상 조치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래서 국립극단은 이러한 당사자의 뜻에 따른 실천들 중 하나로「블랙리스트 사례집」발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피해자에게 각인된 트라우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극단은「블랙리스트 사례집」제작을 위하여 <개구리>, <날아가 버린 새> 검열 사건 등 총 9개 사건 피해자 26명과 면담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국립극단의 검열로 인한 충격 때문에 면담 내용을 끝내 비공개 처리할 것을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국립극단의 검열이 피해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이어졌음은 앞선 사례에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술인을 검열한 기관이었던 국립극단이 반성문을 발표하는 형식적 수준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신중히 소통을 이어가며 하나의 결실을 만들어 낸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의미도 매우 크다. 왜냐하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실행했던 가해기관들 중 국립극단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기록한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관련된 블랙리스트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TF에 참여하여 당사자들과 논의하는 자리를 몇 차례 함께 했지만, 그런 자리가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끝내 국립극단과 같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물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생한 검열은 워낙 다종다양하기에 국립극단과 같은 실천을 끌어내기 더 어렵다는 측면이 있지만, 이 어려움도 결국 기관 차원의 의지만 확고하다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다.

「블랙리스트 사례집」이 요구하는 예술감독의 반성

피해자들의 기억을 사회적 차원의 기록으로 끌어올린 「블랙리스트 사례집」은 국립극단에서 검열을 겪었던 예술인들의 명예와 상처가 회복되기 위한 단초를 만들었다. 따라서「블랙리스트 사례집」은 국립극단은 물론이고 너무나 정체되어 있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다시 풀어가기 위한 출발점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 사례집을 통해서 국립극단에 주어진 후속 과제는 바로 예술감독 선임 절차의 개선이다. 즉 문체부 장관에게 있던 예술감독 임면권을 국립극단 이사회에 이관하는 동시에 예술감독을 공모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더불어 국립극단 이사회 구성도 문체부로부터 독립성과 현장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개선될 필요가 있다. 박근혜 정부 시기에 국립극단 예술감독이었던 손진책(연출가, 예술원 부회장)이 청와대와 문체부를 통한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지 않고 동료 예술인들에게 검열이라는 국가폭력을 실행한 문제들을 생각하면 예술감독 선임제도 개선이 왜 필요한지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논의는 아직 진전을 이루지 못한 상황으로 보인다.

 

손진책 연출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린 '연극 햄릿'의 연습 현장에서 무대를 설명하고 있다. 2016.6.22.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편 이러한 제도 개선 외에 박근혜 정부 시기 국립극단 예술감독이었던 손진책의 공식적인 반성도 중요하다. 손진책은 당시 국립극단의 공연들에 가해진 각종 검열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과 국립극단의 최종 의사결정자였다는 점에서 예술현장과 국민들 앞에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진책은 지금까지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 제가 받고 싶은 오늘의 사과는 사실, 저기 객석에서 저희들의 대사를 실제로 검열하셨던 손진책 감독님의 그 발언에 대한 사과를, 저는 당사자한테 듣고 싶었거든요.”(「블랙리스트 사례집」 90쪽)

“(…) 손진책 감독님이 저희 연습을 보면서 ‘이 대사 바꿔’, ‘이런 거 이상해’한 것도 생각이 나요. 저희 원래 000선배님의 첫 의상이 빨간 내복이었어요. 그런데 빨간 내복을 ‘야! 국립에서 어떻게 그렇게 천박하게, 빨간색이 위협적이잖아’ 하면서 바꾸라고 했어요. 근데 우리가 그냥 딱 생각했을 때 내복은 빨간 내복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이게 빨간색이라고 안 되는 건가? (…)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첫 잠옷이 바뀌었거든요.”(「블랙리스트 사례집」91쪽)

<개구리> 이후 손진책은 국립극단에서 예술감독이 아니라 정부가 파견한 검열관이었음을 증언하는 후배 예술인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존재함에도 미학적 차원의 조언이었을 뿐이라는 변명만을 내놓을 뿐이었다. 손진책은 현재 매년 30억 원이 넘는 세금이 투여되는 대한민국 예술원 종신회원이다. 즉, 국민과 예술현장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갈등을 남긴 책임이 있는 인물이 반성도 없이 세금으로 매달 180만 원의 수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손진책은 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문학 분야 검열에 책임이 있음에도 단 한 번의 사과 없이 한국문학관 추진위원,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를 맡았다가 비판 여론에 자진사퇴를 거듭한 오정희 예술원 종신회원과 닮은꼴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각각 법정을 나서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6-1부는 이날 김 전 실장에게 징역 2년, 조 전 수석에게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했다. 2024.1.24. 연합뉴스

방치된 블랙리스트 피해자들, 속속 귀환하는 책임자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사회적 방치 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에 접어들어 <윤석열차>, 가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 등과 같이 각종 문화·예술 검열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명박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책임이 있는 유인촌이 다시 문체부 장관으로 임명되더니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설 특별사면까지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블랙리스트 사례집」은 국립극단뿐 아니라, 정체를 넘어 악화일로에 들어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반드시 다시 풀어나가야 함을 재확인할 수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개인 및 단체는 9272건에 이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11개월 간의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의 조사 건수는 짧은 활동 기간으로 인하여 145건에 그쳤다. 이로 인하여 현재까지도 블랙리스트 피해자 대부분은 명예회복에 이르지 못하고 방치된 상황이다. 왜냐하면 블랙리스트 사건은 헌법재판소 위헌 판결, 대법원 유죄 선고, 민사소송, 문체부 장관 사과, 김기춘·조윤선·김종덕 등에 대한 유죄판결을 통해 국가 책임이 인정되었지만, 대통령과 국회 차원의 사실 인정과 사과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 보상 및 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너무나 미진한 진상조사 지속을 통한 사회적 기억과 국가 배상을 통하여 피해자들의 명예와 상처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각 정당이 이 사안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며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줄지 똑똑히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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